우리말에 접두사 ‘참’(眞)이 들어간 말이 참 많다. 나쁜 말은 없다. 참말, 참소리, 참살이, 참꽃은 또 무엇인가. 사랑하던 님이 떠날 때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던” 진달래가 바로 참꽃이다. 참새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텃새다. 양 다리를 모아 총총 뛴다. 앙증맞고 귀엽다. 수명은 5년 내외로 산다.

그러나 참새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이중적이다. 영악한 참새는 가을 농촌 들판의 허수아비를 우습게 안다. 그런가 하면, 뒷담화나 입방아를 일삼는 인간 군상을 참새로 지칭하기도 한다. 고사 성어에 나타난 참새들도 그리 좋은 뜻은 없다.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 같은 큰 새의 뜻을 알겠느냐’는 말이 유명하다. ‘홍곡(鴻鵠)’ 즉, 기러기와 고니는 참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높으신 분의 심중을 알 리가 없다는 뜻으로 참새를 폄하한다. 한때 유행했던 참새 시리즈의 씁쓸한 여운까지 오버랩 된다.

참새는 매우 작은(小) 새(隹)이므로 한자로 ‘雀(작)’이라 한다. 옛날에는 참새의 작(雀)과 벼슬을 뜻하는 작(爵)이 음이 같다 해서 벼슬을 상징했다. 참새가 걷는 것을 보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설이 있어 벼슬아치에게 군작도(群雀圖)가 좋은 뇌물이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무척 즐기는 마작(麻雀)은 패를 뒤섞는 소리가 참새들이 대나무 숲속에서 재잘대는 소리와 같다고 해 붙여졌다. 작설차(雀舌茶)는 갓 눈이 튼 차 나무의 어린잎으로 만든 녹차다. 그 잎 모양이 참새의 혓바닥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 프랑스의 유명한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가명 ‘피아프(참새라는 프랑스어)’는 그녀의 작은 체구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 연산이 참새 잡는 공무원을 특채한 이유

옛사람들은 참새가 정력을 왕성하게 하고 기를 돋우며,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참새는 왜 정력에 좋다고 할까? 정력이 좋은 사람은 흔히 코가 큰 사람이 아니고 실제로는 목이 굵은 사람이라고 한다. 참새는 목이 너무 굵어 아예 목이 없다. 또한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큰 게 특징이다.

고구려 유리왕은 어릴 적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해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왕이 된 지 2년 후, 신기한 참새가 궁궐에 모였다고 <삼국사기>에 적었다. 백제의 의자왕은 참새 죽을 즐겨먹었다고 야사에 전한다.

1960~70년대는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를 팔기도 했다. 참새가 워낙 작아서 먹잘 게 있나 싶기도 하겠지만, 실제 먹어본 사람들은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고 말한다. 꿩은 덩치가 커서 살이 많은 편이지만 참새는 고기를 따로 떼어낼 만큼 크지 않다. 그래서 기름에 튀겨 소금에 찍어 먹거나 구기자 등과 함께 죽을 만들어 먹었다. 참새고기는 특히 가을철이 지나 살이 가득 오른 겨울철에 먹는 게 가장 좋다.

한의학적으로 참새고기는 원기를 회복시켜주고 피를 맑게 해주며, 신장 및 간 기능 강화에 좋다고 한다. 메뚜기를 많이 먹은 참새는 오골계 3마리를 줘도 바꾼다고. 그야말로 비아그라 뺨치는 ‘참 새그라’이다.

연산군은 재위 3년 되던 1497년 4월 5일, 참새 잡는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는 대신 9급 공무원에 특채했다. 연산은 아마 참새를 궁궐에서 많이 키우던 사냥매의 먹이로 쓴듯하다. 이틀 후 조정 대신들은 매 조련사 응사나, 참새 잡이를 특채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강력하게 건의했다. 그러나 연산 예비 응사는 철회했지만, 참새잡이는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혹자는 연산이 정력제로 참새를 먹었다고 하나 사실이 아니다. 실록을 살펴보면 연산군은 잠자리는 물론 메뚜기, 귀뚜라미, 베짱이 같은 곤충도 잡아오라고 시켰다. 연산군은 사슴 꼬리, 민물 장어, 마늘 백숙 등을 즐겨먹었으나 참새를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사슴 꼬리는 지방이 적고 노린내가 없어 정력에 도움을 주는 음식으로 쳤다.

연산군 시절, 참새를 잡으면 벼슬을 얻을 수 있으니 참새가 남아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종 때에 이르러 연산군 시절 억울한 일로 옥살이를 하거나 노역에 처한 대부분 사람을 구제해줬다. 그중 어떤 이는 연은전-경복궁 안에 있었던 덕종(성종의 부친)의 위패 사당-옥상에 들어와 참새 새끼를 잡았던 것 같다.

