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에는 두 위인의 동상이 서 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문(文)을 대표한 세종대왕, 무(武)를 대표해서 이순신 장군이 의연하다. 무관으로서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과 동급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장수로 김유신과 이순신을 꼽는다. 김유신은 무인(武人)을 알아주는 시대에 태어나 뜻을 폈다. 이순신은 무인을 구박하는 시대에 태어나 고생했다. 김유신의 생애는 장엄했고, 이순신의 삶은 비장했다.

성스러운 영웅이라는 뜻의 ‘성웅’으로 불리는 이순신은 ‘장군’일까 ‘제독’일까? 부르는 명칭은 군마다 다르다. 육군은 ‘장군(General)’으로, 해군은 ‘제독(Admiral)’이라고 호칭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1576년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무과 시험에 합격한 후 권관(權管; 종 9품), 지금으로 치면 육군 초급 장교로 임관했다. 육군 때는 주로 함경도 최전선에서 여진족 방어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불패의 신화를 남기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육군으로 입대해 해군으로 순국한 셈이다.

■ 이순신 첫 번째 사슴 섬 운명의 녹둔도(鹿屯島)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의 여의도 10배 만한 섬이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다. 세종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한 이래 사슴이 많아 녹둔도(鹿屯島)라고 불렀다.

세조 때부터는 백성들이 간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실록에도 10여 차례에 걸쳐 “녹둔도는 비옥하여 경작할 만하다”고 적었다. 그러다가 중종 때부터는 아예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봄에 농사지을 때가 되면, 부대장이 군민(軍民)을 거느리고 들어갔다가, 추수가 끝나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오랑캐’ 지역과 너무 가까워, 늘 침입 위협에 시달렸다.

1587년(선조20) 9월, 여진의 한 부족이 ‘녹둔도’를 기습했다. 가을 수확이 한창때였다.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군민 106명을 납치해갔다. 당시 43살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은 급보를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에 나섰다.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50여 명의 포로를 구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 책임을 돌린 병사(兵使) 이일 때문에 경흥부 부사 이경록과 함께 첫 번째 백의종군을 맞봤다.

조정은 이듬해 초 두만강 건너 여진족에 타격을 가했다. 군사 2,500명을 동원해 적 380명을 베었다. 이 반격 작전에서 이순신은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잡은 공으로 다시 복직됐다. 20세기 초까지 녹둔도에 이순신의 전승(戰勝) 비가 있었던 이유다.

녹둔도가 러시아 손에 넘어간 것은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 조약 체결 때문. 1860년도에 현재 하북성의 승덕에 위치한 피서산장에서 조약을 맺으며 러-중의 국경을 우수리강으로 정했다.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기 위해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속셈으로 이루어진 거래였다.

그 결과 러시아 영토는 마치 꼬리처럼 길게 남쪽으로 이어져 한국과 접하게 됐다. 30년이 지난 1889년(고종26),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도 항의하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도 요구했으나 들어줄 리 만무했다.

지금 ‘녹둔도’는 섬이 아니라 러시아 쪽 육지와 연결돼 있다.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섬으로 나타나 있다. 지속적인 두만강 하구의 퇴적 작용인 것 같다. 최근 녹둔도는 갈대숲과 늪지 초목들로 우거진 원시의 모습이라고 전한다.

■ 이순신 두 번째 사슴 섬 녹도(鹿島)

우리나라 섬 이름에 사슴 ‘녹(鹿)’, 노루 ‘장’(獐) 자가 들어간 곳이 여러 군데다. 충남 보령에 위치한 녹도(鹿島), 전남 여수와 순천의 장도(獐島) 등이 그 예다. 대개 조선 초기에는 말, 후기부터는 사슴을 사육하는 국영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또 어떤 곳은 처음부터 노루와 사슴이 많아서 유래했다.

바닷가에 노루와 사슴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호랑이나 표범 등 포식자를 피해 해안까지 내려온 까닭이었다. 또 그 사슴을 쫓아 호랑이가 따라왔다. 그중 하나가 전남 진도다. 이곳엔 진돗개만 유명하게 아니라 사슴도 많았다.

