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조선과 청나라 까치와의 전쟁 (51)
[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조선과 청나라 까치와의 전쟁 (51)
  • 박승규 문화평론가
  • 승인 2019.02.0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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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1598년 12월, 남해 노량 바다에는 이순신의 마지막 맹세가 전설로 남았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1636년 12월 30일.(음) 매서운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눈발도 점점 굵어졌다.

아침부터 청나라의 대군이 광나루 등에서 한강을 건너 내곡동 헌릉 등지로 이동했다. 대설이 그치자 잠실과 송파 들판에는 적병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한 점 흰빛이 없을 정도였다.

남한산성 주변은 음산했다. 마침 행궁 남쪽 나무에 까치가 날아들어 집을 지었다. 하릴없이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 믿는 것은 까치, 즉 구원병뿐 이었다.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은 병자호란 당시 <난중일기>나 마찬가지.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 영화 ‘남한산성’
▲ 영화 ‘남한산성’

■ 1636년 연말, 1637년 정초에 남한산성에 나타난 까치

포위 15일째. 김류가 이끈 조선 군사들은 바로 전날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기습 공격했다. 전투는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인조는 실의에 빠졌다. 행궁에서 옷을 벗고 잘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이불조차도 없었다. 수라상에 닭다리 하나가 올라왔다. 인조는 힘없이 말했다.

“처음 성에 들어왔을 땐 새벽에 닭 울음소리가 많이 들리더니, 지금은 그 소리가 어쩌다 겨우 들린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올리지 말라.”

1636년 연말, 남한산성에 포위된 조선군에게 청군보다 더 큰 적은 추위였다. 방한복 대용으로 쓸 빈 가마니조차 부족했다. 1637년 1월 1일, 설날 청 태종 홍타이지는 탄천 주변에 진영을 설치했다.

남한산성에 은거중인 인조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됐다. 인조를 구하기 위한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청군의 포위를 뚫지도 못했다. 고립된 성안의 사람들은 사기가 점점 꺾였다.

1월 11일에도 까막까치가 성안으로 많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길한 징조라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평소 대궐에 까치가 날아들거나, 까치집을 짓는 것까지도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안으로 날아온 그 까치는 목 빠지게 기다리던 근왕병을 대신하지 못했다.

조선은 몰랐다. 까치는 조선뿐만 아니라 청군에게도 길조였다. 까치를 보고 희망을 품은 것은 조선만의 짝사랑이었다. 1637년 1월 30일(음). 인조는 47일을 버티다가 끝내 무릎 꿇었다.

▲ ‘신령스러운 까치’가 범찰을 구하는 장면 '만주실록'의 삽화 / 사진·중앙포토
▲ ‘신령스러운 까치’가 범찰을 구하는 장면 '만주실록'의 삽화 / 사진·중앙포토

■ 청나라의 시조신화속 까치

북방 샤머니즘에서 새는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자로 등장한다. 특히 두만강 건너에 위치한 동북아는 발해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민족과 끊임없이 연루된 곳이다.

우리 고대 국가의 건국 설화에도 새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제4대 왕 석탈해,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 등은 모두 새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삼족오’ 전승처럼 새와 태양을 연결한 토템은 동이족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여러 북방 민족의 새 토템 사례 중 만주족의 까치와 까마귀에 대한 숭배는 두드러진다. 까치는 까마귀와 사촌이다. 당연히 만주족 신화전설에는 까치와 까마귀 이야기가 풍부하다.

만주족 시조신화에서 까치는 부계 혈통을 상징한다. 백두산 천지에 내려와 목욕을 하던 삼선녀에게 신령스러운 까치(神鵲)가 붉은 과일(감을 의미)을 물고 온다. 삼선녀 중 막내였던 페쿨렌(佛庫倫)은 이를 먹고 ‘포고리옹순’을 잉태해 낳는다.

그가 바로 만주족의 시조가 된다. 그러니 까치, 즉 신작은 하늘이 보낸 사신이다. 우리 전래 설화인 ‘나무꾼과 선녀’와 유사한 스토리텔링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이야기가 청(淸) 왕조의 역사 책에도 등장한다.

■ 역사로 밝혀진 청나라의 시조

최근 들어 청나라 시조 탄생설화인 ‘세 선녀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로 밝혀졌다. 신화 속 ‘포고리옹순’은 누르하치의 6대조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 때 회령 여진 부락 지방관을 지낸 ‘맹가첩목아’와 동일인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청나라 역사서보다 <조선왕조실록>에 더욱 자세히 실려 있다.

‘포고리옹순’의 자손 중 ‘범찰’이 반란을 피할 때도 까치의 도움을 받는다. 병사들이 쫓아오는 상황에서 마침 까치가 그의 머리에 앉았다. 추격병은 산 사람이라면 까치가 앉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간다. ‘범찰’은 까치로 인해 목숨을 구한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까마귀의 도움을 받았다. 누르하치는 어릴 때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총병 이성량의 호위병이었다. 이성량은 그가 큰 인물임을 알고 죽이려 했다. 도망쳐 나온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군사에게 쫓기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까마귀가 누르하치의 몸에 내려앉았다. 명나라 군사는 멀리 까마귀 떼가 보이자,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그냥 지나쳐갔다. 까마귀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까치나 까마귀를 조상으로 여기는 만주족의 의식이 위기의 순간에 생명을 구원받은 영웅을 만들어냈다. 만주족 후손들은 까치나 까마귀를 신으로 여기고 해치지 않았다.

만주족은 제사 속에 ‘까마귀 맞이’ 의식이란 게 있다. 솟대를 세우고 그 위에 돼지 내장과 오곡을 던져 넣은 뒤 까치나 까마귀가 와서 먹으면 신이 강림했다고 좋아했다. 이런 ‘까마귀 맞이’ 의식이 역사적 인물을 만나 구체화된 것이 누르하치의 까마귀 이야기다.

1616년 누르하치는 청을 세웠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나타난 까치는 청나라의 손을 들어줬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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