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다니던 80년대는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순수 예술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컸던 시대다. 순수 예술이란 ‘원숭이의 재주에 불과하다’는 어떤 시인의 말을 놓고 우리는 토론 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말에 동의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통감했던 시절, 브레히트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읽으며 소명감을 느꼈다. 한 친구가 이의를 제기했다. 왜 예술이 정치성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지? 누군가 말했다. 너의 그런 태도가 이미 정치적이라고. 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기로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 운운하는 것이라고. 네가 순수 예술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예술의 역할을 주장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다고. 너는 비겁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당사자는 한참 조용히 듣고 있더니 반론했다. 너희들의 그런 편협한 생각이 예술의 본래의 힘을 고사시키고 예술을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시킨다고 되받았다.

친구들은 다시 말했다. 예술의 본래의 힘을 고사시키지 않기 위해 지금 이곳의 통곡과 죽음을 외면하고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네가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일까? 그때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학살과 독재를 모른 체하고 한가하게 순수예술 주장하면서 소일할 때 세상에는 무수한 죽음이 진행된다. 그런데 너는 순수예술 하고 있을 거냐고. 네가 주장하는 그 예술도 결국 인간을 위해 있는 거라고. 이에 대해 친구는 예술이 도구나 수단이 되면 안 된다고 했고, 왜 예술이 수단이나 도구가 되면 안 되냐? 예술이 절대 신인가? 절대 진리인가? 도대체 예술이 뭐냐?고 했다. 공격자들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다고 비난할 사람도 없고, 순수예술 논쟁이 필요한 시대도 아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골동품이 된듯하다.

니체는 ‘예술을 위한 예술’ 운위하는 자들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한다. 니체를 통해 나는 청춘의 한 시절로 잠시 돌아갈 수 있었다. 절박하기만 하던 당시의 논쟁을 떠올리면, 미소를 짓게 된다. 그 시절은 누구나 그랬다. 대의에 대한 시대적 사명감으로 펄펄 끓던 젊음이 나에게도 있었다. 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을 발설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삶을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했고, 타인을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한 실천을 자기에게 부과했다. 니체는 그 시절 우리의 담론과는 좀 다른 맥락이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예술 안의 목적에 맞서는 싸움은 항상 예술 안에 있는 도덕화 하는 경향에 맞서는 싸움이며, 예술이 도덕의 하위에 놓이는 것에 맞서는 싸움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도덕 같은 것은 꺼져버려라! ”이다- 하지만 이런 적대감마저도 여전히 편견의 우세한 힘을 누설하고 있다. 도덕을 설교하고  인간을 개선하려는 목적이 예술에서 배제되어도, 이것으로부터 예술이 도대체가 목적이 없다는, 목표가 없다는, 의미가 없다는, 간략히 말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있는 어떤 벌레라는 –결론은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도덕적인 목적을 갖느니 차라리 어떤 목적도 갖지 않으련다!-단순한 격정은 이렇게 말한다.” <우상의 황혼 24>

니체는 도덕과 예술을 분리한다 해도 예술이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예술도 결국 삶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삶이 없다면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는 예술이란 것은 삶을 위한 ‘자극제’라고 말한다. 

이는 예술의 기원을 더듬어 보면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11월쯤 인도네시아 섬 동굴에서 인간 손바닥 그림을 벽에 남긴 ‘구석기 동굴벽화’가 발견돼 관심을 모았다. 이 동굴벽화는 최고 5만 2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1만 5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보다 훨씬 앞선 것이며, 가장 오래된 인류 예술작품으로 추정되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보다 앞선 시기의 작품이라 고고학자들을 흥분시켰다.

이들 벽화를 통해서 예술의 기원을 더듬어 본다면 대체로 노동 후의 유희로서, 또는 주술적 효과로서다. 힘든 사냥을 한 후 남는 시간 동안 벽화를 그리거나 악기를 만들어 불면서 예술이 기원했다는 설과 많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한 주술적 의례에서 기원했다는 설이다. 즉 동물을 포획하는 예행연습을 위한 제의의 도구로 그림을 그려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어떤 경우든 예술이라는 것의 시작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 삶을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 것이지 예술을 위해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술도 하나의 해석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술에 부여한 미적 판단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씌워놓은 표상이다. 거기 절대적인 가치가 있을 수 없고 아름다움 자체라는 말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펼친 해석이고, 객관적인 아름다움 따위는 없고 주관적인 해석만이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해석 대상의 ‘본질’이거나 그 속성과는 무관한 ‘오류’에 가까운, 인간이 부여한 이미지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예술, 종교, 도덕, 국가 등을  삶의 관점으로 볼 때 니체가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온다.

