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과 이제 작별해야 한다. ‘작별’은 슬프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작별이라는 낱말은 아쉬운 여운을 남긴다. 2018년, 달력, 시간... 이것들은 인간이 자연에 부여한 인위적인 분류 체계일 터이다. 2019년 1월 1일이나 2018년 12월 31일이나 현재라는 순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별스러울 것이 없다. 무의미의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무의미에 의미를 새겨 넣는 것이 삶일 게다. 해서 한 해의 끝에서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서글픈 사람도 있고 추운 겨울이 지나 어서 봄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올 한 해가 힘들었던 사람들은 빨리 작별하고 싶으리라.

우리는 항상 작별해야 한다. 매 순간이 실은 작별의 순간이다. 매순간이 나와의 결별, 나의 변용의 순간이며, 나와 관계하는 타자와의 변용의 기록들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변용(affection)이라는 개념은 재미있다. 스피노자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실체(신=자연)가 여러 가지 양태, 가령 철수, 영희, 개, 사슴, 꽃, 나비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변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이때 변용은 양태를 뜻한다. 

또 외부 물체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변용이다. 내가 타자를 통해 변용되거나 나로 인해 타자가 변용되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변용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다. 내가 밥을 먹으면 내 신체는 변용되며, 아름다운 너를 만나면 나는 즉시 변용된다. 책을 읽으면 나의 정신은 변용되고, 대화를 나누면 변용된다. 이 겨울, 내리는 눈을 맞으면 나의 신체와 관념은 삐끗하고 변한다. 그 삐끗하는 지점이 어디로 향할까에 따라서 헤어진 옛사랑을 추억하기도 하고, 미끄러져 넘어졌다면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당신을 만나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당신 또한 이렇게 저렇게 흔적을 남기며 산다.

나는 절대 변화지 않을 거야,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지만 변해버린 그를 원망할 수도 없다. 변화를 겪는 것, 그것이 개체의 삶의 존재론적 조건일 테니 말이다. 해서 지금 당신 곁의 그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더라도 그 말 믿지 마시라. 변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변하는 나와 당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시라.

니체는 후기작 <안티크리스트>에서 믿는다는 것의 품위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니체는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이며 확신은 ‘감옥’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확신은 변하지 않으려는 결단이 아닐까 싶다. 혹은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선택이 아닐까? 고집이 아닐까?

확신에 찬 사람을 가끔 만난다.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한 사람은 뭐라 말 할 수 없겠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도 종교인 못지않게 확신에 찬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 아는 친구는 항상 자기가 옳다. 이 친구를 a라고 하자. 함께 식당에 가면, 자신이 선택한 곳에는 찬사를 아까지 않는다. 영화를 보러가더라도 자신의 선택에는 별 5개를 주고도 아쉬워한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말할 때도 자기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결론 없는 공방을 고집한다. 누가 멈추자고 제안하면 화를 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제안한 것에 대한 평가는 민망할 정도로 혹평을 한다. 거 봐. 내가 보자는 영화 봤으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등등. 이 정도는 괜찮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나쁜 것’, 혹은 ‘함량 미달인 것’이 된다. ‘나의 취향과 맞지 않아.’ 혹은 ‘나는 그런 계열은 좋아하지 않아.’가 아니고 그것은 형편없는 잡동사니거나 잘난 체거나, 부족한 것으로 평가한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물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나쁜 것으로, 질 낮은 것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문제다. 한 술 더 떠 그런 자신의 판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발설한다. 발설하는 것도 좋다. 발설하고 나서 동의하지 않는다고 성을 낸다. 자기 말에 동의해 달라고 무언의 표정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아무도 동의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자리를 뜬다. 

종종 나를 돌아본다. 나는 잘 모르는 것을 잘 안다고 확신하지는 않나?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일까? 그것에 대해 검토하고 고민했나? 그것과 관련해서 책을 읽어보았는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보았는가? 어떤 식으로든 귀납을 거쳤는가? 거개의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 그냥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득하고 설득당할 유연성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믿는 것은 참이고 진리이며 네가 말하는 것은 수준 낮은 잡담이고 가치가 떨어지는 거야, 라는 터무니없는 확신은 역설적으로 발화자의 무지 혹은 품위 없음을 누설하는 힌트가 아닐까? 

