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야지둥그러죽은골’. 골짜기가 너무 험해 돼지가 굴러서 죽은 골짜기라는 뜻.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긴 9글자 지명이다. 대전 유성구 학하동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는 아직까지 불명이다.

돼지와 관련된 지명은 전국에 2천개 정도로 추산된다. 돼지를 많이 길렀던 제주도에 많다. 충북 청주시 서문동 등 전국 82곳에 산재한 ‘돼지골’이 가장 흔하다. 다음으로는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등 58곳에 있는 ‘돼지바우’라고 한다.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 2019년 황금돼지해 맞이 소망탑이 설치됐다. 돼지는 과거 농경사회에서 집단의 생존과 결부되는 다산의 상징이었다. 다산은 노동력과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뜻했다. 하지만 ‘황금 돼지 해’를 맞이하는 내년에도 저출산 기조가 이어질 전망이다. 출산율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정부의 바람과 다른 양상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독특한 연월일시 표기법을 가졌다. 하늘의 이치를 담은 천간(天干)과 땅의 이치를 담은 지지(地支)를 조합한 것. 12지 중 자(子)는 쥐, 축(丑)은 소, 인(寅)은 호랑이, 묘(卯)는 토끼, 진(辰)은 용, 사(巳)는 뱀, 오(午)는 말, 미(未)는 양, 신(申)은 원숭이, 유(酉)는 닭, 술(戌)은 개, 해(亥)는 돼지를 의미한다.

10간(干)과 12지(支)를 하나씩 조합해 만드는 간지는 60년을 주기로 한 번씩 돌아온다. 천간을 오행의 색상으로 표현하면 갑(甲)과 을(乙)은 파랑, 병(丙)과 정(丁)은 빨강, 무(戊)와 기(己)는 노랑, 경(庚)과 신(申)은 백색, 임(壬)과 계(癸)는 검은색을 나타낸다.

이를 조합하면 2007년 정해년(丁亥)으로 붉은 돼지, 2019년 기해년(己亥年)은 황금돼지 해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나라마다 12지 동물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 태국·베트남·네팔은 토끼 대신 고양이, 네팔과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은 각각 용 대신 독수리와 물고기를 사용한다. 인도는 호랑이와 닭 대신 사자와 공작을 넣었다. 태국에서는 돼지 대신 코끼리 등 각각의 국가에 많이 서식하거나, 친근한 동물로 대체했다.

■ 황금돼지해 돼지꿈 꾸면 대박?

12지 동물 중에 용이 권력의 화신이라면, 돼지는 재력을 상징한다. 로또는 인생역전의 아이콘이다. 당첨 되려면 돼지꿈을 꾸던지, 조상님이 돌봐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돼지꿈을 꾸면 돈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돼지 돈(豚)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金)과 같기 때문.

비슷한 예로 사슴 록(鹿)은 관록과 월급을 뜻하는 ‘록’(祿)과 비유했다. 옛날에는 참새의 작(雀)과 벼슬 작(爵)이 음이 같다 해서 참새가 들어간 군작도(群雀圖)가 좋은 선물이 됐다.

돼지를 일컫는 한자로 집돼지 돈(豚), 수퇘지 시(豕), 멧돼지를 뜻하는 저(猪)가 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저팔계(猪八戒)는 저돌적인 멧돼지의 화신이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불쑥 돌진한다는 저돌적(猪突)이라는 말과 돼지고기 ‘저육볶음’이 여기서 나왔다. 제육은 저육이 변한 말이다. 우리말로 ‘돼지고기볶음’으로 불려야 맞다.

윷놀이 도, 개, 걸, 윷, 모(돼지, 개, 양, 소, 말)에서 ‘도’는 바로 돼지다. 고어에 어미 돼지를 ‘돝’, 새끼를 ‘도야지’나 ‘돼지’라고 했다. 돼지로 통일되고 오히려 ‘도야지’가 방언이 됐다.

13세기에 발간된 <향약구급방>에서는 ‘도토리’를 ‘돝의 밤’(猪矣栗)으로 적었다. ‘도토리’라는 우리말이 ‘돝알이’, 즉 산에 사는 멧돼지가 즐겨 먹는 열매라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깊은 숲속에서 살았던 게르만족이 이런 식으로 돼지를 방목했다.

고대 게르만족이 살던 중부 유럽에는 돼지 토템이 널려 퍼져 있었다. 단군신화에 따라 우리가 곰의 후손인 것처럼, 게르만은 멧돼지의 자손이다. 유럽에서는 돼지가 행운을 불러온다고 여긴다. 새해에 돼지고기를 먹는 풍속도 여기에서 생겼다.

설날에 우리가 떡국, 중국은 만두를 먹는 것처럼 양력 새해 첫날 유럽에서는 대부분 돼지고기를 먹는다. 독일은 ‘슈바인학세’라는 독일식 돼지 족발 요리를 먹는다.

