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나면 여러 조짐이 보인다. 마치 지진을 앞두고, 몇몇 동물들이 사전에 감지하듯이 말이다. 역사서에는 백제의 몰락이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듯, 패망 1년 전부터 다양한 징후를 기록했다.

659년(의자왕19)년 2월에는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왔다. 그중 흰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했다. 5월에는 남쪽 백마강에서 길이가 세발이나 되는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다. 660년(의자왕20)에는 사슴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에서 와서 부여 금강 언덕에 이르렀다. 그 괴물은 왕궁을 향해 짖더니,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는 식이다.

신라 패망기나 고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각종 변고가 생기고 우는소리를 내는 신목(神木) 등이 나타난다. 대체로 왕조나 정권이 바뀌는 등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때 유행한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는 귀신에게 시달렸다. 

■ 나라가 어수선하면 이변이 발생

지난여름 개봉한 영화 <물괴>에서는 괴물에게 시달린 중종을 묘사했다. 중종은 연산군을 탄핵하고 옹립됐다. 중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시달리다가 경복궁에서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조는 쿠데타를 통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추대된 임금이다. 특히 인조 연간에는 자연재해 말고도, 각종 이변이란 이변은 모두 일어났다.

인조 시절 황새들이 떼를 지어 패싸움을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개구리도 두 번 패싸움을 벌였고, 오리도 패싸움을 했다. 더구나 인조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공신 이괄의 난으로 즉위 1년도 못돼 한양을 떠나 공주로 피난해야 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내부 반란으로 도성이 점령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1636년 병자호란에 앞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1627년(인조5) 후금이 군사를 일으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이 강화도로 피난했다. 인조 집권 내내 민심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물론 상당수는 후세의 윤색이 덧붙였을 터. 그래도 정치와 민심이 흉흉한 때 동물들이 사는 환경도 그리 좋았을 리 없다.

또 그런 상황에서 자연 현상이나 동물들의 희귀한 행태가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실록에 기록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땅에 사는 자연이나 동물, 그리고 사람이 하나 됨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명종 때 황새를 낳은 여인

황새는 풍요와 장수를 상징한다. 예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새로 사랑받았다. 그래서 마을에 황새가 들어와 둥지를 틀면 경사로 여겨 비석을 세워줄 정도였다. 1555년(명종10) 5월 10일, 진주에서 한 여인이 황새 새끼를 낳았다. 그 여인은 황새와 아울러 핏덩이 2개를 낳았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을 실록에 기록한 사관도 해괴하게 여겼다. 사관은 자기의 생각을 이어 적었다.

“사람이 새를 낳음은 이전에도 드문 일로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거위를 낳은 괴변을 겨우 진(晉) 나라 때의 일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진나라 왕실의 어지러움이 그와 같았으니 오늘날의 일도 마침내는 또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아울러 “나라에 상서(祥瑞)가 많으면 편안하고, 이변이 많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법이다”고 꼬집었다.

다음 해인 1556년(명종11)에는 성균관 유생 500명이 합동으로 상소를 올렸다. 일찍이 없었던 각종 변고로 하늘의 노여움이 이미 극도에 달했다는 것. 유생들은 민심이 떠나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음을 걱정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와 남동생 윤원형 등 외척들이 크게 득세한 시기였다.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에 대한 여론은 차가웠다. 그녀는 조선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가졌던 여인이자, 조선 왕조에서 대중 불교에 힘쓴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심지어 암탉에서 수탉으로 변한 트랜스젠더 닭이 출현한 것도 무려 다섯 번이나 된다. 오죽하면 실록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문정왕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냉혹했다.

인조 때는 동물 간 패싸움의 시대다. 두 번에 걸쳐 황새의 패싸움, 개구리들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1636년(인조14) 1월 10일, 경상도 대구에 큰 황새 떼가 모여들었다. 황새들은 패를 갈라 남북으로 진을 쳤다. 그리고 날개를 벌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 싸웠다.

평화스러운 이미지의 황새들이 왜 패를 갈라 동족 간에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3월 3일, 달이 묘성(황소 자리)을 침범하고 유성이 1월부터 계속 나타났다. 돌이 저절로 움직인 것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6일에는 평안도 대동강에서 오리 떼가 서로 싸운 모양이다. 실록에는 “서로 싸워 죽은 것도 있고, 거의 죽게 된 것도 있었다. 밤마다 매일 싸우더니 10여 일이 지나서야 그쳤다”고 기록했다. 또 4월 1일에는 개구리들이 패싸움을 벌였다. 서울 청파동 돌다리 아래 개구리가 서로 싸워 죽은 것이 많았다.

6월에는 전년 겨울에 쓰러진 경산도 양산의 소나무가 다시 일어났다. 거의 일 년 내내 가뭄과 홍수, 소 전염병 등 재난이 거듭됐다. 11월에는 종묘에 불까지 났다. 급기야 1636년(인조14)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겨울철의 결빙기를 이용해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인조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한산성에서 조선 왕조 최대의 굴욕을 맞봤다.

