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원짜리 동전 뒷면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지? 새 한 마리가 난다. 바로 학(鶴)으로도 불리는 두루미다. 두루미는 전 세계에 15종이 존재한다. 키가 1.5m에 이른다. 몸무게는 10㎏ 정도로 매우 큰 새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두루미, 재두루미, 혹두루미가 월동한다. 겨울철 시베리아 아무르 강 유역의 혹한을 피해 남하한다.

황새와 백로는 종종 두루미로 오인받는다. 두루미는 귀한 겨울 나그네다. 실제 야생에서 관찰할 기회는 드물다. 두루미는 목이 검은색이고, 나무에 앉을 수 없다. 황새는 목이 흰색이고, 나무에 둥지를 튼다. 외견상 두루미는 왜가리나 백로보다 확연히 크다. 붉은 머리가 황새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따오기는 홍학(紅鶴). 흔한 겨울 철새였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졌다. 검은 먹황새와 흑두루미, 검은 비둘기도 있다.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호주에 검은 백조(흑고니)가 있는 것처럼, 상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 영어로 크레인(crane)이 두루미

두루미는 붉은 정수리를 가진 학이라 해서 ‘단정학(丹頂鶴)’이라 했다. 지구상에 겨우 3,000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붉은 정수리는 털로 덮여있는 것이 아니라 피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일종의 볏인데, 가장 큰 매력 포인트다. 1970~80년대는 일본에서 온 ‘쥬단학’이란 한국화장품 브랜드와 ‘쥬단학’ 아줌마가 유명했다.

두루미는 영어로는 크레인(crane). 무거운 물건을 줄에 매달아 옮기는 기중기 크레인(crane)은 두루미에서 따왔다. 독일 루프트한자, 일본항공(JAL)의 로고이기도 하다. 왕관 두루미는 우간다 국조(國鳥)이고, 국기에도 들어가 있다.

흑해에서 몽골에 걸쳐 사는 쇠재두루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를 넘어 다닌다. 평균 6000m 산을 넘기 위해 체질을 바꾸고, 죽음을 각오한다.

순우리말 두루미는 ‘뚜루뚜루’하고 우는 울음소리에서 유래했다. 동요 ‘상어 가족’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쯔루(tsuru)’라는 유사한 이름을 붙였다. 러시아어 두루미 ‘쥬라블리’는 ‘백학(白鶴)’이다. 한국 드라마 ‘모래시계’의 OST로 아주 유명한 러시아 곡이다.

옛사람들은 곧잘 ‘학은 천년, 거북은 만년’이라 하여, 두루미를 장수의 상징으로 십장생에 꼽았다. 자연 상태에서는 평균 50년, 동물원에서는 최대 86년 동안 살았다. 민간 신앙에서는 신선이 타고 날아다니는 신령한 새로 비쳤다.

학은 유토피아에 가장 가깝게 날아가는 영물로 여겼고, 그 같은 학을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자 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신선들과 벗하고 사는 동물이라 하여 두루미를 선학(仙鶴)이라 했을까.

■ 고려 시대부터 기른 애완용 두루미

지린성 고구려 사신총 천장 벽화에는 새 깃 모자를 쓰고 두루미를 탄 신선을 그렸다. 머리에 새 깃털을 꽂는 것은 새 토템을 가진 동이족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새 깃털 장식은  베링 해를 넘어간 북미 인디언과의 친연성을 따질 때도 중요한 연결고리로 꼽는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무사들은 두루미의 검은 꽁지깃으로 만든 관모를 썼다. 사마르칸트에서 발견된 벽화 속 고구려 사신 역시 환도 대도를 차고 ‘조우관’을 썼다.

서기 25년(백제 온조왕43)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백제의 관리는 기러기를 백성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한반도로 날아오는 기러기의 특성을 북쪽 옥저 등에서 투항해 오는 사람들에 비유했다.

두루미 춤은 학춤으로 불렀다. 두루미들이 날갯짓하고 부리로 쪼는 행동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학춤의 시작은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효공왕(901) 때, 학의 무리를 보면서 수행하던 승려들의 장삼 자락이 펄럭이며 움직이는 모습에서 학춤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두루미는 불교와도 인연이 깊다. 오대산 월정사 창건 신화, 오대산 적멸보궁에도 두루미를 탄 동자 그림이 있다. <삼국유사>에도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여러 성자들이 학으로 변신했다는 기록이 많다.