오스트리아나 스웨덴에서는 햄과 소시지 요리로 새해를 맞는다. 이탈리아도 ‘잠포네’라는 돼지 족발과 ‘코테키노’라는 돼지 껍질 등이 들어간 소시지로 한 해를 시작한다. 소금에 절여 건조한 돼지 다리 햄인 ‘하몽’은 스페인의 대표 요리다.

■ 불국사 극락전 돼지상은 왜 만들었을까?

경주 불국사에는 돼지 한 마리가 숨어있다. 극락전 처마 밑에 나무로 다듬어진 황금빛 돼지상이다. 사람들은 이 돼지를 복을 가져다주는 ‘황금돼지’ 또는 ‘복돼지’라 부른다. 이 돼지에 기원해 로또에 당첨된 사람도 있을 정도다.

2007년 관람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알려졌다. 극락전은 국보 27호인 금동 아미타 여래 좌상이 있는 곳.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국사가 전소되었을 때 이 극락전도 함께 불탔다. 중건된 것은 조선 영조 때인 1750년. 그러니까 257년 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보통 사찰의 외벽 공포에는 주작이나 용의 형상으로 장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이하게 공포를 장식한 예는 많지 않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 천불보전 거북이 등 위에 토끼가 앉아 있는 ‘토끼와 거북상’이 있다.

그리고 법주사 팔상전과 강화도 전등사에 벌거벗은 여인으로 알려진 원숭이 모양의 나찰상이 유명하다. 그렇지만 돼지 형상으로 공포를 장식한 것이 발견된 적은 아직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극락전 처마 밑에 돼지를 숨겼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은 토함산에 자주 사냥을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곰을 사냥한 밤, 꿈에 그 곰이 나타났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았는데, 너는 왜 나를 죽였냐?”고 항의했다. 김대성은 불국사를 창건하면서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돼지 형상을 넣었다.

또 하나는 이 사찰을 중수하던 장난기 많은 스님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내림마루나 추녀마루 밑에 용이나 봉황을 만들어 넣는 대신 몰래 이 돼지상을 숨겼다는 것. 그러나 동물 중에서 돼지는 불교와는 그다지 연결고리가 없다.

■ 불국사 극락전 돼지상은 저팔계도 아닌데

이 멧돼지 형상에 대해 ‘토함산 솔이파리’라는 블로그를 운영 중인 ‘솔뫼’님은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사찰 내 잡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수호신장으로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를 본뜬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불국사 등 문화재 관련 전문가인 ‘솔뫼’님의 견해는 이렇다. 궁궐이나 일부 사찰의 지붕 내림 마루에 잡상이 있는 경우가 있다. 밀양 표충사의 대광전, 흥국사의 대웅전과 만월보전 등이다. 하지만 잡상에 나오는 저팔계는 독립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삼장법사나 손오공 등 <서유기>에 나오는 여러 동물들이 함께 놓여있기 때문에 불국사 극락전 돼지상과는 구별된다.

청도군 각남면 대산사는 지대석에 돼지상을 새겼다. 창원 불모산의 성주사 계단 위에도 두 마리 돼지 석상을 세웠다. 이들 사찰은 풍수지리적으로 제비가 알을 품는 연소형국(燕巢形局)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절 앞산은 제비를 노리는 뱀의 머리와 흡사하다. 실제로 과거에 뱀이 많았다고 한다. 멧돼지는 뱀을 잡아먹는 천적이다. 그래서 뱀이 두려워하는 돼지 석상을 만들어 비보책(裨補策)으로 세웠다. 불국사 극락전의 돼지상 또한 뱀에 대한 비보 대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뱀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무서운 독사도 잘 잡아먹는 멧돼지(豕)를 길들여 사람이 사는 집(宀)에서 길렀다. 돼지를 기르는 곳이 바로 한자 ‘집 가(宀+豕=家)’ 자가 만들어진 원리다. 멧돼지는 거친 털과 가죽, 더구나 두꺼운 비계 때문에 독사에게 잘 물리지 않는다. 뱀이 물었다 해도 쉽게 독이 중화되어 버린다.

■ 고구려 수도를 옮기게 하고, 왕위를 잇게 한 돼지

우리민족은 적어도 2000년 전부터 돼지를 사육했다. 고조선 읍루인은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와 햇볕에 타는 것을 막았다. 돼지기름이 보온은 물론 일종의 자외선 차단제 역할을 했다.

