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계미년(1763년, 영조38) 늦겨울 12월 22일. 나는 누런 말을 타고 아침 녘에 고개를 넘었다. 찬 구름이 하늘을 꽉 메우더니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가로 날리는 눈발은 마치 베틀 위에 씨줄이 오가는 것 같다. 어여쁜 눈송이가 귀밑 터럭에 내려앉아 내게 은근한 마음을 표하는 듯하다. 나는 이런 느낌이 좋아 하늘로 머리를 쳐들고 입을 크게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암수 까치 떼가 말라버린 채 뻗은 가지에 앉아 있다. 예닐곱 마리쯤 될까. 몹시도 한가로워 보였다. 그중 어떤 놈은 부리를 가슴에 파묻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자는 듯 마는 듯 하고, 가지에 붙어 제 부리를 가는 놈도 있고, 목을 돌리고 발톱을 들어 제 눈을 긁기도 한다.

다른 놈은 다리를 들어 곁에 있는 까치의 날개깃을 긁어 주고, 또 어떤 놈은 눈이 정수리에 쌓이자 몸을 부르르 떨어 눈을 날려 떨어뜨린다.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주시해보니 나는 모양이 말이 비탈길을 달리는 듯 빠르다. (중략)

청장관 이덕무(1741~1793)가 젊은 시절, 충주로 가던 길에 쓴 ‘칠십 리 눈길을 걸으며(七十里雪記)’라는 글이다. 섬세한 풍경 묘사가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묵담채화로 펼쳐진다. 옛날 시골 아이들이 내리는 눈송이를 받아먹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이덕무의 ‘작소상량문(鵲巢上樑文)’에도 까치 이야기가 나온다. 1759년(영조35) 11월, 이덕무가 18세 때다. 외삼촌 집 산수유나무에 까치가 집을 절반쯤 짓다 말고 나갔다. 외삼촌은 이덕무가 상량문을 지어주면, 혹시 까치들이 다시 집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지배배 높은 집서 진흙 물어오는 제비를 비웃고
빈 성(城)에서 짹짹대며 낟알 쪼아먹는 참새를 우습게 보네.
때를 알아 기쁜 소식 알려주니 사람이 절로 사랑하고
세태를 등지고 집 지으니 천성이 본시 슬기로워서일세.
큰 나무 서있는 오랜 집서 높은 데를 밟고 있으니
어이해 구차하게 낮은 곳을 좇으리...

이덕무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성스럽게 상량문을 써 기둥에 붙여두었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까치가 돌아와서 까치집을 완성했다.

■ 석탈해 신화에 나타난 까치

까치는 통상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전령이다. 중국에서는 희작(喜鵲)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기쁨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는 까치를 그림 속에 그려 넣었다. 옛 그림 속에 참새가 나와도 기쁨을 뜻한다.

참새는 한자 ‘작(雀)’이지만, 벼슬을 뜻하는 ‘작(爵)’과 발음이 같다. 그러므로 까치 대신 참새를 그려 기쁨을 나타내기도 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아침 일찍이 까치를 보거나, 까치 소리를 들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어왔다. 사실 생태적으로 텃새인 까치는 세력권이 확실하다. 때문에 낯선 사람을 보면 우는 습성에서 나온 이야기다.

세시 풍속에 7월 7일은 칠석날. 이날 까치와 까마귀는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견우직녀의 상봉을 돕기 위해 은하수에 몸으로 다리를 놓는다. 오작교를 만드는 까치는 사랑을 전해주는 전령이다.

중국 농촌에서는 결혼식을 할 때면, 잔칫집에서 까치를 빨간색 종이로 오려 창문에 붙여놓는 풍속이 남아 있다. 까치가 길함을 가져올 뿐만이 아니라 남녀 사이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준다고 여기기 때문. 까치는 사람과 신, 이성을 서로 연결하는 중매 역할도 한다.

까치가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석탈해의 탄생에서 비롯됐다. 울산에 이상한 배 1척이 닿았다. 갯가에서 조개를 캐던 할멈이 까치가 우는소리를 따라 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배 위에는 궤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할멈이 두려운 마음으로 궤를 열어보니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가 훗날의 신라 4대 탈해왕이다. 탈해가 성씨를 석씨로 한 것은 신라에서 자기를 반겨준 까치 작(鵲) 자에서 새조(鳥)를 뺀 것이다. 이때부터 까치는 왕이 될 사람, 즉 신성한 인물을 인도하는 길조로 자리매김했다.