진도나 목포, 해남 등에 호랑이가 많았던 이유는 손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 이곳에 산재했던 국영 사슴과 말 목장은 일제 강점기 마지막 호랑이까지 불러 모았다. 개구멍은 진돗개가 피할 수 있도록 진도 특유의 시골 가옥 구조였다.

이와 관련 1499년(연산 5) 9월 13일 진도 군수 홍석필이 군사 4백여 명을 거느리고 사슴 사냥을 나갔다. 갑자기 사냥하던 남도포ㆍ금갑도(접도의 옛 이름)의 군사들과 왜구가 조우했다. 18명이 물에 빠져 죽고, 2명이 칼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군사를 동원해 몰이사냥할 만큼 많은 사슴이 진도 일대에 살았다는 증거다. 지금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는 사슴의 뿔처럼 생겨 녹진이라 했다고 잘 못 알려졌다. ‘녹진(鹿津)’이라는 동네는 그저 지형 때문에 생긴 이름이 아니다.

진도와 완도는 구한말에도 왕실 사슴목장으로 사용됐다. 여수 금오도엔 명성황후 사슴 목장이 있었다. 여수시에는 10여 년 전 꽃사슴을 방목했다가 철회했다. 요즘엔 노루와 고라니만 가끔 보인다.

고흥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녹동항은 천혜의 항구다. 조선 시대에는 수군기지 ‘녹도진’이 자리했다. 지금도 해상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사슴의 인연이 참 기이하다. 함경도 ‘조산만호’ 시절에는 사슴 섬 ‘녹둔도’에서 고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맹장으로 이름을 떨쳐 나중에 전라좌수사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데 지명에 사슴 ‘녹’(鹿) 자가 들어간 ‘녹도만호’와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만호’는 조선시대 종 4품의 외관직 무관. 대개 바닷가 항구(포)에 설치된 수군 진영의 장수다. 지금의 중령에서 대령 급에 해당된다. 녹도진 수군은 전라좌수군의 최정예이자, 이순신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이었다. 그 중심에는 세분의 ‘녹도만호’가 있었다.

■ 이순신과 세 분의 ‘녹도 만호’

첫 번째 ‘녹도만호’는 이대원 장군(1566∼1587)이다.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1세에 만호가 된 출중한 무장이었다. 조선 수군 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수군 지휘관이 됐다. 1587년 이순신이 북쪽 두만강 변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혈전을 치를 때, 남쪽 바다에는 녹도만호 이대원이 왜구와 전투를 벌였다.

그가 22살인 1587년(선조20) 2월 정해왜변이 일어났다. 일종의 임진왜란의 시험 무대였다. 그는 녹도 수군과 왜적을 무찔러 큰 전공을 세웠지만, 전라좌수사 심암의 시기로 손죽도 해상에서 순국한 비운의 장수다. 만약 이대원이 그 때 전사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순신과 힘을 합쳐 왜적을 무찔렀을 것이다.

두 번째 ‘녹도만호’는 정운 장군(1543∼1592)이다. 1591년(선조24) 녹도만호가 됐다. 이순신은 출정에 앞서 전라좌수군 관할 5관 5포를 돌며 전투 준비 태세를 점검했다. 가장 완벽한 곳으로 정운 장군의 녹도진을 꼽았다.

매번 전투에서 이순신의 돌격 대장을 맡았다.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도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산포해전에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세 번째 ‘녹도만호’는 정운 장군의 후임 송여종 장군이다. 1597년 정유년 9월 16일(양 10월 25일), 운명의 날. 이른 아침부터 수백 척 적선이 바다를 뒤덮고, 명량으로 몰려왔다. 송여종 장군은 포연이 자욱한 전투현장에서 이순신을 도왔다.

다음 해 7월에는 명나라 수군과 연합해 적선 50여 척을 대파한 절이도 해전의 선봉에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녹동항 서쪽 야산에는 녹동항 전망대와 전망대를 내려오면 녹도만호 이대원과 정운 장군을 배향한 ‘쌍충사’가 자리한다. 송여종 장군까지 세 분을 모셨으면 한다. 일본군에 맞선 세분의 녹도만호는 더욱 선양해야 한다.