고려 시대 귀족이나 조선 사대부들은 두루미를 기르는 게 큰 로망이었다. 두루미를 타고 다닌 신선을 본받거나, 두루미의 기품을 닮고자 했다. 개경 만월대 동쪽 호수(東池)에서는 백학, 거위와 오리, 산양들을 길렀다.

고려 귀족들은 집에서 애완동물로 두루미를 키웠다. 1128(인종) 7월에는 두루미 수천 마리가 개경 성안과 궁궐을 돌아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7월이면 아직 두루미가 남하할 때가 아니다. 여름 철새인 백로 등을 혼동한 것 같다.

고려 상감 청자에서도 학은 사랑받는 소재여서 운학(雲鶴) 문양이 많이 쓰였다. 여러 개의 작은 원 속에 비상하는 구름과 학이 새겨져있다.

■ 조선 선비, 천년학을 꿈꾸다

조선시대에는 두루미를 더욱 귀하게 여겼다. 두루미의 고고한 기상은 선비의 이상적 성품을 상징했다. 문신을 학반(鶴班)이라 하고, 관복에 쓰이는 흉배에도 두루미를 넣었다. 두루미의 크고 의젓한 행동을 흠모한 조선시대 양반들은 연회에서 학춤을 추기도 했다.

자신의 호를 학과 연관 시킨 인물들도 대거 나타났다. 서애 류성룡과 함께 영남지역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던 학봉(鶴峰) 김성일이 대표적. 학과 선비가 하나의 상징체계로 묶여진 탓이다. 영·정조 시절에는 관청인 홍문관에서도 두루미를 길렀다. 당직을 서는 학사가 숙직할 때면 남은 음식을 먹였다. 더러는 기르던 두루미가 날아가기도 했다.

두루미를 애완동물로 삼는 선비가 늘면서 심지어 자기가 기른 ‘두루미 콘테스트’도 열었다. 요즘 애견 대회 ‘Dog Show’인 셈. 물론, 평범한 여럿 중에 뛰어난 한 사람이라는 군계일학(群鷄一鶴)는 여기서 비롯된 말은 아니다.

옛 문헌에는 실제로 두루미를 길렀다는 증거가 많이 보인다. 조선 전기 인물인 심수경(1516~1599년)의 <견한잡록>에서는 두루미가 알을 깐 일을 적었다. 심수경은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알을 낳지 못하는데 새끼를 쳤으니 기특한 일이다”고 반겼다.

성리학자인 박순(1523~1589)은 “한 쌍의 학을 키웠는데 그 처지를 가엾게 생각하여 올가을에 깃을 잘라 주지 않았더니 여섯 깃털이 모두 장대하게 자랐다. 한 번은 날아올랐는데, 곧 되돌아왔다. 내가 이에 감동하여 노래를 짓노라”라는 시를 썼다.

조선 중기 문신 윤의립(1568∼1643)은 <산가청사·山家淸事>에서 ‘학을 집 안에서 기를 때는 반드시 물과 대나무를 가까이 두고, 물고기와 벼를 주어야 한다”고 썼다. 같은 시대 우의정을 지낸 허목(1595~1682년)도 늘그막에 애완용 학을 길렀다. 그는 1669년 여름에 <미수기언>에서 아예 ‘학 기르기’란 글을 썼다.

그는 용주옹(龍洲翁)이란 별명을 가진 조경에게 학 한 마리를 선물 받아 정원에서 길렀다. 용주 조경은 인조·효종·현종의 삼조(三朝)를 모신 조정의 원로였다. “다른 학들이 떼 지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면 목을 쳐들고 우는데, 그 소리가 매우 멀리까지 들린다. 하루는 학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한참 빙빙 돌며 떠나지 않았다. 학끼리 서로 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고 적었다.

