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도에서 황새를 잡아 올려 남은 종자가 없도록 하라” 추상같은 어명이었다. 1506년 5월 23일, 연산군의 광기가 극에 달할 즈음 내린 황새 박멸령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왜 연산군은 느닷없이 황새의 씨를 말리려고 했을까?

연산군 시절에는 사랑받는 동물도 있었고, 수난 받은 동물도 많았다. 궁궐에는 수시로 사냥개와 양이 돌아다녔다. 연산군은 수십 마리의 사냥개는 물론 애완견도 따로 길렀다.

목에 방울을 단 발발이 종류였다. 고양이도 길렀다. 고양이를 놓친 내시를 매까지 때려가며 처벌하기도 했다. 발발이 견종과 고양이는 연산군보다 장녹수가 애지중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수난당한 동물은 한 둘이 아니다. 아버지 성종이 애지중지하던 사슴은 성종이 승하하자 곧바로 활로 쏘아 죽였다. 재위 내내 사슴 꼬리와 사슴 혀를 진상토록 해 별미로 먹었다.

흰 노루·흰 사슴, 흰 여우·검은 여우는 가죽으로 진상 받았다. 심지어 코끼리 발까지 명나라에서 구해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코끼리 발은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성균관 대성전에는 호랑이나 곰을 가두고 문틈으로 활을 쏘았다. 왕실 제사용 돼지는 연산군의 활쏘기 연습 대상이 됐다. 또 참새 잡는 사람을 특채해 공무원으로 임명하는 한편 한 번에 살아있는 기러기 300마리를 진상하라고 요구했다. 아마 참새는 궁궐에서 연산이 키우던 사냥매의 먹이로, 기러기는 매사냥 연습용으로 보인다.

원숭이는 연산군 연간에 일본이 두 번이나 보냈는데 받지 않았다. “구리와 쇠가 필요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무역을 모두 중지했는데 무익한 짐승을 왜 받는가?”라는 의외의 개념 발언을 남긴 적도 있다.

■ 암살자로 오인받은 황새 소탕 명령

연산군은 폭정을 저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 자신을 죽일 것이란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재위 기간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 등 두 번의 참사가 터졌다. 더욱이 생모인 폐비 윤씨가 죽은 사건과 연관된 사람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펼쳐 폭군의 대명사가 됐다.

연산은 사냥터에 드나들 때면, 숲에 사람이 숨었다가 자신을 해칠까 늘 두려워했다. 하루는 저녁때 말을 몰아 환궁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밭두둑에서 황새가 무엇을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사람인가 의심했다. 겁에 질린 연산은 말에 채찍을 쳐 급히 지나왔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바로 황새였다.

연산군이 황새를 싫어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황새가 자신을 해치려는 자객인 줄 아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황새의 ‘황’은 ‘누렇다’가 아니라 ‘크다’는 뜻. 본래 말은 ‘한새’다. ‘한’은 ‘크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황새는 ‘큰 새’라는 뜻이 된다. ‘황소’의 ‘황’도 본래는 ‘한’으로 ‘큰 소’라는 의미다.

황새는 키가 110cm 정도로 크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도 여기서 나왔다. 양쪽 날개를 펴면 길이가 2m나 된다. 저녁 무렵 멀리서 보면 마치 사람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여길 수 있다.

연산군이 황새를 모두 죽이라고 명한 뒤 4개월이 지났다. 다행히 9월 들어 이복동생인 중종을 내세운 반정 세력에 쫓겨났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황새는 아마도 연산군 연간에 이미 멸종되었을지 모른다.

■ 황새의 역모? 피해 망상증에 시달린 연산군

연산은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 전용 사냥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금표비를 세우고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비문의 내용은 ‘이 금표(禁標) 안으로 들어온 자는 모두 참수하고, 삼족을 멸하라’는 것.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를 정한 후 그 안에 있는 민가를 쓸어버리고 사냥터를 만든 것인데, 듣기에도 섬뜩하다.