고구려 시절부터 돼지는 주로 하늘에 바치는 희생물로 쓰였다. 고구려는 돼지 때문에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평소 사냥을 좋아했다. 재위 중 줄기차게 한나라, 선비, 부여와 대립했다. 고구려의 시조 ‘황조가’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유리왕 때에 이르러 국내성으로 옮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전한다. 서기 2년 (유리왕21) 때 일이다. 제사에 쓸 돼지를 쫓아서 국내성 부근에 갔다가 우연히 옥토를 본 신하의 건의로 마침내 옮기게 됐다. 그곳엔 돼지 말고도 고라니와 사슴,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돼지와의 좋은 인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또 고구려 시대 돼지는 왕위를 잇게 했다. 고구려 14대 산상왕은 자식이 없어 하늘에 빌었다. 재상 을파소도 걱정했다.

서기 208년(산상왕12) 11월,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한마을에 이르러 20세 정도 되는 아름다운 여인이 앞장서서 잡았다. 기이하게 여긴 왕은 밤에 그 여자의 집으로 가서 관계를 가졌는데, 이듬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왕자가 훗날, 고구려 15대 동천왕이다.

■ 고려 수도를 개성을 점지해 준 돼지

고려의 수도인 개성도 돼지가 정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은 곤경에 처한 서해 용왕을 도와주고 용왕 딸과 결혼했다. 작제건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돼지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일 년 동안이나 우리 속으로 들어가지 않던 돼지는 지금의 개성인 송악산 남쪽 기슭에 이르더니 드러누웠다. 작제건이 그곳에 새집을 짓고 손자를 낳았는데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다.

고구려에서 유리왕이 돼지로 말미암아 수도를 옮겼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다. 경기도 남양주 축령산에도 한 야사가 남아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에 사냥을 왔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한 몰이꾼의 말이 이 산은 신령스러워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산신에게 제를 지낸 후 비로소 멧돼지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때부터 고사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祝靈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알려진 태국과 미얀마 국경의 소수 부족 라후족(拉祜族)은 우리처럼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린다고 알려졌다.

■ 조선시대 주로 제사에 쓰인 돼지

조선 시대에는 돼지고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돼지고기 기피는 명나라에서도 알 정도였다. 1417년(태종17) 윤5월 8일 조에는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조선 사신에게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라” 지시했다고 적었다.

조선시대 돼지는 주로 제사에 사용했다. ‘보사제’(報祀祭)는 하늘에 감사드리던 제사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만약 비가 오면, 3일 안에 수퇘지를 잡아 천신(天神)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1418년(태종18) 8월 1일 실록에는 보사제를 지내는데 돼지가 살찌지 않아, 하늘을 섬기는 뜻이 없다고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1438년(세종20) 7월 21일에는 국가에서 사육하는 돼지가 충분치 못하니, 전국적으로 나눠 기르자는 논의를 했다. 그 무렵 따로 기르는 돼지 100마리, 왕실 직영의 돼지 150마리를 합해 도합 250마리가 있었다.

연산군은 궁궐에서 제사용 돼지를 활로 쏘는 기행을 저질렀다. 화살에 맞고, 죽지 않은 돼지 2마리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홍문관 책방에 나타나 신하들이 기겁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아마 자신이 키우던 사냥개에게 물려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시치미를 딱 떼었다.

19세기부터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해진다. 순조는 궁궐에서 ‘맛집 냉면’을 배달해 먹기도 했다. 야식으로 평양냉면을 ‘테이크아웃’할 때 돼지고기 수육도 등장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서경잡절>에도 “냉면과 돼지수육 값이 올라간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돼지고기가 흔해지고 저잣거리로 나온 것이다.

■ 멧돼지는 산에서 나는 고래라서 어류?

옛날 일본에서는 돼지를 ‘산고래’라고 불렀다. 에도 막부 시절까지만 해도 고기는 생선이나 가금류 정도였다. 보통 생선을 먹었고, 잘 사는 집은 가금류, 상류층은 고래 기름을 등불로 쓰고 고래 고기를 즐겼다. 일본 소는 품종이 열등해 육우나 농사용으로 둘 다 적합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칡소를 가져가 교배시켜 현대의 일본소를 키워 낼 정도였다.

또 불교식 습성 때문에 붉은 육류를 먹는 걸 금기시했다. 유명한 ‘개 덕후’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아예 ‘불살법’을 선포하기도 했다. 소, 돼지는 ‘약 고기’라고 해서 병자들이 몸을 추스르기 위해 약용으로 먹는 수준이었다. 그걸 ‘야마쿠지-산고래 고기’(山鯨, やまくじら)라고 부른 것. 바다에 사는 동물은 먹어도 된다고 여겼다.

멧돼지는 산에서 나는 고래, 오리는 발에 물갈퀴가 있어 물에서 사는 물고기, 토끼는 일본어로 ‘우사기’라고 하는데 가마우지와 백로의 합성어다. <가마우지 우(鵜:)+사기(鷺: 백로> 그러므로 조류 ‘새’이지, 포유류로 간주하지 않았다. 특이하게 닭은 신의 사자로 여겨서 잘 먹지 않았다.