■ 일본에는 까치가 없었다

삼국시대 이래 흰색 동물의 출현은 상서로운 일로 여겼다. <삼국사기>에는 662년(문무왕 2년) 남천주(南川州·경기도 이천)에서 흰 까치(白鵲)를 바친 것을 포함해서 모두 네 차례나 흰 까치를 임금께 올린 기록이 보인다. 고려 때도 976년(경종 원년) 경산부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조선시대에는 흰 까치나 흰 까마귀를 중국에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445년(세종 27) 5월, 경상도에서 잡은 흰 까치를 당시 예조 판사 김종서가 올렸다. 세종은 자못 부끄럽고 무안하다며, 하례하지 못하게 했다. 1464년(세조 10년) 전라도 곡성에도 흰 까치가 나타나자, 관찰사가 세조에게 하례의 전문을 올렸다 2년 후 1466년 8월, 성절사 사신 편에 명나라에 흰 까치를 보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까치가 없었다. 한국보다 몸집이 큰 까마귀는 엄청 많아도 까치는 존재하지 않기에 일본인들은 까치를 잘 모른다. 겨우 규슈의 사가현 정도에만 서식한다. 몸집도 한국산 까치보다 매우 작다.

처음으로 일본에 까치가 전해진 것은 <일본서기> 647년 조에 "신라의 김춘추가 앵무새 한 쌍과 까치(鵲) 한 쌍을 가져왔다”는 기록으로 따른다. 686년(신라 신문왕 6년)에도 일본에 까치를 전했다.

이미 까치는 신라에서 길조(吉鳥)의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에 없는 희귀 새라는 것을 간파하고 보낸 외교적 조치로 보인다. 1420년(세종 3년)에도 까치·흰 비둘기와 오리를 원해 얻어 갔다.

1430년(세종 12년) 2월에는 거의 동물원을 차릴 만한 동물을 가져갔다. 까치 8마리 말고도 흰 비둘기·얼룩 비둘기·흰 오리·얼룩 오리·흰 고니·얼룩 고니·흰 두루미·흰 암양·산양(염소) 각 2마리, 다람쥐 10마리, 큰 개 3마리, 작은 개 1마리이었다.

■ 홍시 하나 남겨둔 조선의 마음

까치에 대한 구전 중에 조선 후기 ‘계서야담(溪西野譚)’ 한 토막이 재미있다. 성종은 밤에 변복을 하고 민심을 살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가 이상한 광경을 하나 목격했다.

어떤 부인이 나무토막을 입에 물고 집 앞 나무 아래에 서더니 ‘까악까악’ 소리를 냈다. 그러자 미리 올라가 있던 남편이 아내로부터 건네받은 나무토막을 입에 물고 까치집을 만들었다.

괴이하게 여긴 성종이 다가가 사연을 물었다. 남자는 나이 50세가 되도록 과거 낙방을 거듭했다. 하여 집 앞에 까치가 둥지를 틀면 합격한다는 말을 듣고, 까치집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성종은 다음 과거 시험 제목을 ‘사람 까치(인작·人鵲)’로 정했다. 남들이 어리둥절할 때, 그 선비만 답안을 작성해서 합격했다.

동요 속 까치설날은 왜 어저께일까?

예전에는 ‘작은설’이란 게 있었다. 설날 하루 전 섣달그믐날을 말한다. 정월 초하루 설날 입을 설빔도 꺼내보고, 미리 마련해 둔 음식 중 일부는 먹기도 하는 소위 설날 ‘예행연습날’이다. 이 작은 설날을 ‘까치 설’이라고 하는데 원래 어원은 ‘아치 설’이었다고 한다. ‘이른, 일찍’이란 뜻의 ‘아치’란 말이 변한 것.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감나무에 남은 홍시의 의미를 이렇게 노래했다. 조금은 남겨 둘 줄 아는 마음, 베풀 줄 아는 사랑이 ‘조선의 마음’이라는 거다.

예전 ‘고수레’ 풍습처럼 악귀만 쫓았던 게 아니다. 겨울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짐승들도 같이 먹자는 배려가 아니었던가? 한때 좋았던 것들도 나에게 해가 되면 그 순간부터 나쁜 쪽이 되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떼가 문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제 교과서를 다시 바꿔야 하나. 과연 모기를 보고 칼을 뽑아 들고, 까치를 보고 총을 겨눌 것인가. 까치 까치 설날은... 노랫소리가 들려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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