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된다. 이유인즉 전리품으로 얻은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빼앗아 간 때문이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철수한다. 전세는 금세 불리해진다. 헬라스연합군(그리스군)은 트로이군에게 연일 대패한다. 결국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사과하고 브리세이스를 돌려준다. 그런데 이때 아가맴논이 하는 말이 재미있다. 브리세이스를 빼앗아간 것은 자신이 아니고 신들이 한 짓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소유의 뭔가를 훔친 후, “그건 신이 한 짓이야. 나를 탓하지 말고 신을 탓해야 돼”, 라고 한다면 매우 열 받을 것이다. 뭐? 신이 한 짓이라고? 당장 언성을 높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인들은 그 말에 수긍한다. 본인들도 그렇게 말하니까. 브리세이스를 돌려받은 아킬레우스는 다시 용맹을 떨치고 헬라스연합군은 승리한다. (여성의 운명이란 참 가혹하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에게 인간의 특성을 투사해놓고, 신 핑계를 되며 신과 함께 재미있고 신비롭게 살았다. 재미있고 신비하다는 것은 지금 나의 관점에서 그렇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와! 이건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냐! 누군가, 어떤 신이 도와 준 게 분명해!’ 혹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래 이건 하늘의 뜻 일거야’ 라고 말하며 자기를 추스른 경험. 이때 그리스인들은 신들이 나에게 다녀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 신들은 사랑 충만, 절대 선, 근엄, 자비, 성령 충만 같은 말로 표현되는 기독교 신과는 딴판이다. 제우스는 바람둥이이다. 아내 헤라를 따돌리고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추문도 그런 추문이 없다. 여신이든, 인간의 여자든 ‘닥치는 대로’ 사랑행각을 벌인다. 그런가 하면 불행의 신, 전쟁의 신, 질투의 신, 운명의 신, 정의의 신, 사랑의 신... 온갖 것이 신이었다. 이 신들은 선은커녕 악행을 꺼리지 않으며, 인간의 불운을 재미있게 관람한다. 니체는 ‘트로이 전쟁이 신이라는 관람객의 재미를 위해 벌어진 전쟁’이라고 말한다. 신들이 장난기 심한 악동이거나,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의 전형, 혹은 잔인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들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종종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인간의 집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기도 한다. 이때 신들은 인간과 대화도 나누고, 충고도 해준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다보면 그리스인들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풍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낯모르는 나그네가 찾아오면 기꺼이 집에 들어오게 하고 잘 대접한다. 이 나그네가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리스 신들에게서는 그리스도교나 여타 종교의 신에게서 느껴지는 위엄이나 자비 같은 관념의 표상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인간들은 자신이 실수를 하거나, 죄를 저질렀을 때 신이 부추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끄덕, 수긍했다는 점이다. 그건 내가 아니고 신이 한짓이야!, 라고 하면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라고 그 말을 믿어준다.

이렇게 명랑 쾌활하고, 욕망과 복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는 신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던 시대가 고대 그리스 시대였다. 특히 제우스는 황금비가 되어, 탑속에 갇힌 여인에게 스며들기도 하고, 황소가 되기도 하고, 백조가 되기도 하면서 자신의 ‘연애사업’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아내 헤라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역시 온갖 해코지를 한다. 막장 드라마의 경계를 한참 넘어서는 수준이다. 이것이 그리스 신들 중 최고신 제우스와 그 부인 헤라의 모습이다.

니체는 이런 그리스 신과 대비되는 곳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본다. 그리스도교신은 그리스인들의 신과는 너무나 다르다. 니체는 신에 대한 부채이론에서 인간의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찾는다.

