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겸손해야 살 수 있다
지난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독일경기를 중계했던 캐스터와 당시 해설을 맡았던 차범근 전 국가대표 감독의 대화 내용입니다.

캐스터 : 독일의 명장 뢰프가 화면에 잡히고 있습니다.

차범근 : 그렇습니다. 제가 선수시절에 함께 뛰었었는데요. 좋은 선수에서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

캐스터 : 뢰프는 어떠한 선수였나요?

차범근 : 제 교체선수였습니다.

그 요아힘 뢰프(Joachim Low)가 이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을 우승으로 이끈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필자는 뢰프의 성공을 지켜보며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아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5대 0으로 참패를 당한 직후 월드컵 기간에 경질됐던 차범근 전 감독의 아픈 과거와 뢰프의 성공이 묘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뢰프 감독처럼 선수시절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명 감독들이 많습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첼시의 조세 무리뉴(Jose Mourinho) 감독과 히딩크 감독도 선수 시절에는 그다지 이름이 높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공을 차며 뛰는 능력과 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능력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최근의 추세인 빅 데이터를 활용하여 상대팀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최적의 전술을 만들고 적절한 선수교체 타이밍을 결정하는 일이 현대 축구의 주요한 흐름임을 고려하면, 감독은 멀티 태스킹이 가능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 팀의 경기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했던 얘기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입니다. 11명의 선수가 동시에 필드에서 경기를 하는 축구는 선수 모두가 같은 시간에 동일한 생각을 하며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뢰프는 자신이 이끄는 독일 팀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많이 뛰고 가장 많은 패스를 하고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팀이 독일이었던 것입니다. 녹슨 전차 군단이라는 오명을 쓴 독일 대표팀을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보여주는 새로운 저먼 사커(German Soccer) 군단으로 완벽하게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전설의 골잡이였던 위르겐 클린스만(Jurgen Klinsmann) 전 독일 국가대표 감독의 천거로 독일 축구 대표팀의 사령탑이 됐지만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이름이 없었던 뢰프에게 세계 정상의 독일 팀을 맡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공격축구에 대한 독일축구협회와 독일인들의 신뢰는 전폭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일 축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을 기다려 주었습니다. 월드컵 우승으로 향해가는 과정 자체가 우승감이었던 것입니다.

당분간 세계 축구는 독일의 성공을 배우려 할 것이고 독일의 축구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방은 모방일 뿐입니다. 스포츠의 성공에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경험과 철학이 큰 역할을 합니다. 유럽과 남미의 프로축구의 역사는 100년이 훌쩍 넘습니다. 긴 세월 동안 진화해온 축구 유전자가 그들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잠시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도 다시 정상으로 올라오는 저력은 그들의 혈관 속에 흐르는 축구 유전자가 강인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독일이 유명하지 않은 감독에게 무려 8년 동안 국가대표를 맡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 이후 홍명보 감독까지 12년 동안 모두 10명의 감독이 이끌었습니다. 히딩크 감독 이후 지긋하게 참고 기다려 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프랑스와 평가전에서 5대 0으로 참패를 당하면서 사람들은 히딩크에게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그당시 여기저기서 히딩크 감독을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었습니다. 하지만 히딩크는 흔들리지 않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우리에겐 홈 그라운드의 이점 덕택이었든 아니었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다는 자랑스러운 축구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2010년에는 사상 첫 원정 16강을 달성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브라질 월드컵을 치르면서 한국 축구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축구 중계 캐스터로서 한국 축구의 영광적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는 이러한 위기의 원인이 겸손하지 않은 월드컵 준비과정에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피파(FIFA)랭킹 56위의 나라가 스타플레이어가 즐비한 피파랭킹 10위권의 나라와 경기를 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표팀에겐 조직력을 다질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감독이 자주 바뀌다 보니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선수 기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외파가 빠진 상태에서 예선전을 치르고 A매치 평가전을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설령 해외파가 합류하더라도 대부분 2박3일의 짧은 일정으로 대표팀에 소집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발을 맞추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치르면서 히딩크는 원할 때마다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차출한 반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하는 국가대표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같이 훈련을 하는 시간이 많아야 손발이 맞게 되고 서로 약속한 플레이를 세밀하게 완성할 수 있는데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피파랭킹을 넘어서는 결과를 얻기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월드컵에서 기적이 일어날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사상 첫 원정 8강을 향하여’라는 표어를 남발했습니다. 우리의 경기력으로는 원정 8강은커녕 1승도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매스컴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월드컵 시즌만 되면 왜 다들 그렇게 이성을 잃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홍명보 감독의 거취에만 관심이 있고 이번 월드컵에서 드러난 문제점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에는 소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해결책이 제대로 나올 텐데 이런 작업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유일한 성과는 2002년 승리의 주축이었던 선수들이 월드컵 해설위원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것밖에 없습니다. 정작 축구는 나락으로 추락해서 ‘엿사탕 세례’를 받았는데 말입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월드컵 4강에 올랐던 소중한 자산을 이제부터 꺼내 써야 할 때입니다. 2002년 우리의 성공요인과 이번 독일의 성공요인 간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분석해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다시 한번 밝혀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설위원이 된 선배들의 조언이 매우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노력과 대표팀 운영의 원칙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Any given Sunday)’에서 미식축구 감독으로 열연한 알 파치노가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선수들에게 경기 직전에 해준 명 대사가 있습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여러 가지를 잃는다. 그게 인생이야. 하지만 잃기 시작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돼. 인생은 1인치의 게임이라는 걸 말이야. 풋볼도 그래. 인생이건 풋볼에서건 오차범위는 매우 작아서 반 걸음만 늦거나 빨라도 성공할 수 없고 반 초만 늦거나 빨라도 잡을 수 없어. 모든 일에서 몇 인치가 문제야. 경기 중에 생기는 기회마다 매분, 매초마다 그래. 우리는 그 인치를 위해 싸워야 돼! 우리는 그 인치를 위해 우리 몸을 부수기도 하고 남의 몸을 부수기도 하지. 그 인치를 위해 주먹을 움켜 쥐어야 해! 그 인치들을 합치면 승패가 뒤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지! 어떤 싸움에서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사람만이 그 인치를 얻을 수 있어. 내가 인생을 더 살려고 하는 것은 아직 그 인치를 위해 싸우고 죽을 각오가 돼 있기 때문이야. 그게 인생이기 때문이야! 여러분 앞에 놓인 6인치를 내가 억지로 시킬 순 없어! 하지만 옆에 있는 동료를 봐. 그의 눈을 들여다봐. 여러분과 같이 그 인치를 위해 같이 갈 각오가 보일 거야.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보일 거야. 여러분은 서로를 위해 희생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지. 그게 팀이란 거야. 지금 우리가 팀으로서 회생하지 못한다면, 일개 개인으로서 죽어야 돼. 그게 풋볼이야. 그게 전부다. 자, 어떻게 할 건가!”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인치 차이로 발끝에 걸리면 슈팅이 되고 발끝에 공이 걸리는 1인치 차이로 골이 되기도 하고 실축이 되기도 합니다. 이 하찮아 보이는 1인치를 위해 어떤 팀은 10년을 노력해서 우승을 하고 어떤 팀은 허송세월하다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월드컵을 마쳤습니다.

이제 다시 4년 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 축구의 문제점은 고등학교 다니는 필자의 아들도 알고 있습니다. 특출한 스타플레이어 없이도 착실한 준비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처럼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로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美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업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모닝와이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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