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레전드가 된 록 그룹 퀸(Queen)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한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영화 속에도 언뜻언뜻 비춰 보이듯, 그의 고양이 사랑은 대단했다.

그는 대부분 길고양이를 키웠다. 첫 솔로 앨범 ‘Mr. Bad Guy’를 고양이에게 바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노래 중 ‘딜라일라 (Delilah)’는 애완 고양이 ‘딜라일라’가 주인공 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고양이를 신의 걸작이라고 평했다. 서양에서는 많은 예술가가 애묘인이었다. 소문난 고양이 ‘덕후’로 황금빛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앙리 마티스, 소설가 찰스 디킨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을 꼽는다.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50마리나 길렀다.

예술가와 고양이는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걸까? <예술가와 고양이>를 쓴 앨리슨 나스타지는 고양이와 예술가 모두 독립적인 성향을 띠고, 밤에 활발히 활동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창의형 인간은 야간형 올빼미 족이 많다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동물과 인간의 역사. 그 굴레 속에서 동물과 인간의 교감도 함께 맞물려 왔다. 이러한 한 편의 믿음과 사유가 차곡차곡 바탕이 되어 오늘날의 반려문화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먹을 게 없어서 도둑고양이가 되었다옹

동물 세계는 인간 세계의 축소판이자 척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일부 실학자들은 동물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을 발견했다. 동물 관찰기를 많이 남긴 성호 이익(1681~1763)은 고양이를 보며 ‘인간의 조건’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떠돌아다니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이익의 집으로 들어왔다. 마침 잡아먹을 쥐도 많지 않았다. 늘 배가 고프다 보니, 조금만 단속을 소홀히 해도 밥상에 차려 놓은 음식까지 훔쳐 먹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천성이 도둑질 잘하는 ‘나쁜 고양이’라며 잡아 죽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식구들은 원래 고양이를 예뻐했다. 때문에 먹을 것을 많이 주어 잘 길렀다. 또 쥐도 많아서 사냥을 하여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으므로,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집에서는 ‘좋은 고양이’라고 칭찬했다.

이익은 탄식한다. “이 고양이는 분명 가난한 집에서 자랐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게 됐고, 도둑질을 했으니 내쫓기게 됐다.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는 본래의 성품은 모른 채 그저 도둑고양이로만 대했다. 그러나 그때는 도둑질을 해야만 살 수 있었기에 그런 것이다. 비록 쥐 사냥을 잘하는 재주가 있었다 할지라도, 누가 그런 줄 알았겠는가.”

이익은 크게 깨닫는다. “고양이가 올바른 주인을 만나고 나서야 어진 본성이 드러나고 재주 또한 제대로 쓰게 됐다. 만약 도둑질을 하고 다닐 때 잡아서 죽여 버렸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사람도 때를 잘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하는데, 저 짐승 또한 그런 이치가 있도다.”

요즘은 길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캣맘, 캣대디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길고양이를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종종 보인다.

이익의 ‘나쁜 고양이’ ‘착한 고양이’ 이야기는 지금 세상에서도 적용되는 이치다. 이익은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실제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사유했던 것이다. 인간이 어찌 눈에 보이는 객관적 ‘팩트’만을 잣대로 삼으며 살 수 있겠는가. 우리 삶의 기준은 ‘팩트’만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진실된 태도일지 모른다.

■ 역사 속 소문난 애묘인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몇몇 소문난 애묘인을 찾아볼 수 있다. 황금빛 고양이를 좋아했던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과 조선 중기 숙종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고양이 ‘덕후’는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다.

영조는 ‘길냥이’ 아니 ‘궐냥이’들의 생명을 아꼈다. 선비 냥덕(?)으로는 성종 연간의 문신 서거정을 들 수 있다. 서거정 역시 오원자(五圓子)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그 고양이를 주제로 여러 차례 시를 짓기도 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우리 숙종대왕도 일찍이 금묘(金猫;황금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를 길렀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그 고양이 역시 밥을 먹지 않고 죽으므로, 묘 곁에 묻어주었다. 대저 ‘개와 말도 주인을 생각한다’는 말은 옛적부터 있다.

