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살갗을 서늘하게 어루만집니다. 이 비를 아주 오래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빗소리에 열리는 마음은 온통 파랑입니다. 특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파란 점이 되어 그림을 그리는 듯합니다.

김환기 화백은 파란빛의 점으로 색이 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966년 뉴욕에서 시인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왼편에서 한 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 또 그 아래,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 존재하는 그림이에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 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김환기 화백의 파랑은 그리움의 파랑입니다. 푸른 바다 신안의 섬 소년이 조국을 떠나 있으면서, 때로는 고국의 하늘과 산 그리고 바다, 보고 싶은 이들을 생각하며 한 점 두 점 점을 찍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같은 작품을 남깁니다. 그의 파랑은 넓게 마음을 적시다가 작은 파동을 일으키다 때론 울컥 울음을 쏟아내게 할 만큼 슬픈 음악을 들려줍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유심초의 노래로 사랑받았던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입니다. 화가는 이 시에서 작품 제목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사랑하는 이의 별빛을 찾으며 파란 그리움을 표현합니다.

빗소리에 자꾸 파란 그림들이 떠오릅니다. 비와 파랑은 참 잘 어울립니다. 며칠 전엔 '블루 & D장조'라는 전시를 보았습니다. 이 전시의 부제가 ‘들리는 미술 보이는 클래식’인데, 파란색의 작품이 설치되고 파란 음악들이 전시 공간에 울려 퍼집니다. 김환기, 이우환, 정상화, 강형구, 문 범, 김춘수 등, 작가들의 파란 작품들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잠시나마 좋아하는 파랑에 원 없이 빠져볼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회의 파란 음악들이란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흐의 첼로 모음곡 등 D장조의 클래식 음악입니다. 색도 소리도 상하 주기적인 운동을 하는 전자기파로서 파동을 갖는데, 청색과 동일한 파동을 지닌 음계가 D음(레)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D장조의 음악을 갖고 미술과 접목한 공감각적 전시입니다.

김춘수 작가는 <울트라마린 1307>이라는 추상작품을 선보였는데, 언젠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붓으로 형상을 그리는 것은 언어로 말하는 것과 같으며, 언어 너머의 숨어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추상을 선택한다. 그래서 구체적 형상을 그려내기 쉬운 붓보다 캔버스에 보다 밀착하여 감정을 드러내는 손으로 그리며, 이는 소리를 내어 표현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그의 파란 추상에는 그래서 보이는 리듬이 있고 들리는 울림이 있습니다.

사실 색과 음(音)의 연상은 관계가 깊습니다. 음악에서도 미술에서도 색채니 톤이니 하모니니 하는 용어를 같이 사용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음계의 도(C) 레(D), 미(E), 파(F), 솔(G), 라(A), 시(B)를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에 대응시킨 것입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곡가 스크랴빈이나 핀란드의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는 특히 공감각자로서 서로 다른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색청 공감각은 유전적이라는데 음악을 색으로 보고 색으로 음을 듣습니다. 비가 오니 마치 저도 공감각자가 되는 듯 피부 끝에 감각들이 살아나는 듯합니다.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파란 바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줄 파란 대기, 파란 물줄기를 보며 음악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 여름 사람들은 어떤 파랑을 떠올리고 있을까요. 괴테는 파랑이 두 가지의 모순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극과 진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파랑을 진정색으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색채심리효과입니다. 그런데 괴테가 이야기 한 자극은 어떤 것일까요. 흥미로운 대상이 자꾸만 멀어져 갈 때 아쉬워하며 그 뒤를 쫓는 것과 같이 우리는 파란색을 쫓게 되는 것입니다.

파랑은 우리의 눈을 끌어 당기는 신비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진정색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시장에 울리는 D장조의 클래식 음악은 우리를 침정의 깊은 바다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태풍을 만난 듯 격렬하게 요동치게도 합니다. 빗소리가 고요 가운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날, 파란 그림과 파란 음악은 가슴속을 더 뜨겁게 달굽니다.

안진의

한국화가. 홍익대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색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에서 채색화와 색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화폭에 향수 사랑 희망의 빛깔로 채색된 우리 마음의 우주를 담고 있다.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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