그런 꼼수(?)를 부려서 마음의 불편함을 덜었다. 그러다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이 된 후, 해외에 유학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고기 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육류에 익숙지 않았다. 스테이크 같은 거보다는 카레나 고기 감자조림, 전골의 방법으로 수분이 많고 야채를 많이 섞어먹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장수 지역으로 소문난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돼지고기 섭취량이 가장 많다. 오키나와가 본격적으로 다량의 돼지를 사육한 것은 류큐국으로 불리던 독립 국가 시절, 중국 사신단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 ‘일본판 보신탕’ 고래고기

세계적으로 고래를 고기로 먹는 곳은 많지 않다. 한국인들의 본격적 고래고기 섭취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다. 일본이 값싼 단백질 공급원으로 장려했기 때문이다. 고래 고기는 ‘일본판 보신탕’ 논쟁과 같은 이치다.

러시아와 남아메리카에서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나 양고기보다 더 비싸다. 러시아의 경우, 겨울이면 돼지고기 가격이 폭등한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기름진 음식을 섭취하는 전통이 있는 데다가, 소에 비해서 추위를 잘 타는 돼지는 러시아에서 기르기 힘들다는 이유가 겹쳐서다.

남아메리카에서도 소고기보다 돼지고기가 더 비싸다. 엄밀히 말하면, 돼지고기가 비싸서라기보다는 소고기가 싼 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들어 ‘백돼지’ 계열의 돈종들이 수입되자 토종 흑돼지는 급격하게 사라졌다. 덩치도 크고 빨리 자라며 새끼도 많이 낳아주는 백돼지에게 흑돼지는 경쟁 상대가 안 됐다.

요즘 우리가 보는 흑돼지는 순수한 토종이 아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버크셔 계통과 교잡종이다. 토종 흑돼지는 더디 자라고 몸집도 작았다. 주로 중국에서 가져다가 사육해 ‘당저’(唐猪)라고 불렀다. 지금도 동남아 지역의 토종흑돼지는 체구가 작다.

조선 시대 토종 흑돼지는 개량되지 않아 작았다. 이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때도 이미 수퇘지는 거세를 했다. 요즘의 거세 이유와 같다. 거세 방법은 중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이 요동에 가서 배워왔다. 세종의 지시였다. 그 시절 통역관은 졸지에 중국 양돈장에 가서 돼지 불알 까는 법까지 배워야 했다.

■ 무슬림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한국인의 대표적인 외식 메뉴는 삼겹살에 쌈이다. 상추와 깻잎은 쌈 채소의 양대 천왕이다. 국산 상추는 고려 시대부터 유명했다.

중국에서는 “고려의 상추는 질이 매우 좋아서, 고려 사신이 가져온 상추 씨앗은 천금을 주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하여 ‘천만채’(天萬菜) 라고 했다. 오래전부터 깻잎은 상추에게 지존 자리에서 밀렸다.

세계에서 돼지가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이다. 전 세계 사육 두수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돼지를 이용한 중국 요리는 100여 가지나 된다. ‘육(肉)’은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을 가리킨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수도 카불 동물원에서 단 한 마리 돼지만 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대부분은 돼지를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흔한 돼지를 동물원에서 애지중지하는 이유는 무얼까? 아프간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건조한 산악지방은 돼지가 살만한 조건이 못된다.

성경은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하는 동물을 성(聖)하다 하고, 돼지는 새김질을 하지 않아 속(俗)한, 부정한 동물로 규정했다. 코란에서도 금기시한다. 무슬림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보통 유목민으로 살아야 했던 무슬림에게 돼지처럼 다리가 짧고 느린 동물은 효율적이지 못한 가축이었다. 돼지는 낙타나 양처럼 젖과 가죽, 털 모두를 사용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중동의 기후와 유목 생활에 적합하지 않았다.

보통 풀을 먹는 양과 같은 다른 가축과는 달리 돼지는 사람과 비슷한 음식을 먹는다. 때문에 유목민으로 살기 위해 항상 식량을 비축해야 했던 무슬림에게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는 인간으로 전락한 돼지가 나온다. 평등한 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소수의 욕심을 채우는 독재집단으로 변하게 되는지 동물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동물농장>에서는 정의나 평등 같은 가치들을 핑계 삼아,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소수의 악질들이 판친다. 같은 조지 오웰의 <1984년> 소설 속 빅 브라더는 진실과 역사를 왜곡하고 통제한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이 보인다는 의미다. 요즘 뉴스에는 돼지 멱따는 소리만 천지에서 진동한다. <동물농장>과 <1984년>이 자꾸 오버 랩 된다. 국민을 개·돼지를 보면 안 된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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