■ 매화를 부인으로, 학을 자식으로 여긴다

‘매처학자’(梅妻鶴子)는 매화를 부인으로, 학을 자식으로 여긴다는 뜻. 이처럼 자식을 기르는 지극 정성으로 학에 사랑을 쏟은 선비는 한 둘이 아니다. 16세기 명필 황기로(1521∼1567)는 구미의 낙동강 강가에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말년을 보냈다. 그가 지은 정자가 현재 경북도 기념물 제16호인 매학정(梅鶴亭)이다.

윤선거 역시 소나무를 심고 학을 길렀다. 윤선거는 충남 논산 출신인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의 부친이자 송시열, 윤후와 애증 관계였다.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은 학 키우기와 야생조류 길들이는 방법 등을 엮어 농서 겸 가정생활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썼다. 그만큼 당시에 학을 기르는 일이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 영역이었을 말해준다.

홍만선은 꿩, 물오리, 원앙 등 야생 조류의 알을 주워다 닭에게 품게 해 부화시키는 방법을 소개했다. 일종의 ‘탁란’인 셈이다. 또 “학은 오직 울음소리가 맑은 것을 최고로 치며, 긴 목에 다리가 가는 것이 좋다. 학이 병들면 뱀이나 쥐, 또는 보리를 삶아 먹인다. 학이 전복을 먹으면 죽는다”라고 적었다.

흔히 야생 조류는 새끼 때 잡아 날개깃을 잘라서 날지 못하게 하고 길들인다. 요즘도 앵무새 같은 애완조는 ‘윙컷(wing cut)’을 한다. 날개깃 3~5장의 끝부분을 잘라 바람이 타는 깃털수를 줄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홍만선은 독특한 방법을 소개했다. “새끼가 알에서 나올 때쯤 자주 들여다본다. 그러다 완전히 부화해 나온 뒤에 털에 물기가 마르기 전에 침을 발라 말리면, 자라서도 날아 도망가지 않는다”고 적었다.

침을 바른다는 게 다소 엉뚱하지만, 과학적으로 충분히 근거 있다. 생태적 특징 중 하나인 ‘각인 효과’이기 때문. 오스트리아의 생태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인공부화로 갓 태어난 새끼 오리들이 처음 본 대상을 어미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행위를 ‘각인’(imprinting)이라 부른다. 1973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

‘각인효과’는 새끼 오리에 그치지 않고, 병아리 등 다른 새의 경우에도 관찰됐다. 이는 태어난 직후의 한정된 시기에만 나타나는 성질로, 일정 시기가 지나면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영화 <아름다운 비행>에서도 이 같은 기러기 생태 이야기를 그렸다.

■ <춘향전>에도 등장하는  두루미

영조 시절 <승정원일기>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1728년 3월 당시 전라감사 권상유와 전주영장을 지내던 장붕익이 술을 마시다 말다툼이 벌어졌다. 장붕익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권상유가 애지중지 키우던 학을 발로 차서 날개를 부러뜨렸다. 화가 난 권상유는 장붕익의 인사 고과를 나쁘게 매겼다.

그래도 장붕익은 포도대장 시절 영조 연간 조직 폭력 집단인 ‘검계’와 두목 표철주를 일망타진하는데 일등 공신이 됐다. ‘검계’는 칼을 차고 다니는 무리라는 뜻. 장붕익의 벼슬은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조선시대 문학 작품에도 두루미 사육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정말 성춘향의 집에서도 두루미를 키웠을까? “전에 내가 있을 적에는 수미산 학두루미 한 쌍이 있었는데, 한 마리는 어디 가고 다만 한 마리 남은 거는….”(박동진 창본 춘향가)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일부러 거지꼴을 하고 춘향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에는 “방에는 귀고리 요란한 기생들이요, 정원에는 목청 좋게 우는 학을 키운다”는 대목이 있다.

옛 그림 속에서도 애완 두루미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초당춘수’는 낮잠을 자는 제갈량과 유비의 삼고초려 고사를 그렸다. 정선은 매화와 학을 키우며 살았던 선비들의 삶을 담아냈다. 심사정의 ‘고사은거’(1707년 ), 김홍도의 ‘취후간화’ ‘삼공불환도’(1801년)라는 그림을 통해서도 두루미가 집 안 뜰에서 애완동물처럼 길러진 것을 알 수 있다.