하지만, 고양이의 성질은 매우 사납다. 비록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만들었다 해도, 하루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갑자기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린다. 그런데 이 금묘는 도화견(桃花犬; 송나라 태종의 애완견)에 비하면 더욱 이상하다.” 까칠한 성격의 고양이가 주인이 죽자, 따라 죽은 것을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화가로서는 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인 도화서 출신 변상벽을 으뜸으로 친다. 변상벽은 특히 고양이를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잘 그렸다. 그의 고양이 그림을 받은 문인 정극순이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을 걸어두자 개가 짖고 쥐들이 숨었다”고 했을 정도. 고양이를 너무 잘 그려서 그의 별명은 ‘변고양이’ 또 닭 그림을 많이 그렸다 해서 ‘변닭’이라고도 불렸다.

김득신의 파적도(破寂圖)는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길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급박한 상황을 묘사했다. 집 주인은 몰락한 양반이다. 벗어진 탕건, 내던져진 자리틀로 보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다.

맨발로 뛰어나온 안주인은 병아리보다는 마루에서 떨어지는 남편이 걱정스러운 듯 안절부절 못하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닭이며 혼비백산 달아나는 병아리 등 생생한 상황 묘사가 절묘하다.

■ 정조의 문체반정에 저항한 괴짜 선비 이옥

조선 후기 이옥(1760-1815)은 정조가 단행한 문체 반정에 저항한 이단아이자 방외지사였다. 연암 박지원과 같이 정조의 문체 지적을 받고 반성문을 요구받았지만 이옥은 결코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고리타분하고 칙칙하기 이를 데 없는 전통적 글쓰기에 저항한 이옥을 정조가 용납할 리 없었다. 실제 그는 과거시험에서 1등을 하고서도 정조로부터 “문체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추후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게다가 지방 군적에 보충군(充軍)으로 편입되는 벌까지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벼슬을 단념할지언정 문체는 바꾸지 않겠다는게 그의 소신이었다.

이옥은 북학파이자 사검서의 한 사람이었던 유득공과는 이종사촌이다. 충군의 명을 받고 경상도 삼가로 내려가는 길에 당시 안의 현감이었던 연암 박지원과도 만난 적이 있다. 안의 관아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이옥은 연암이 신축한 정자인 ‘하풍죽로당’을 구경하고 <집에 대한 변>을 지었다.

이옥은 평생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삶을 선택했다. 다만 ‘조정의 이해관계, 지방관의 잘잘못, 벼슬길, 재물과 이익, 여색(女色), 주식(酒食)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정했다. 그리고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하고 주변적인 것, 즉 새·물고기·짐승·벌레·꽃·곡식·과일·채소·나무·풀 같은 것에서 소재를 취했다.

그는 빛이 다해 가는 시대의 인간 군상들과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다룬 산문을 다수 남겼다. 그중 하나가 고양이를 ‘고양이를 탄핵한다(劾猫)’라는 색다른 주제의 글이다.

■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개는 가마솥에서 죽는다

이옥의 개는 고양이를 무척 싫어했던 모양이다. 전통적으로 개는 고양이와 앙숙이다. 그런데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늘 고양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키우는 개가 고양이를 보면 물지 못해 안달인 것을 보고 개에게 ‘왜 그러는가’라고 묻자, 개가 답했다.

“제대로 쥐도 잡지 못하는 주제에 주인 곁에 착 달라붙어 야옹거리면서, 마치 배고픈 아이가 밥을 찾는 양하니 밥상을 물리기도 전에 먹을 것을 나눠 받아 배불리 먹고, 때때로 다시 생선과 고기로 사치를 누린다”고 탄핵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이렇게 토로한다. “신은 비록 미천하고 용렬하오나 그 지키는 바가 도둑입니다. 밥그릇도 태반이 콩이지만, 그나마 하루 두 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의 은혜입니다.

밤이면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하고 구멍마다 돌면서 오로지 도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저 울타리 밖의 도둑도 몰아 쫓아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안의 도둑이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고양이를 보면 반드시 쫓아 버리고 마주치면 물어뜯는 이유입니다.

어찌 주인께서는 무슨 사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장차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신은 가마솥에서 죽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실시학사 완역 이옥 전집 인용)

개가 이렇게 탄핵 이유를 말하자 ‘주인은 고양이를 소나무 우거진 산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하면서 글을 맺는다. 개의 충직함은 때론 배신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됐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나온 글이 이옥의 문체였다.

코너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고양이에 생선을 맡긴 격’이라는 판단이 들면 언제든지 국민은 고양이를 탄핵할 수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줄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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