■ 인조 시절 두 번에 걸친 황새와 개구리의 패싸움

인조 연간 동물들의 이상한 패싸움은 연이어 나타난다. 황새의 패싸움은 한 번만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5년 후, 이번에는 전라도에서 발생했다. 1641년(인조19) 11월 22일, 전라도에서 황새 떼가 패싸움을 벌였다. 남북 두 부대로 나뉘어 한참 동안 서로 싸웠다. 그런데, 남쪽 황새 떼가 이기지 못했다고 전라 감사가 보고했다.

개구리의 패싸움 또한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만 발생한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646년(인조 24년) 3월 2일에도 다시 벌어졌다. 그런데 이번의 개구리 패싸움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평안도 안주 지방에서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가 5일 동안 싸웠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8년 동안 심양 인질 생활을 끝내고 소현세자가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2달 뒤인 1645년 4월 의문사 했다. 인조에게 독살 당했다고 여긴다.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의 싸움이 있은 지 10여 일 후인 3월 15일, 세자빈 역시 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인조는 단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그 해 3월 26일 충청도 공주 일원에서 안익신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1647년(인조25) 4월 6일, 영의정 김자점, 좌의정 이경석, 우의정 남이웅 등이 합동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정승들은 근래 각종 재난과 이변 발생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고 지적했다. 평안도 안주에서도 개구리들이 싸웠고 전라도에서는 황새들이 싸웠으며, 순천의 조수는 하루에 세 차례나 밀려왔으며, 동해의 물은 역류한 지가 이미 오래됐다는 것.

떠도는 말을 모두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목격한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방 수령들은 보고 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재변이라는 짚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천재(天災)를 매우 신중히 여기라고 아뢴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은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언로를 열고, 백성들의 고통을 진휼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맥을 짚는다. 정승 들은 인조에게 암행어사를 특별히 뽑아 팔도에 두루 보내 탐관오리를 통렬하게 제거할 것을 건의한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 시절에는 1624년(인조2) 이괄의 난과 1644년(인조22) 심기원과 1646년(인조24) 안익신의 모반 등 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각종 사건이 잇달았다. 화적(火賊)으로 불렸던 민중들의 저항도 일상화되었다.

■ 효종 시절 오리 떼와 두꺼비 떼의 패싸움

효종 연간에도 동물 간 패싸움이 계속됐다. 오리 떼와 두꺼비 떼의 패싸움 등 두 차례 기록되어 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인조 시절과는 달리 동물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다는 점이다.

1650년(효종1년) 3월 11일, 충청도 공주에서 물오리가 세 무리로 나뉘어서 싸웠다. “각각 서로 진을 만들고 싸움을 했는데, 모였다가는 흩어지고 한 것이 1개월이 넘었다”고 적었다. 또 그로부터 두 달 후인 5월 10일에는 두꺼비가 셋으로 나뉘어서 싸웠다.

“충청도 회덕현에서 청색ㆍ백색ㆍ흑색 두꺼비들이 도랑에 모여 며칠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회덕은 대전 대덕구 송촌동. 지금도 ‘선비마을’로 칭한다. 그 무렵 조정의 실권자였던 우암 송시열의 텃밭이다. 서인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다. 효종 즉위 초에 송시열의 홈그라운드에서 벌어진 두꺼비들의 패싸움은 의미심장하다.

두꺼비들의 패싸움은 20여 년 후 다시 일어났다. 1677년(숙종3) 2월 26일, 이번에는 강원도 삼척에서 두꺼비가 패싸움을 했다. 두꺼비들은 두 패로 나뉘어 서로 소리를 지르면서 물고 뜯었다. 도망가면 쫓아가서까지 싸우는 광경이 목격됐다.

이 싸움은 무려 5일간이나 지속됐다. 패싸움의 결과는 어땠을까? 크고 누런 두꺼비 무리가 지고, 작고 검은 것이 이겼다. 패한 두꺼비는 많이 죽었다.

1684년(숙종10) 2월 26일에는 서울 연지방(종로구 연지동) 한 가정집에서 샴쌍둥이 고양이가 태어났다. 머리가 둘에 눈이 네 개, 코와 입 귀는 각각 두 개였다. 고양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숙종은 조선 왕조 최고의 고양이 ‘덕후’였다. 실록에 샴 썅둥이 고양이 출현을 적시한 것은 애완 고양이 집사 였던 숙종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숙종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관이 특별하게 기록했을지 모른다.

옛날 기상이변과 각종 재난은 꼭 왕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듯이 기술되는 게 많다. 사실 야생 동물 중 철새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기러기나 고니 같은 큰 철새들은 가족 보호나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이 작은 철새들 보다 강하다. 아마 가족 단위로 여행을 하다 보니 그런 거 아닌지 모르겠다. 철새를 구경하다 보면 가끔 패싸움 비슷한 광경이 보인다.