녹동 바다정원에서는 멀리 소록대교와 소록도 등을 바라볼 수 있다. 소록도는 녹동항에서 1㎞가 채 안 된다. 섬의 모양이 사슴과 비슷하다고 소록도라 불렸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끌려와 강제 수용됐던 한센인 환우들의 고통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 <난중일기>속 사슴 사냥은 자급자족 식량

<난중일기> <열하일기> <백범일지>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안 읽은 책이기도 하다. <난중일기>는 전란을 기록한 공식 문서가 아닌 이순신 개인의 일기지만, 매우 소중한 역사적 사료다. 임진왜란 7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민낯을 알 수 있다.

일기는 전쟁 중 나라 안팎의 사정이나 군사 작전, 군인들의 활동과 상벌 제도 및 거북선과 무기를 만들던 장인과 의병활동까지 기록했다.

또 이순신의 ‘쌩얼’까지 그대로 보여준다. 여과되지 않은 감정도 그대로 담겨 있다. 괴로움에 술을 마셨다거나 활을 쏘았다는 기록,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막내아들 면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그대로 담겼다.

<난중일기>에서도 사슴과 관련한 일화를 찾을 수 있다. 이순신은 일기에서 부하들이 잡은 사슴이나 노루 몇 마리까지 적었다. 대부분 자급 자족을 위한 식량으로 썼다. 전란 다음 해인 1593년 2월, 그 무렵 조선 수군은 진해시 웅천 등지의 일본군을 2월 10일과 12일, 18일, 20일, 22일, 3월 6일에 각각 공격했다. 거의 한 달 이상을 경상도 바다에서 전투를 반복했다.

2월 20일(음력) 이순신은 임시로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로 돌아와 물을 긷고, 밤을 보냈다. 이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부사 권준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당시 거제도에는 사슴이 떼로 살았다. 오랫동안 섬을 비워둔 공도 정책의 영향도 컸다.

6월 22일부터 시작된 2차 진주성 싸움은 조선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일본 육군이 전라도로 진출할 교두보가 마련된 것. 조선의 절대 위기였다. 1593년 7월, 이순신은 여수의 전라 좌수영 진영을 통영 한산도로 옮겼다. 이순신의 선택은 정확했다. 한산섬은 부산의 코앞이었다. 일본군을 압박하고, 틀어막을 수 있는 일석이조 요충지였다.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이순신이 수군 사령관이 되자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었다. 적어도 이순신 옆에 있으면,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한 탓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에 부닥쳤다. 바로 부족한 식량이었다. 이순신은 식량을 마련키 위해 동분서주했다.

둔전도 개간하고, 칡도 캤다. 1593년 9월 8일 새벽에는 군관 송희립 등을 당포산으로 보내 사슴을 잡아오게 했다. 꿩고기도 잘 갈무리해서 병자들의 죽에 넣었다. 사슴과 멧돼지 뼈는 화살촉에, 꿩꼬리 깃은 화살에 썼다. 전쟁이 뜸한 시기엔 전복과 미역을 따고, 청어도 잡았다.

1596년 3월 8일은 명절인 한식날이자, 이순신의 생일이었다. 안골포 만호와 가리포 첨사가 큰 사슴 1마리씩 보내왔다. 모처럼 생일날에 부하 장수들과 평안히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 명나라 장수에게 선물로 준 사슴 가죽 두 장

1597년 10월 명랑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신안군 팔금도 등을 거쳐 목포 유달산 아래 보화도(지금의 고하도)에 진을 쳤다.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가기 전까지 107일 동안 머물렀다. 11월 1일 이순신은 떠내려 온 사슴 가죽 2장을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줬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겨울을 났다. 군량미를 확보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일본군과의 다음 전투를 대비했다.

1598년 7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합류했다. 이순신은 멀리까지 나가 진린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사슴과 멧돼지 등을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진린은 이순신의 배려에 감동했다.

