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은 누구였을까? 역사를 더듬어보면, 조선 중엽 진주 출신의 조완벽이란 선비를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과거도 보지 못하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사쓰마(=가고시마)로 잡혀갔다. 이때 진주를 함락한 장수가 바로 사쓰마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하도 많이 조선 백성의 귀와 코를 베어 가 살인귀라고 불렀던 인물이다. 훗날 사쓰마번은 1609년 유구국을 점령해 복속시켰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통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무려 10여만 명이 넘는다. 부녀자, 도공, 제약기술자, 제련기술자, 학자 등 사쓰마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 명이었다. 그중 도자기 장인 심당길의 자손은 현재 14대 심수관에 이르도록 사쓰마 도기를 주도하고 있다.

도자기는 당대의 반도체 메모리 칩이자, 첨단 벤처기술이었다. ‘도자기 로드’ 관점에서 보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주력 상품 운명이 바뀐 계기가 됐다.

조완벽은 일본인의 종노릇을 하다가 교토의 무역상에게 팔렸다. 그를 산 상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원자이자, 일본 최대 거상 중 하나인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였다. 그는 불교 사찰 건축 및 교토의 주요 운하 등 대형 토목사업에서 금융업까지 통달한 당대의 재벌이었다.

이미 일본은 왜란 이전부터 동남아 일대에서 활발한 교역을 해왔다. 주인선을 통한 해외 무역에 뛰어든 스미노쿠라는 ‘비율빈’(필리핀), 안남(베트남)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해외 비즈니스로 발을 뻗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공용어인 한자 실력이 높은 사람이 필요했다.

요즘 식으로 풀이하면 조안벽은 토익 또는 IELT 점수가 높은 우수한 인재였던 셈. 그렇게 해서 조완벽은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스미노쿠라에게 채용됐다. 그리고 무역거래를 돕기 위해 당시 후레 왕조(後黎朝)가 통치한 베트남에 3차례나 다녀왔다.

그 무렵 베트남에서는 <지봉유설>로 유명한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의 한시(漢詩)가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원조 베트남 한류스타는 조선의 이수광인 셈이다.

■ 조선 중엽 ‘지봉 이수광’이 베트남 최초의 한류스타가 된 사연

그런데 어떻게 이국 만리 베트남에서 이수광이 지은 시가 유행하고 있었을까? 또 그 사실을 이수광은 알고 있었을까? 그 사연은 이렇다.

조선과 안남은 두 나라 모두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이 때문에 북경에서 양국 사신들 간의 만남이 종종 있었다. 이수광이 바로 그런 경우다. 실학사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수광(명종18~인조6; 1563~1628)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 처음 북경을 다녀왔다. 그리고 조완벽이 일본으로 끌려가던 1597년 두 번째 북경을 방문했다.

바로 이때 이수광은 안남국에서 온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났다. 당시 베트남이 막(莫) 씨에게 찬탈당했던 레(黎) 왕조가 다시 중흥한 탓에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기 위해 보낸 사신이었다.

안남의 사신 일행 23명은 1596년 7월에 안남을 떠나, 걸어서 1년이 걸려 1597년 8월에 북경에 도착했다. 명나라는 외국 사신들을 모아 숙소를 배정했다. 조선의 이수광 일행은 우연히 이미 5개월 전에 도착해 있던 안남국 사신단과 같은 숙소를 사용했다.

35세의 젊은 조선 사신과 70 노년의 안남 사신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서로 시로 화답하면서 기묘한 우정이 피어난다. 50여 일간 동거 동숙하며 이수광과 풍극관이 주고받은 시 문답은 이랬다. 먼저 이수광이 “안남은 겨울도 봄처럼 따뜻하고, 얼음과 눈을 볼 수가 없다고 하더이다”라고 하면, 풍극관은 “남국은 겨울이 적고, 봄이 하도 많습니다”라고 화답했다.

또 이수광이 “안남에는 두 번 익는 벼와 여덟 번 치는 누에가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운을 떼면, 풍극관은 “두 번 익는 보리와 여덟 번 치는 삼도 있소이다”라고 운을 짚어 맞받았다.