이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 믿음을 공고히 하는 토대 위에서만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심리적 안전을 확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신이라는 감옥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변용을 거부한다. 거부한다고 변용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인식하려하지 않는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식을 향해 열려 있는 정직한 고통이나, 자기 내부의 균열을 참을 수가 없다

또 다른 유형이 있다. 편의상 b라고 하자. 그는 누구에게든 반대의 의사를 표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말한다. 누군가의 발언에 반대의사를 개진할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반대하고 보자! 반대하고 나면 에너지를 느낀다. 그것이 그의 살아있음을 확인시키는 힘이 라도 된다는 듯이. 내적으로 공허한 탓일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이 있다. 내가 여기 포함된다. c라고 하자. 나는 타인의 의사를 너무 존중하려는 태도가 문제다. 뭐든 단호하지 못하다. 그럴 수도 있고, 네 말도 맞고, 그래. 그의 말도 맞고, 그래 너희 말도 맞고...맞고맞고맞아. 나는 자주 그렇게 말한다. 맞아맞아맞아...아! 나 왜 이러지? 이거 사실이 아닌데. 왜 나를 내가 속이지? 그러다가 생각했다. 나만 옳고 넌 틀려! 보다는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 옳아. 옳아옳아옳아. 그런데 모두 다 옳을 수 있을까? 그럼그럼 다 옳을 수도 있고 다 틀릴 수도 있지. 허나 ‘나만 맞고 넌 틀렸어’ 보다는 낫잖아. 그래 이렇게 밀고 나가는 거야. 나도 맞고 너도 맞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뭐야? 너무 유약하고 비굴하고 우유부단하잖아. 그래도 나는 ‘당신은 틀렸어!’ 라고 말하진 않잖아. a나 b보다는 낫지! 아차 ! 그렇다면 친구 a와 친구b에 대해서도 맞아맞아맞아 라고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 내가 속한 유형, c가 가장 좋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결국 나도 내가 속한 ‘c가 최고야’ 라고 말하는 거잖아. 아니지. ‘c가 정답이야’가 아니라, ‘c가 좀 더 나은 가치야’, 라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판단은 어디서 나왔는데? 네가 속한 c유형의 가장 낫다고?  잘 모르겠다. c유형에 대해서도, 즉 나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물론 절대적 진리나 보편적 정답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다보면 그것은 어김없이 독단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유형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c유형을 다시 생각해 본다. 소망스럽지 않다. 나는 a와 b에게 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믿음은 감옥 이라고. 정답은 없으나 가치의 위계는 있으니, 니체 식으로 말하면 망치를 들고,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그와 나의 관계의 몰락을 가져오더라도. 그것이 어려운 과제이더라도, 그 속에서 서로 변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멈춘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파국을 감당하기 싫기 때문이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 전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확신은 감옥이다. 이것은 충분히 넓게 보지 않고, 발 아래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 말참견 할 수 있으려면, 오백 가지 확신들을 자신의 발 아래로 굽어보아야만 한다. -자신의 뒤에 있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위대한 것을 원하고,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다. 온갖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롭게 볼 –수-있는 강한 힘에 속한다.” -<안티크리스트> 중에서 

니체는 “믿는 자는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모든 종류의 믿음은 그 자체로 탈아(Entselbstung)의 한 표현이고, 자기 소외의 한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 존재는 수시로 변용을 거치는 존재다. 말하자면 자기 안에 타자들로 매순간 우글거리는 존재다. 때문에 ‘믿는 자’는,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으며 자기 소외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성 속에 있지 않을까? 자기 내부의 균열을 경험하고자하는 용기 속에, ‘건강할 용기’ 속에. 넘치는 건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당할 힘 속에. 

내일은 새해다. 새해가 바쁘게, 명랑하게,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다. 기해년 한해 건강할 용기와 확신의 밖에 머무르는 결단을 시작하자. 결단의 순간 에너지가, 힘 의지들이 즉각 생성된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천경의 니체 읽기>는 매월 첫째주, 셋째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 1월 1일 화요일 칼럼을 12월 31일 월요일에 게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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