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칼럼-최규남] 정치권, 軍事분야 전문가들의 憂國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안보칼럼-최규남] 정치권, 軍事분야 전문가들의 憂國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 편집국
  • 승인 2019.02.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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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몇 가지 뚜렷한 사실이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국가든 정권이든 흥망성쇠(興亡盛衰)라는 역사적 주기(cycle)를 벗어나지 못하며, 흥하고 성할 때 나타나는 징조와 망하고 쇠할 때 등장하는 사회 현상이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야(視野)를 우리가 살고있는 한반도로 국한하여 살펴보면 어떤 모습일까?

먼저 백제의 경우를 살펴보자. 백제는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만들어 냈을 정도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오늘날의 일본(日本)인 왜(倭國)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국운이 융성하였지만, 우국충정(憂國衷情)하는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물리친 어리석은 왕과 간신(姦臣)들 때문에 멸망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어떤가.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교하여 열세에 있었지만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왕과 신료와 백성이 한마음으로 뭉쳐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고, 약 1000년 – 세계역사상 단일왕조로는 최장(最長)의 기록이라는 주장이 있다 – 동안이나 번영했지만 무능한 왕과 부패한 신료들의 왕위 다툼 등으로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조선 왕조도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와 명석한 신료들 덕분에 세계언어사(言語史)에서 유일하게 글자창제의 원리가 명확하게 밝혀진 한글(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업적 등을 남겼지만, 나라의 안위와 백성을 걱정하는 충신들을 멀리하는 무능한 군주와 파벌 등의 이익을 중히 여기는 부패한 신하들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함으로써 멸망하여 일제(日帝)의 식민지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8·15 광복’은 우리 민족이  자력(自力)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1945년 8월 일제가 미국 등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 물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투쟁한 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의 노력이 조국의 독립에 커다란 힘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 엄밀하게 평가하자면 외세(外勢)에 의한 해방(解放)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이 땅의 정치지도자란 자들은 우리가 맞이한 해방이 자력이 아니라 외세에 의한 것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으로 양분되어 극심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좌익은 – 당시의 우익은 임시정부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노동자와 농민 등 핍박받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를 내세워, 조선 왕조의 양반계급과 일제 등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으며 이 땅을 지켜온 민초(民草)들의 ‘恨 풀이 심리’를 자극하고 그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며 마치 들불이 번지듯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 좌익은 1945년 9월 6일 인민공화국정부(약칭 인공) 수립을 발표하였고,  ‘인공’ 산하 총2,599개의 인민위원회(도·시·군·읍·면)는 미군정(美軍政)이 지방 행정조직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된 1946년 초까지 실질적인 지방자치권을 행사하며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좌익 사상(공산주의)에 물들게 하였으며, 그 결과 일반인들의 좌익사상에 대한 경각심은 매우 이완되게 된다.

美軍政도 초기에는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 좌·우익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1946년에 발생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당시 좌익은 이 사건을 美軍政의 허위날조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고 담당 검·판사를 협박하고 공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계기로 美軍政이 좌익활동을 제재하기 시작하자, 미군정에 대한 투쟁을 선포하고 ‘9월 총파업’, ‘대구 10·1 폭동’,‘제주 4·3사건’, ‘여수·순천 주둔군 반란사건’을 일으키는 등 해방 직후의 불안정한 우리 사회를 극도의 혼란으로 몰고 갔다.

다행히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좌익이 벌이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국가보안법을 긴급히 제정하여, 남한의 軍部 등에 침투한 공산당원(南勞黨員)들을 색출, 진압함으로써 국내 정세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갓 태어난 자유대한민국이 반석 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하지만 이런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후세들에 의해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그 이유는 1950년 북한의 남침(南侵) 징후가 농후하다는 우리 軍 정보전문가(육군본부 정보국)들의 보고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고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국민들이 북한 공산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인민재판과 완장을 차고 설쳐대던 좌익분자 등에 의해 귀중한 목숨을 잃거나 납북되는 등의 억울한 피해를 입게 되는 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 정치권에서 우리 軍의 정보전문가들이 거듭해서 강조한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귀를 기울여 사전에 철저하게 대비하였었다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적어도 우리 軍이 그토록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6·25사변이 일어난 때로부터 약 70년의 세월이 경과한 2019년 현재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들을 지켜보노라면 묘할 정도로 6·25 발발 직전의 데자뷔(deja vu)가 느껴지는 것 같아 적잖이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현재 남북당국 간에 맺어진 ‘9·19 남북 군사합의’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軍事분야 최고 전문가인 450명의 예비역 장성들이 한 목소리로 “9·19 남북 군사합의서는 대한민국을 붕괴로 몰고 가는 합의서로서 조속한 폐기가 정답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국가안보를 걱정하고 있음에도, 우리 정치권은 마치 6·25 발발 직전처럼 우리 눈앞에 닥친 안보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정치권은 이들 예비역 장성들이 국가 안전보장의 핵심은 1%의 위험성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청춘을 바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해 오신 분들이며, 북한 정권의 진의(眞意)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십분 고려하여, 이분들의 주장에 담긴 우국충정의 뜻을 귀담아듣고 만일의 사태를 위한 대비책을 빈틈없이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여·야 핵심지도자들은 백전노장이신 백선엽 장군께서 자신의 自敍傳인 「軍과 나」를 통해서 “우리 軍 등에 침투한 공산당원들을 색출·제거하지 못한 상태로 6·25를 맞았더라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를 생각하면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고 하신 말씀이 대한민국의 존망(存亡)과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하는지를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안보통일연구회 수석연구위원 최규남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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