풍극관은 나이가 자신의 반밖에 안 된 이수광에게 ‘대수필(大手筆)’이라고 추켜세우며 안남의 특산물을 선물로 줬다. 이수광은 소지하고 있던 조선의 붓과 묵을 답례로 준다. 북경의 옥하관에서 400여 년 전 이뤄진 외교관들의 풍류와 낭만이었다.

풍극관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로 귀국 후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1613년 86세까지 살았다. 그는 지금도 베트남에서 대문장가로 존경받는다. 그의 남긴 <풍공시집>에 수록된 시는 106수에 달하는데, 이수광의 서문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별을 앞둔 풍극관은 자신의 시집 서문에 이수광의 글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 조선 선비 조완벽, 베트남에서 "최초의 한류"를 목격하다

1604년 조완벽은 일본 상인을 도와 처음 안남에 갔다. 17세기 초 세계는 이미 대항해 시대의 한복판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유럽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드나드는 국제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조완벽이 도착한 곳은 교지(交趾=하노이) 인근의 바닷가였다.

그 무렵 베트남에는 유교문화가 꽃 피고 있었다. 유교는 베트남의 통치이념이었고, 한자는 베트남의 공식 문자였다. 학생들은 국자감에서 유교 경전으로 공부했고,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고자 했다.

조완벽 일행은 한번 안남에 가면 석 달 정도 머물렀다. 이때 조완벽의 눈에 신기했던 것은 불과 석 달 사이에 한쪽에서는 논을 갈고, 다른 쪽에서는 곡식이 무르익고, 또 다른 쪽에서는 곡식을 거두는 것이었다.

조완벽은 삼모작 농사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안남 여자들은 맨발로 생활하면서도 100살을 넘겨 사는 장수국이며, 코끼리마저 무릎 꿇고 절(?)을 하는 것을 보니 가히 예의를 숭상함을 알 수 있다 했다. 이수광은 베트남에서는 말보다 훨씬 크고 비싼 코끼리를 시골 아이도 부린다고 <지봉집>에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남국에서 세도를 부리던 환관 정초(鄭剿)가 고관들을 초대한 자리에 조완벽 일행이 참석하게 됐다. 고관들은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후하게 대접한다. 그리고 포로가 된 연유를 묻고, 왜란이 일어난 사실이 안다면서 동정해준다. 이미 이수광이 북경에서 두 차례 안남 사신들과 교류를 가진 다음이었다.

그러다가 책 한 권을 보여내면서 “이 책은 조선의 이수광이 쓴 시인데, 당신과 같은 조선인이니 잘 아는가?”라고 묻는다. 벼슬한 적이 없던 시골 선비 조완벽이 이수광을 알 리가 없다. 조완벽이 답하길,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일찍 포로가 되어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고관 수십 명은 이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되려 면박을 준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경우다. 한류 드라마 열풍이 한창일 적에 어느 한국인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뭇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혹시 대장금 이영애 알아요?” “장동건 알아요?”라면서 친근하게 대해주고 밥까지 사주는 격이다.

그런데 여기다 대고, “저기, 전 드라마 방영할 때 일본에서 유학하느라 못 봤는데요…….”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해서 베트남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거나 마찬가지다.

■10년 만에 기적적으로 귀국한 조완벽

조완벽이 그 책을 살펴보니 고금의 명시 수백 편이 실려있었다. 그중 조선국 이수광의 시가 첫 번째로 실려 있었다. 북경에서 이수광과 풍극관이 나누었던 시문은 베트남에서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완벽은 학교에서 많은 학생이 이 책을 끼고 유행가처럼 외우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400년 전 이수광의 ‘K-POP’, 아니 ‘K-詩’가 베트남을 강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후 조완벽은 두 차례 더 안남을 오가는 과정에서 여송(呂宋·필리핀)과 유구국(=오키나와) 등도 두루 방문했다.