그는 이 일 때문에 죄를 입어 노비가 됐다. 영의정 정광필이 “이것은 아이들의 짓”이라며 그만 방면해 줄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중종은 “정전(正殿)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아직은 놓아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조선 최고의 ‘고양이 집사’였던 숙종은 일찍이 기르던 참새 새끼가 있었다. 이 참새가 죽자 버리지 말고, 묻어주도록 했다. 또 숙종은 우유를 취할 때 송아지가 소리를 지르자, 그 까닭을 묻고 나서는 우유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동물에게까지 인덕(仁德)이 있었음을 강조한 기록이다. 조선 시대 참새는 큰 우박 등이 내리면, 한꺼번에 몰살되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모택동의 참새 박멸 작전

중국에서 참새는 한때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마오쩌둥은 중국 지도자 중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가 벌인 정책 중 크게 실패한 게 바로 ‘참새 소탕 작전’이다. 당시 참새는 인민의 곡식을 뺏는 ‘계급의 적’이자 해로운 동물로 낙인찍혀 대대적인 박멸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1958년 식량 증산을 위해 쓰촨성 농업 현장을 시찰하던 마오쩌둥은 수확기에 접어든 벼를 참새들이 쪼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참새 때문에 농사가 잘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마오쩌둥은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참새를 없애라”고 한 마리 던졌다.

즉각 참새는 쥐, 파리, 모기와 함께 사해(四害), 즉 네 가지 나쁜 동물로 규정됐다. 1958년 4월 19일, 베이징에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만들어졌다. 중국 전역에서 새총과 그물, 독극물 등을 동원한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이렇게 잡힌 참새는 1958년에만 2억 1천만 마리에 달했다. 수백만 마리의 각종 야생동물들이 동시에 죽임을 당해 대거 사라졌다.

참새를 잡아 버리면 곡식의 수확량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풍년은 고사하고, 오히려 엄청나게 생산량이 줄었다. 1958년부터 60년까지 중국은 최악의 흉년이 들었다. 1958년 한 해 동안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다음 해도 쌀 생산량이 적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참새를 박멸하니 그동안 참새들이 잡아먹었던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메뚜기 등 해충들이 벼를 갉아먹어 대흉작이 되었던 것. 일설에 의하면 3년간 총 400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쯤 되자 마오쩌둥에 대한 비난이 고조됐다.

마오쩌둥은 어쩔 수 없이 참새 박멸 작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소련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긴급하게 연해주에서 참새 20여만 마리를 공수해 오는 촌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2억 마리나 죽였는데, 20만 마리의 참새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참새 소탕 작전’은 실패했다. 이 여파로 그는 권력 퇴진을 압박받아 2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중국 인민 수천만 명이 굶어죽은 대재앙을 초래한 후였다.

프러시아의 전제군주 프리드리히 대왕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버찌를 참새가 먹어 치우자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러나 벚나무에 해충이 생기고 나서야 참새의 역할을 깨닫고 보호하게 했다.

■ 펄벅의 소설 <대지>속 메뚜기의 재앙

“남쪽 하늘로부터 먹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다가오더니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이윽고 주위가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로 요동쳤다. 메뚜기 떼가 스쳐 간 곳은 잎사귀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했다. 아낙네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들을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31년 발표된 소설 <대지>는 출간되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서양에서는 생소했던 중국을 배경으로, 자연과 운명에 맞서 삶을 개척해나가는 농부의 삶을 그렸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작가 펄벅은 1938년 미국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주인공 왕룽의 일대기는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일을 열심히 해 어느 정도 살만해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사건이 터진다. 특히 우연찮게 얻은 보물로 고향의 땅을 사놓고 안심하던 상황에서 닥쳐오던 메뚜기 떼의 공포는 <대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메뚜기 떼는 농업이 발달했을 때부터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은 대재앙이다. 서양에서도 메뚜기 떼를 신이 내린 재앙으로 여겼다. 성경 <출애굽기>에서도 이집트를 덮친 10가지 재앙 중 하나로 묘사했다.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는 메뚜기를 즐겨 먹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 태종 관련 야사 중에도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 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 먹은 뒤 메뚜기 떼가 사라졌다고 한다. 야사인 만큼, 대부분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정조에게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사도세자 능 주위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를 삼켰다는 이야기다.

■ 곤충계의 식신 메뚜기 ‘황충’

메뚜기나 여치, 풀무치 떼는 곤충계의 식신으로 불린다. 종종 조선의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실록에서는 메뚜기 떼를 ‘황충’으로 적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황충의 피해가 자주 나온다. 백제 무령왕 때인 521년 가을에는 황충 떼가 곡식을 온통 갉아먹자 백성 900호가 신라로 도망가기도 했다. 심지어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은 메뚜기 떼의 출현을 태종에게 양위의 이유로 내세웠다.

영조 연간에는 유독 메뚜기 떼가 기승을 부렸다. 영조는 메뚜기를 삼긴 당 태종의 야사를 거론했지만, 삼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메뚜기 떼를 잡기를 명하면서, 불에 태우지 말고 구덩이를 파서 묻도록 당부했다. 그 이유는 메뚜기가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임금인 자신의 부덕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추곡수매가 한창이다. 최근에도 종종 메뚜기 떼가 출현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참새 숫자는 20여 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크게 감소했다. 도시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참새는 이제 각종 농약과 중금속에 쫓기는 불쌍한 존재가 됐다.

참새가 방앗간을 거저 찾아오랴. 어떤 행동이든지 다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 참새는 죽어도 짹 한다. 참새가 농민들에게 다소 피해를 주긴 하지만, 결코 해로운 새가 아니다. 산림청에 따르면 참새 1마리가 먹는 해충에 의한 방제 기여도는 수십만 원에 달한다.

중국은 참새 박멸 운동을 벌인 지 40년 만인 지난 2000년, 허가 없이 포획할 수 없는 보호종에 참새를 추가했다. 생태학의 큰 눈으로 보면, 참새는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일석이조라, 작은 노력으로 큰 이익을 얻으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안분지족’은 인간에게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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