곧이어 고흥 거금도 해역에서 한·중 연합 수군 최초로 절이도 해전이 개시됐다. 이순신은 전공까지 진린에게 돌렸다. 이순신과 사슴의 인연은 임진왜란을 종식한 노량해전까지 이어졌다.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鹿児島)은 ‘사슴 섬’이란 뜻.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야쿠시마(屋久島) 등 인근 섬에 사슴이 많이 살았다.

야쿠시마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이다. 울릉도의 7배 정도 되는 면적에 해발 1936m나 되는 높은 산, 1만 3000여 명의 인구, 3만여 마리의 사슴과 원숭이가 산다. 일본의 마지막 남은 낙원으로 꼽힌다.

막부 시절 가고시마 일대 사쓰마 번의 영주는 시마즈 가문이다. 시마즈 가는 우리나라와는 악연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와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했다. 남원성 전투에도 참가했다. 이들은 숱한 문화재와 도자기를 훔쳐 가고, 도공들까지 납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호랑이 2마리를 잡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했다. 전과를 부풀리기 위해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갈 정도로 가장 악랄했다. 1609년 류큐 왕국(오키나와)을 복속하고, 통치하기도 했다.

이 사슴 동네 시마즈 무리들을 섬멸한 게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었다.
사슴으로 얽힌 이순신과 녹도만호 이대원, 정운, 송여종 장군. 그리고 사슴 섬 ‘가고시마’를 지배한 시마즈 가문. 참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희한한 인연이 아닌가 싶다.

■ 우리나라에는 어떤 종류의 사슴이 살았을까?

보통 사슴이라면 요즘 로드 킬을 당하거나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고라니를 떠올린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대록’(大鹿)이라고 기록한 순록 류와 단순하게 ‘록·鹿’이라고 쓴 꽃사슴 류가 있다. 대록(大鹿)은 이름 그대로 보통 사슴 보다 덩치가 크다. 록(鹿)으로 불린 사슴은 동아시아에 서식한 꽃사슴 ‘매화록’의 아종이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애지중지 키우던 꽃사슴을 왕이 되자, 활로 쏘아 죽이기도 했다. ‘장·獐’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노루, 고라니를 뜻한다. 이러한 사슴 무리들은 조선시대 군사훈련 ‘강무’의 일환으로 실시한 대규모 사냥에서 한 번에 100마리씩 잡히는 흔한 동물이었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를 보면, 말 탄 무사가 쫓는 두 마리 사슴이 나온다. 이 큰 뿔 달린 사슴 한 쌍이 백두산사슴(Cervus canadensis xanthopygus)으로 일컫는 대록 암수 한 쌍이다. 조선에도 ‘루돌프 사슴’ 즉 순록이 살았던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정확히 따지면 이렇다. 백두산사슴은 흔히 ‘엘크(Elk)’라고 불리는 와피티(Wapiti) 사슴의 아종이다. 같은 사슴과 중에서 순록이 속한 순록 속(Rangifer)이 아닌 사슴 속(Cervus)에 속하지만 순록과 체형이 비슷하다.

중국에서는 말처럼 큰 대형 사슴이라고 해서 ‘마록’(馬鹿)으로 불렀다.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B. 비숍의 조선 기행문에도 한강 유역, 특히 그 북쪽 지류에서 3~4종의 사슴이 발견됐다고 적었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다. 그녀는 금강산도 구경하고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을 남겼다.

■ 조선에도 루돌프 사슴 ‘대록·大鹿’이 있었다

조선 초기 대록을 잡은 곳이나 진상한 곳을 살펴보면, 대부분 함경도나 평안도 등 북부 지방 위주였다. 때로는 전라도 등 한반도 곳곳에서 적지 않은 대록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대록 사슴으로 만든 육포나 가죽은 중국과 조공 무역품으로 쓰기도 하고,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선물로 쓰였다.

그러나 점차 농업 경제가 발전하면서 농경지가 확대됐다. 농지 개간은 소의 급증을 불러왔지만, 반대로 사슴과 호랑이에게는 영역이 줄어드는 일이었다. 16세기 중종 무렵이 되면 백두산사슴의 서식지는 만주를 접하고 있는 삼수갑산(三水甲山)과 개마고원 정도로 줄어든다. 그리고 대록을 진상하기 어렵다는 지방 수령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진상품을 면제하거나 줄여 나간다.