양심의 가책을 병으로 보는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조상에 대해 부채감을 지닌다고 한다. 조상이나 부족신이 종족을 보호해주며, 조상의 희생과 공헌으로 자기 종족이 번성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부채감은 훗날 조상이 신으로 변형되어 마침내 신에 대한 부채감으로 발전한다. 이 부채감은 ‘나를, 우리를 보호 해주는’ 조상에 대한 공포로 발전하는데 공동체가 몰락한 후에도 조상에 대한 혹은 신적인 것에 대한 부채감과 외경심은 남게 된다. 신에 대한 이 채무감은, 인간이 신에 대해 부채를 상환할 수 없다는 사실의 깨달음으로 나간다. 결국 인간은 부채를 해결하지 못했음으로 죄인이며, 죄인은 벌 받아야 하며,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 된다. 신에게 부채를 갚지 못한 죄인의 관념, 이 양심의 가책은 그리스도교에 와서 영원히 부채 상환이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의 제물이 됨으로써, 즉 신이 인간을 위해 부채를 상환함으로써 인간은 부채를 갚을 길이 막혀버린다.

자신의 죄를 신의 탓으로 돌리며 쾌활하게 살던 그리스인과는 달리 기독교에서 인간은 심각한 중죄인이다. 요즘도 성당에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자기 고백을 한다. 인간은 죄인이다!

“- 마침내 우리는 고통 받는 인간이 일시적으로 위안을 찾은 역설적이고 무시무시한 방책인 저 그리스도교의 천재적 장난 앞에 갑자기 서게 된 것이다: 즉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다. 신 스스로가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지불한다. 신이란 인간이 상환할 수 없게 된 것을 인간에게서 벗어나 상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사랑에서 이것을 믿어야 할까?, 자신의 채무자에 대한 사랑에서, 채권자가 자신의 채무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 중

예수의 대속으로 인간은 ‘영원한’ 죄인이 된 것이다. 죄 값의 상환은 불가능하다. 해서 영원한 죄인인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신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의 신 앞에서 빚진 자이며 죄인인 인간. 반면 그리스 신들은 그리스인들의 죄의 책임을 떠맡는다. “우리 신들이 너를 꾀어서 잠시 나쁜 짓을 하게 했네!” 니체는 인간의 죄를 떠맡는 그리스 신을 고귀한 신이라고 말한다.

“네 빚을 내가 대신 갚아줬으니 이제 너는 나한테 빚을 진 채무자다!” “너는 영원한 죄인이다”라는 것과 “네가 죄 지은 것은 네 탓이 아니고 내가 너를 부추긴 때문이야. 오! 미안!”의 뉘앙스의 차이를 생각해보시라!

나의 잘못을 신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과 나의 잘못에 대해 심판을 위협하며 평생 자기 종노릇하라고 하는 것의 차이. 그리스도교신이 인간의 죄를 신 자신의 권능으로 사함 받도록 해주었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니체는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히브릭스, 즉 오만을 경계했다. 필멸의 인간으로서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엄숙하고 공포스럽고 무시무시한 ‘사랑의 신’인 그리스도교 신과는 한참 다른 유쾌한 신들과 함께 살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이 비루한 인간이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귀한 인간들이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호메로스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은 ‘신과 같은’ 종족들이다. 이 그리스인의 자유민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 오뒷세우스, 아가맴논...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주인도덕의 주인종족들이다.

주인도덕의 주인과 노예도덕의 노예의 결정적인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종족은 이 생성의 삶을 긍정하는 자들이다. 영원한 저 세계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단 한번 뿐이 필멸의 삶을 용감하게 주인으로 산다. 노예도덕의 종족이 저 세계를 바라보며, 자기를 죄인취급하며, 양심의 가책과 부채감에 휘둘려 병든 삶을 산다면 주인종족은 삶과 세계와 자신을 긍정하며, 비루하지 않게 산다.

이들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놓는다.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에 나가면서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여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정부(情夫)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을 죽인다.

아무튼 니체는 인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저 세상을 위해, 이 세상의 삶을 폄하하는, 그리스도교 사제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한번뿐인 이 생성의 삶을 긍정하는가? 니체에게는 단지 이 덧없는 삶만이 있다. 부질없고 덧없는 것들에 대한 긍정, 그리고 사랑.

삶, 추악하고 아름답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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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은 매주 첫째주 화요일에 개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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