■ 불로 불사(不老不死)를 기원한 일본의 두루미 요리

두루미는 일본인들도 선호하는 동물이었다. 에도 막부 시기에는 정초에 쇼군 가족들이 두루미 고기로 국을 해먹었다. 전국 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대접할 때 ‘두루미 국’을 상에 올린 적이 있다. 맛보다는 특권 이미지 때문. 마치 중국의 ‘팔진미’가 맛보다 구하기 힘든 재료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두루미 국’은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상의 음식 중 하나였다. 두루미를 통해 권력자들 화합으로 하나 됨을 의미했다. 일본 특유의 짧은 시 ‘와카와 하이쿠’에서도 수많은 새들 중 가장 널리 쓰인 것이 바로 두루미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권력을 잡은 후 두루미와 고니를 먹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또한 1597년 1월 임진왜란 중 강화 회담이 오갈 때 두루미와 매를 뇌물로 받고 좋아했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거론될 즈음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정력 보강을 위해 조선 호랑이를 구해 먹기도 했다. 두루미를 먹는 풍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기원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16세기에는 아예 천황 앞에서 두루미를 요리하는 공식행사까지 열렸다. 더 나아가 일종의 상징적인 권위 의식으로 발전했다. 레시피도 다양했다. 두루미를 먹는 것은 상류사회만이 즐기는 문화적 의식으로 치부됐다.

두루미를 밀렵하다 사형 당하는 사례도 생겼다. 그럼에도 축하의 의미로 두루미를 먹고,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일은 상하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일본인들의 소망이었다.

두루미 요리는 조선통신사에게는 대접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두루미를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서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 그러다가 두루미 애완 문화가 전해지면서 몇몇 쇼군과 영주들은 애완용으로도 키웠다.

■ 천마리 종이학 접기는 일본의 두루미 문화

<실록>을 살펴보면, 일본에서 조선에 두루미를 달라고 요구한 게 여러 차례였다. 세종 때는 두루미를 포함해 여러 종류의 비둘기와 거위, 까치, 다람쥐 등을 줬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는 까치가 없었다. 인조 때는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애완동물로 기르길 원한다며 두루미와 매 등을 여러 번 얻어 갔다.

1664년(현종5)에는 한 번에 10마리의 두루미를 무역을 통해 가져갔다. 그때는 윤 5월이라 아직 두루미가 남하할 시기가 아니었다. 그 정도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은 야생 두루미 말고도 사육 개체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해로운 동물의 씨를 말린다는 일제의 해수 구제 사업은 호랑이나 표범에게만 재앙이 아니라 두루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겨울에 수천수만 마리가 떼로 날아와 살던 두루미 황새 고니 등은 이때 이미 절멸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천 마리 ‘종이학’이 무병장수와 쾌유를 상징한다. 지금도 병문안을 갈 때 종이학 천 마리를 실에 꿴 ‘센바쯔루’를 만들어 선물로 준다. 일본의 일반적인 결혼식과 피로연 의상에서부터 젓가락 자루에 이르기까지 두루미를 형상화 한 다양한 무늬가 이용된다.

굳이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연초(정월)에는 일본의 두루미 선호 문화를 잘 느낄 수 있다. 설 음식 오세치(御節) 요리나 일본의 거리 곳곳에 두루미 형상을 장식했다. 지금은 안 쓰지만, 우리도 옛 연하장에는 대개 두루미 그림이 들어갔다. 화투 1월(일광)에 두루미가 나온 게 다 그런 이유에서다.

요즘 일본에서도 두루미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그나마 우리나라를 찾던 상당수 두루미가 일본으로 가고 있다. 오카야마현 고라쿠엔에는 두루미 사육장이 있다. 천 년을 산다는 전설 때문에 고라쿠엔에서는 에도시대부터 두루미를 길렀다. 지금은 70여 마리로 늘었다. 한 달에 두 번 사육장 밖으로 나와 정원을 날아다니며 우아한 모습을 뽐낸다.

■ 분단의 아픔이 서린 철원 DMZ. 두루미로 치유받는다.