‘록’(鹿)으로 불린 사슴의 사정도 비슷했다. 조선 후반 화전이 점점 늘어가면서 산림이 파괴되자, 조금씩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7세기 소빙기를 맞이하면서 전국을 휩쓴 동물 전염병이 연달아 터졌다. 경작지를 확대해나간 인간에게, 자연은 호환이나 전염병으로 역습했다. 지금의 구제역과 같은 ‘우역’의 창궐로 엄청난 수의 개체가 폐사했다.

17세기~18세기에는 국가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여러 섬 등에 국영 사슴 목장을 운영했다. 그럼에도 대록과 꽃사슴은 끝내 개체 수를 회복하지 못했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를 거친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영영 사라졌다.

1938년, 노천명은 입시 지옥을 뚫으려면 반드시 외워야 하는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친일파 시인으로 일본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하기 몇 년 전이다. 바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사슴’이다. 모가지가 긴 사슴은 현재 우리 산하에서 볼 수 없다. 몇몇 동물원이나 사슴목장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을 뿐이다.

1979년 10월 26일, 10·26 사태가 일어나던 날.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이동했다. 이때 온양 도고호텔에서 키우던 사슴이 헬기 굉음에 놀라 뛰다가 뇌진탕으로 즉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날 예기치 못한 사슴의 죽음과 박 대통령의 서거는 두고두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에 꽃사슴을 방사했다. 5년 뒤 꽃사슴은 26마리로 늘어났다.

2013년 3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MB의 꽃사슴 26마리는 서울대공원으로 갔다. 대공원 측은 이 사슴을 다시 경기도에 있는 민간 농장에 팔았다. 그 뒤로 MB 사슴의 행방은 모른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저서 <대통령>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눈이 사슴처럼 맑다고 평했다.

■ ‘축록자 불고토’ 사슴을 쫓을 것인가? 토끼를 잡을 것인가?

날이 추워지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보약이다. 보약 중의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녹용(鹿茸)이다. 단단한 머리 위로 솟아오른 녹용은 강력한 생명력의 에너지를 상징한다.

빨간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의 단짝 루돌프는 코카콜라 광고가 창조한 허상에 불과하다. 아이들 치아와 다이어트의 적일뿐. 더구나 순록과 노루 뿔은 녹용도 아니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사슴은 길한 짐승을 상징한다. 특히 한라산 백록담에 산다는 백록(白鹿)처럼, 흰 동물 중에 흰 사슴 ‘백록’은 신선이 타는 동물로 여겼다. 삼국시대에도 흰 사슴을 잡아 왕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많다. 조선 세조 8년 때도 흰 사슴이 나타났다.

상상의 동물인 용은 흔히 사슴뿔을 달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슴뿔은 봄에 돋아나 자랐다가 이듬해 봄에 떨어진다. 그리고 새 뿔이 돋는다. 이러한 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슴뿐이다. 사슴은 땅의 이치와 원리를 갖춘 동물로 간주됐다.

사슴뿔은 나뭇가지 형태로 자란다. 그래서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매개체이자 장수와 왕권을 상징했다. 이런 이유로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장생도(長生圖)의 소재로 즐겨 그렸다. 신라 금관의 형태 또한 사슴뿔과 유사하게 만들어 진것으로 잘 알려졌다.

사슴을 뜻하는 한자 록(鹿)은 권좌에 비유되는 ‘록’(祿)과 발음이 같다. 관리들에게 주는 돈이나 곡식 등을 ‘녹봉’(祿俸)이라 한다. ‘관록이 쌓였다’는 말처럼 ‘록’은 벼슬이나 권세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옛말에도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곧 큰일을 꿈꾸는 자는 작은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 사슴을 쫓는다는 ‘축록’(逐鹿)이라는 말은 천하를 놓고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겨루고 쫓는다는 뜻의 ‘각축’(角逐)도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 자, 사슴을 쫓을 것인가? 토끼를 잡을 것인가?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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