처음 금표비가 설치된 1504년(연산10) 8월에는 한양 도성으로부터 반경 12∼16㎞가량. 현재의 고양시와 양주군, 서울시 일대에 불과했지만 점차 구역이 커졌다. 4차례에 걸친 확장 끝에 1506년(연산12) 2월에는 도성으로부터 반경 40㎞까지 넓어졌다. 지금의 서울 서부, 경기도 고양, 파주, 양주, 포천, 광주, 김포와 서해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이 금표를 세우면서 강제 이주 당한 백성은 무려 2만 550여 명, 금표에 들어간 농지는 5700여 결(結)에 이르렀다. 도성 인근에 사냥감이 적은 데다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면적은 점점 늘었다.

특히 장녹수와 유흥을 즐긴 일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자, 글을 쓴 사람의 거주지인 당시 고양군을 없앨 정도였다. 금표비는 연산군이 얼마나 나쁜 임금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연산군은 전용 사냥터에서 사냥할 때는 스나이퍼와 같은 ‘위장’까지 했다. 실록에서는 “왕이 사냥터에서 나무 위에 시렁을 매고 몸소 올라가, 나뭇가지로 몸을 가리고서 짐승이 지나는 것을 엿보아 쏘았다”라고 적었다.

태조나 태종, 세조가 호쾌하게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날려 사냥에 나섰던 것에 비해 연산군은 은폐, 엄폐한 다음에 저격형 사냥을 선호했다. 이런 사냥 모습만 봐도, 그의 불안하고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연산은 또 향교의 유생이나 사찰의 중들까지 모두 몰이꾼으로 채웠다. 지역별 할당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혹 부인이 남자 복장을 하고서 따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경기·충청·황해·강원 4도가 늘 어수선하고 백성이 고달파, 거의 다 흩어져 달아날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연산은 정작 사냥 다운 사냥은 몇 번 나가지도 않았다. 겁이 많아서 호랑이나 곰과 같은 맹수들은 절대 직접 사냥하지 않았다. 붙잡아온 짐승을 우리 밖에서 쏘아 죽인 정도였다. 그는 노루나 토끼, 꿩 등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짐승만 사냥했다.

 

■ 조개와 싸운 황새는 어부지리(漁父之利) 안겨줘

요즘 황새와 겨울철새인 두루미(학)를 자신 있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황새는 유전학적으로 독수리에 가깝다. 황새·왜가리·백로 등은 물고기가 주식이다. 곡류는 아예 먹지 않는다. 반면 겨울 철새인 두루미는 생물학적으로 닭에 가깝다. 황새보다 작고 잡식성이며 초원에서 지낸다. 벼, 율무, 콩, 옥수수 등 곡류가 주식이며, 물고기가 부식이다.

황새는 나무 위를 둥지로 삼는다. 나무 위에 올라가는 습성은 황새·왜가리·백로 종류다. 뒷발가락이 길어 나뭇가지를 움켜잡을 수 있기 때문. 두루미는 뒷발가락이 퇴화되어 나무에 올라가지 않고 맨땅에 둥지를 튼다. 동양화를 보면 두루미가 나무에 올라가있는 그림이 많은데 착각한 것. 두루미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는다.

어부지리(漁父之利)는 말 그대로 보면, 어부가 뜻밖의 횡재를 했다는 뜻. 하지만 유래를 살펴보면 심오한 은유가 담겼다. 중국의 전국 시대, 진나라는 주위의 나라를 제압해 천하를 얻으려고 했다. 진나라의 옆에는 연나라와 조나라가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마찰이 생겨 조나라에서 연나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그러자 연나라에서는 소대라는 사람을 보내어 조나라 혜왕을 설득하려 했다.

소대는 혜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자신이 조나라로 오는 중에 강가에 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황새가 날라와 쪼자 조개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새는 조개가 입을 벌리길 바랐고, 조개는 황새가 자길 놓아주길 원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다툼이 계속됐다.

결국은 지나가던 어부가 황새와 조개를 모두 잡았다는 것. 연나라는 조개이고, 조나라는 황새라고 할 수 있다. 둘이 싸우게 되면, 어부인 진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길 뿐이라는 것이다. 소대의 말을 들은 조나라의 혜왕은 싸움 준비를 멈추었다.