학은 천년이 되면 푸른색으로 변해 청학(靑鶴)이 된다. 다시 천년이 되면 검은색으로 변해 현학(玄鶴)이 된다는 불사조로 믿었다. ‘청학동’은 유토피아 이상향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청학동은 여러 곳 지명으로 남았다. 지리산을 비롯해 부산, 인천, 속초, 오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예전엔 울산에도 학이 많이 찾아왔다. 고려 성종은 울산을 ‘학의 고장’이라는 의미로 ‘학성(鶴城)’으로 불렀다. 지금도 학산동, 회학, 비학, 무학산 등 학과 관련된 지명과 문화유산을 남겼다. 특히 신라의 계변천신 설화에서 유래된 울산 학춤은 한국 학춤의 원류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다.

전국적으로 ‘학’이 들어간 지명은 매우 많다. 서울만 해도 ‘학’이 들어간 역명으로 방학역, 명학역, 선학역, 학정역, 학동역 등. 인천 또한 두루미 도래지여서 그런지 송학동, 청학동, 학익동, 문학동 등 학을 상징하는 지명이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해 인천시 캐릭터는 두루미에서 점박이 물범으로 교체됐다.
 
고려 중엽 무신 정권기 대전 지역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그것은 바로 1176년(명종6) 망이·망소이를 비롯한 명학소민의 봉기였다. 고려 최초의 민중 항쟁이었다. 학이 울었다는 명학소(鳴鶴所)는 당시 공주 유성현에 속했던 대전이다. 유성현 관아는 지금 유성구 상대동에 있었다. 유성 봉명동 또한 명학소에서 비롯됐다.

대전은 금강이나, 갑천 등 학이 살기 좋은 잘 발달된 넓은 습지가 존재했다. 계룡산 국립공원 ‘동학사’ 입구는 ‘학봉리’다. 학이 내려앉은 유성 학하동과 유성 온천이 유명해진 데도 두루미가 공(?)을 세웠다.

일본도 마찬가지. 우리나라와 일본의 많은 온천은 다친 황새나 학을 낫게 했다는 공통적인 전설을 갖고 있다. 아키타에는 날개를 다친 학이 뜨거운 온천물에 치료했다는 학의 온천 ‘츠루노유’(鶴の湯) 설화가 내려온다.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이병헌과 김태희가 밀월여행 온 곳이다.

■ 점차 사라지고 있는 탈북 난민 두루미

두루미는 평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현재 강화도, 철원, 연천, 파주 등 민간인 통제지역이 주요 서식지다. 철종이 강화도 도령 시절 임금으로 책봉될 무렵이다. 영의정 정원용 등 원로대신이 모시러 가자, 강화 나루에 두루미 떼가 날아들었다는 야사도 전한다. 상서로운 조짐을 두루미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철원은 국제적으로도 손꼽히는 겨울 철새 도래지다. 1990년대 중반 두루미가 갑자기 늘었다. 배고픈 철새에게 먹이주기에 힘쓴 덕분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원인은 따로 있었다. 그 무렵 북한은 연이은 흉년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북한 땅 안변에 날아든 두루미들도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휴전선을 넘은 것이다. 원산 인근 두루미 도래지는 직선거리로 8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탈북 난민 두루미’는 250마리 정도로 추산됐다. 국제 두루미 재단에서는 각종 지원을 도모했다. 북한도 안변을 두루미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2006년부터 시작된 ‘안변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고 있다.

두루미는 바람을 맞아 공중을 날아오르고 맞바람을 안고 땅에 내려앉는다. 비행기도 마찬가지. 비행기의 이·착륙은 바람의 방향에 좌우된다. 바람을 안고 이륙하고 바람을 안고 착륙해야 가장 안전하다.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린다는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이 있다. 빨리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안전한 ‘연착륙’이 더 중요하다. 두루미는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의 상징으로 충분하다.

두루미를 건강한 동북아 생태계의 상징, 평화와 우호의 전령으로 삼자고 나서면 어떠한가? 민통선 GOP를 지나 북녘 하늘을 제 집 마냥 넘나드는 두루미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갈망한다. 더 이상 ‘탈북 두루미’가 생기지 않는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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