영역 다툼은 생존이 걸린 일이기에 싸움 양상은 자못 필사적이다. 처음에는 두 무리가 서로 삿대질하듯 긴 목을 빳빳이 쳐든다.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노 젓듯 퍼덕인다. 급기야 소리를 꽥꽥 질러대면서 상대방에게 들이댄다. 분명 패싸움이다. 한참을 그렇게 핏대 세우며 싸운다. 싸움이 끝나면, 평상시처럼 먹이 활동에 돌아간다.

그러나 생태학적 지식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다르게 봤다. 동물의 패싸움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마침 각종 재난과 병자호란이 겹쳤던 인조 때부터 효종 때까지 그런 기록이 몰려 있다.

■ 역사 속 개구리 패싸움의 의미

역사 속에서 개구리는 왕권과 신성성을 상징한다. 부여 왕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바로 그 예다. 왕권의 후계자로 금빛 개구리로 설정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 번에 많은 알을 낳는 개구리의 생산성과 금빛이 지닌 신성성과의 결합을 통해 왕권을 기원한 듯하다.

개구리의 패싸움은 서기 10년, 고구려 제2대 유리왕 때부터 찾을 수 있다.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무리를 지어 서로 싸웠다. 결과는 검은 개구리가 모두 죽었다. 음양오행 중에 오방색은 다섯 가지 색을 뜻한다. 동쪽은 청색(東靑), 남쪽은 붉은색(南赤), 서쪽은 흰색(西白), 북쪽은 검은색(北黑), 노란색(中黃)은 가운데, 즉 중앙을 상징한다.

당시 고구려의 북쪽에 부여가 위치했다. 개구리의 패싸움을 보고 그 당시 사람들은 머지않아 고구려와 부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부여가 망할 거라고 해석했다. 이 기록은 개구리가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가 울면 비가 온다’든지 ‘개구리가 처마 밑으로 들어오면 장마 진다’고 하는 것 등은 다 개구리의 예언 기능을 뒷받침하는 말들이다. 그 후 서기 22년, 정말 유리왕의 아들인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공격해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했다.

인조 때 황새나 개구리의 패싸움은 청나라와의 싸움을 은유한다. 동쪽(조선)의 푸른 개구리와 북쪽(청나라)의 검은 개구리가 싸운 것. 이로 인해 결국 소현세자와 숱한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고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고 만 셈이다. 인조는 숙부 광해군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됐다. 그리고 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인 냉혹한 왕이었다. 민심도 얻지 못했다.

한편 개구리나 물오리의 싸움은 당파싸움에 찌든 조선 사회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개구리는 또 변신을 잘하는 동물이다. 알에서 올챙이로 변하였다가 다시 개구리로 변한다.

효종 연간 물오리와 두꺼비가 세 무리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과 청나라,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조정의 친명나라 세력 간 암투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꺼비는 물과 육지를 오가며 사는 관계로 영험한 동물에 비유됐다. 두꺼비가 나타나면 세상에 변고가 있을 것을 미리 예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백제 의자왕 때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인 후 백제가 멸망했다. 신라 애장왕 때는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고 그 해 왕이 시해됐다. 조선에서는 두꺼비가 지배 계층으로 비유됐다. 두꺼비는 민중을 핍박하는 부정적 존재로 여겼다.

■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

조선은 우물과 같은 나라였다. 수백 년 동안 외부 세계와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타의에 의해서 이 우물 밖으로 나오게 된 두 개구리가 나타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조선이라는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로 비유할 수 있다.

병자호란 패배 후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당시의 수도)로 끌려간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소현세자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발전시킬 것을 꿈꿨다. 반면,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우여곡절 끝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 그에게 청나라를 치는 ‘북벌’은 쇼가 아닌 삶의 목표이자 전부였다. 효종은 ‘북벌’을 통해 자신의 원래 우물 안 세계가 정당함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 그 시절 ‘북벌’은 대의명분이자, 무시할 수 없는 여론이기도 했다.

여하튼, 조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두 개구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생각은 좁혀질 수 없을 만큼 판이하게 달랐다. 역사는 소현세자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개방을 통해 자기혁신을 이룩하며 발전시키자고 했다. 그의 생각은 훗날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일본을 최고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부터 모든 문명 속에는 보수와 혁신 세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정(正)과 반(反)의 합(合) 이뤄 진화를 이뤄냈다. 순혈이나 순종만을 따지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문화는 높은 수준에서 낮은 수준으로 ‘섞임’을 통해 발전해 간다.

지금 이 순간에 ‘흑묘백묘’(黑苗白描)의 선택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요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이 과연 「정반합」 인지, 수구꼴통 「보수」 혹은 무늬만 「혁신」인지 구분하기 몹시 어렵다. 가면 속 이질적인 하이브리드(Hybrid·변종)가 판치는 세상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2061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