■ 뇌물을 받은 황새의 재판

조선시대에 쓴 <황새 결송>, 즉 ‘황새의 재판’이라는 고전 소설도 전한다. 뻐꾸기, 꾀꼬리, 따오기가 노래 솜씨를 겨루다가 강직하다고 소문난 황새에게 재판을 맡겼다. 그중 따오기가 자기의 솜씨가 밀릴 것 같자, 황새에게 뇌물을 바쳐서 황새가 따오기의 편을 들어준다.

황새는 자신이 좋아하는 먹잇감을 뇌물로 받고, 듣기 거북한 따오기의 울음을 가장 높이 평가해 주는 관리로 그려졌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뇌물을 주고받는 재판 현실을 비꼬는 것이다.

이 소설의 원형은 중국의 우화(寓話)다. 꾀꼬리와 뜸부기가 서로 다퉜다. 그 이유는 각자 자기 목소리가 휠씬 아름답다는 것. 둘이서 승부를 판가름할 수 없었다. 이웃의 황새를 심판으로 내세우고 그 결과를 일주일 뒤에 듣기로 했다. 자신이 만만한 꾀꼬리는 일주일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뜸부기는 황새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 꾀꼬리 모르게 매일같이 바쳤다.

그 후 황새는 개구리를 뇌물로 바친 뜸부기가 꾀꼬리 목소리보다 더 좋다는 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결국 뜸부기는 황새에게 먹으라고 개구리를 주면서 잘 봐달라고 와이료(蛙餌料)를 쓴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 지금도 흔히 회자되고 있는 일본어의 와이로(わいろ)라는 말로 남용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도 정승부터 아전에 이르기까지 뇌물은 중형으로 다스렸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청백리를 찾기란 여전히 어렵다.

■ 황새가 살았던 곳에 비석을 세워준 이유

예전에 황새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새로 사랑받았다. 그래서 마을 어귀에 황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면, 사람들은 정성껏 보살피곤 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마을의 큰 경사로 생각하고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3곳이 남아 있다.

황새마을로 알려진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에는 비석이 2개가 된다. 하나는 조선시대에, 하나는 일제강점기 때 세운 것이다. 비석에는 황새를 의미하는 ‘鸛(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황새가 흔한 새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1536년(중종31) 1월, 황새를 진상한 자가 있었다. 중종은 답례로 화살 10개를 내리라고 명했다. 흔한 새라면 임금께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황새는 덩치가 커서 먹는 양도 많다. 논이나 습지의 개구리, 미꾸라지, 우렁이, 붕어 등을 먹고산다. 황새 한 쌍이 야생에서 살아가려면 여의도 3배의 면적이 필요하다. 산지를 빼고 나면, 황새가 살 수 있는 면적이 그리 많지 않다. 조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전체에 살았던 텃새화된 황새는 100~150쌍 정도로 추정한다.

■ 아기 배달부 ‘스토크’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

서양 속담에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와 같은 버전이다. 서양에서도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물어보는 아이에게 설명하기 대략 난감할 때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식으로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이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2016년 애니메이션 영화 <아기배달부 스토크>가 만들어졌다. 영어로 ‘Stork’는 황새. 21세기 황새는 ‘아기 공장’에서 인터넷 쇼핑몰 배달부로 일한다.

최근 독일의 한 과학자가 여러 전원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황새와 신생아 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 황새가 많은 전원마을에서 출생아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 황새가 아이를 가져다준 것일까? 숨은 원인은 바로 친환경 농업 등 생태 환경 때문. 황새가 살만한 곳이라면, 아이도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우리나라의 저출산과 황새 멸종은 우연의 일치일까? 어쩌면, 연산군의 황새 박멸 꿈이 먼 훗날 이루어진 셈이다. 오늘날 황새는 국제적으로도 멸종 위기 야생동물로 보호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 망언을 듣고 지하에서 웃는 신라 이사부 장군처럼, 연산군 또한 씨가 마른 황새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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