니체는 미와 추의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힘 의지의 고양여부로 판단한다. 그러니까 힘에의 의지를 상승시키는 쾌감의 상태를 아름답다고 판단하고 힘의 고양을 퇴화시키는 것을 추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퇴락한 인간보다 더 추한 것은 없다-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 영역의 경계가 지어진다. - 생리적으로 고찰해보면 추한 모든 것은 인간을 약화시키고 슬프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쇠퇴, 위험, 무력을 상기시킨다.: 이러면서 인간은 실제로 힘을 상실한다. 추한 것의 효력은 동력계를 가지고 측정해 볼 수 있다. 대체로 인간이 풀 죽고 우울해질 때, 그는 ‘추한 것’이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힘에 대한 그의 느낌, 그의 힘에의 의지, 그의 용기, 그의 긍지-이런 것이 추한 것과 함께 사라지며 아름다움과 함께 상승한다.” -<같은 책 , 20>

니체에게 미적 체험은 신체와 연동되어 있다. 미적 판단은, 즉 ‘어떤 미적 행위와 미적 인식이 있으려면’ 몸의 차원, 생리적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도취 상태에서 예술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탄생한 예술은 다시 인간을 상승시킨다. 예술은 인간에게 삶을 긍정하게 하고 힘 의지를 증가시킨다. 예술은 삶의 자극제이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니체의 사유는 초기작 <비극의 탄생>시기와 후기작 <우상의 황혼>시기에 조금 달라진다. 초기에는 아폴론적인 조형 충동과 디오니소스적인 파괴 충동이 공존했다면 후기에는 개체화하는 아폴론적인 충동은 슬그머니 사라진다. 후기로 갈수록 예술에 대한 생리학적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결국 예술이란 것도 사람의 힘 의지가 생산해낸 힘의 구현이고, 삶을 위한 유용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듯하다.

결론적으로 니체에게 예술이란 삶을 추동하고 삶을 창조하는 모든 활동이다, 예술가는 임산부이면서 임산부 스스로가 작품이기도 하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신 즉 자연’, 즉 자연 스스로가 예술가이며 그 스스로가 예술작품이며, 그의 양태들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이다. 니체에게는 개체의 삶도 예술 작품이 된다. 예술이란 삶과 유리된 고원한 무엇이 아니니까. 그것은 삶에 내제된 방식으로 자기를 구현한다. 구현된 낱낱의 작품들은 모두 힘 의지들의 산출물, 바로 예술작품이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힘 의지의 산출물들을 매일매일 생산하는 예술가다. 그러니까 잘 만들어야 한다. 나의 삶이 바로 작품이니 말이다. 나의 작품들에는 내가 있다. 또한 나의 작품은 타인에게 적든 크든 영향을 주리라. 나의 삶은 이렇게 저렇게 수많은 타인에게 가 닿는다.  

세상에 파렴치가 판을 치고 갑 질하는 누구누구가 언론에 오르내릴 때 나는 생각한다.  나 한사람 청정하게, ‘잘 살면’ 세상에 좋은 작품을 생산해 낸 것이라고. 그것이 보시라고. “나는 무기력해!”가 아니고 “나는 지금 작품을 만드는 중이야” 라고  생각하면 힘이 난다. 내 삶만큼은 조금 수고하고 애쓰면 괜찮은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거다.  

나는 매일 예술작품을 창조한다. 웃고 울고 비틀거리면서. 정신의 비상을 꿈꾸며 수많은 나와 접속한다. 고통, 그것은 창조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솜씨 좋은 장인처럼 땀과 시간을 들여 삶이란 작품을  빚어내고 싶다. 

나 한 사람 제대로 산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 가 아니고, 나 한 사람이 제대로 살면 세상이 많이 달라질 거야. 나 한 사람이 지금 제대로 살고 있지 않아서 세상도 비틀거리고 있어. 라고 나에게 속삭인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천경의 니체 읽기>는 매월 첫째주, 셋째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269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