그렇게 조선 최초의 해외영업 비즈니스맨이 되어 떠돌던 조완벽에게 기적이 발생한다. 조완벽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조건 중의 하나인 포로 송환 과정에서 1607년 7월, 10년 만에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 땅을 밟은 조완벽은 그동안 겪은 생활을 줄줄 읊다가, ‘안남국에 떨친 이수광의 시문’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걸 또 김윤안이라는 사람이 듣고 보니, 정말 신통하기 짝이 없는 터였다. 대뜸 한양 길에 올라 이수광에게 조완벽이 겪은 경험담을 전해주니 이수광은 매우 놀란다. 그리하여 이수광은 이 이야기를 정리하여 본인의 저작인 <지봉유설>에 깨알 같은 자기 자랑질을 담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조완벽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가족과 함께 고향 진주에서 평범한 선비로 살았다고 전한다.

1611년(광해3)에도 이수광은 세자의 관복을 요청하러 북경을 다녀오게 된다. 이때도 이수광은 안남, 유구(오키나와), 섬라(태국)의 사신들과 시문(詩文)을 주고받고 그들의 풍속을 들었다. 이런 경험 등을 토대로 1614년 <지봉유설>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조완벽에 대해 많은 내용을 기술한 이유는 이수광이 포로로 붙잡혀 귀국한 이후,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이수광은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얻어왔다. 이를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 소개해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를 알리고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 북경에서 얼어 죽은 안남국 사신

작은 추위라는 뜻을 지닌 소한(小寒)은 계절을 24개로 나눈 절기 중 하나다. 이름으로만 보면 소한 다음 절기인 대한(大寒) 때가 가장 추워야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소한 무렵이 가장 춥다. 소한 무렵은 정초 한파(正初寒波)라 불릴 정도로 강추위가 몰려오는 시기다.

소한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소한의 추위는 꿔다 가도 한다”라는 말이 전한다. 보통 소한이 가장 추울 때라서 소한 때만 되면 추워진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등이 있다.

소한 추위가 그만큼 매섭다는 뜻을 담고 있는 속담들이다. 그러나 1796년 대한 때는 나무가 얼어 죽을 정도로 추웠나 보다. 그 해 실록에는 이상한 기록이 같이 붙어 있다.

“대한(大寒)에 나무가 많이 얼어 죽었다. 뒤에 중국인이 전한 말을 들으니 온 천하가 같은 날 다 이렇게 되었고, 안남국의 사신은 북경에서 얼어 죽었다고 한다.” <1796년(정조20) 1월 10일>

베트남의 사신이 북경에서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같이 실려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설마 청나라 정부에서 안남국 사신이 자는 방에 불도 안 때 줬을 리는 없다.

베트남 사신이 과음해서 길거리에서 뻗어 자다가 얼어 죽었을까? 아니면 따뜻한 남쪽 사람들이라 무서울 정도로 추운 북경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관련 그 무렵 안남국의 풍속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이수광이 1597년(선조30) 처음 북경에 갔을 때, 안남 사신 풍극관과의 문답록인 <안남사신창화록>에 실려있다.

“안남국 사신 풍극관의 나이는 70살이 넘었는데, 겉모습이 매우 괴이했다. 그는 이가 검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조회 때는 머리카락을 땋아서 망건을 쓰고, 복식을 갖춰 입고 입궐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귀찮은 듯 곧장 벗어 버렸다. 그는 늙었기는 하나, 상당히 정력이 있어 독서를 쉬지 않았다.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은 대부분 짧은 옷에 맨발로, 비록 겨울이라도 버선을 신지 않는다. 그리고 침대를 사용하고 음식은 중국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으나 약간 불결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무늬가 없었다. 인상은 얼굴이 짧고, 눈이 우묵하고 성질은 온순했다. 그리고 검을 쓰는 것도 좋아하나, 그 방법이 다른데 좀처럼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수광의 관찰한 바로는, 사신의 수행원들은 한겨울에도 버선도 없이 다녔다는 것이다. 여하튼 베트남 사신이 북경에서 얼어 죽은 것까지 어디서 듣고 적어놓은 조선왕조실록은 참 대단하다. 진정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의 힘이 느껴진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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