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드라마 <스카이 케슬>을 재미있게 보았다. 플롯을 어찌 그리 절묘하게 짰을까? 거듭되는 반전과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들. 스카이 케슬에 살면 나도 저렇게 될까? 3대째 의료인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게다. 3대째 서울대 가고 싶은 욕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저 정도까지? 문득 생각했다. 저들에게 물어보면 인간은 평등할까?

인간은 평등한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질문 하는 자를 의심할 것이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왜 하지? 인간 평등이라는 이 단순한 가치를 위해 인류는 수많은 세월동안 무수한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인간은 평등한가?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더 우월한 존재인가? 지배 계층은 더 우월한 종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 지도층이 아니라 사회 위화감 조성층이겠지? 라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리스같은 소리 그만 하시지요!라고. 종종 우리 사회 상류층의 행태를 보면 보통사람보다 문제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이다. 그들의 지위가 그들을 천박하게 만드는 것일까? 양진호 회장, 대한항공 일가족, 인분교수, 장군의 부인 등등은 우리 사회 상류계층의 적나라한 얼굴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 <스카이 케슬>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우리 사회의 상위계층들은 자신들과 그 외의 사람들을 다르게 보는 것 같다. 그들에게 인간은 평등한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형식적으로야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한다. 이들의 행태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같은 현상은, 니체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이 ‘천민’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원한의 노예인간이 지배자입네 하고 설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실은 니체적 의미의 원한의 인간-약자-무리동물인 것이다. 역사는 이런 정신적 ‘천민’이 지배계층이 되어서 온갖 추태를 부린 사실의 기록물이다. 이들 천민은 스스로를 교양인,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면서 보통사람들을 얕잡아 본다. 모든 것을 돈과 권력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이다. 이들은 니체적 의미의 노예 종족이며 인간 말종이다. 이들 약자들에 의해 세계는 운행되었고 때문에 지금 이 세계가 이토록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니체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위의 사례들은 니체적 의미의 약자가 지배계급이 되었을 때의 폐해를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일까? 나는 좀 달랐을까? 손가락질하고 비난하지만 자리가 뒤바뀌었을 때 나의 처신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인간평등’이란 언표는 의미 없는 정언명법일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현실에서는 평등하지 않다. 상류층의 천박한 품성은 인간이 평등하지 않고 평등할 수 없다고 웅변한다.

니체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니체에게 물어본다면 니체 역시 호기롭게 평등하지 않다고 말 할 것이다. 니체는 계산하고 유.불리를 따지는 이성을 혐오한다. 니체는 겉치레 허언이나 가식을 보기 좋게 내팽개치고서, 평등 운운하는 인간을 비웃을 것이 분명하다. 니체는 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했을까?

“나는 프랑스 혁명에 내재해 있는 루소도 증오한다: 그 혁명은 이상주의와 천민이라는 루소식 이중성에 대한 세계사적 표현이다. 그 혁명이 수행시켰던 잔인한 광대극, 그것의 ‘비도덕주의’에 대해서는 나는 관심 없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그 혁명의 루소적인 도덕이다. -혁명이 계속 영향을 끼치게 만들고, 모든 천박하고 평균적인 것들을 설득해대는 소위 말하는 혁명의 ‘진리’라는 것이다. 평등선언이라니! ... 이것보다 더 유해한 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의 종말이었던 그것이 심지어는 정의를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동등한 자에게는 동등을, 동등하지 않은 자에게는 동등하지 않음을-정의에 대한 진정한 표현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동등하지 않은 자를 결코 동등하게 만들지 말라”-평등선언을 둘러싸고 그토록 끔찍하고도 잔인하게 일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그런 ... ”

-니체, <우상의 황혼 48>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니체의 솔직함이 놀랍다. 니체라는 사람은 세상 눈치 보지 않는다. 스스로 당대의 지성은 물론 사회전체로부터 고립을 선택했고, 자신의 철학적 사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두려하지 않았다. 위험한 사상을 위험한 방식으로 주장하면서 자신에게 올 고통을 즐거이 감당했다. 때문일까? 그는 살아생전 힘든 나날을 보냈다.

“동등한 자에게는 동등을, 동등하지 않은 자에게는 동등하지 않음을.” 이 문장이 정의에 대한 진정한 표현이라는 니체의 주장이 무얼 의미하나? 니체의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생각해 보자. 니체에게 주인과 노예는 계급으로서 고착된 무엇이 아니다. 그가 주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노예의 삶을 자처하고 있는가? 그 여부에 따라서 언제든지 주인과 노예는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은 고귀한 존재다. 주인은 당대의 ‘비인간화 되어가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극복하려는 존재이다. <천경의 니체읽기 “주인도덕 노예도덕”편 참조 > 그러나 노예는 말하자면 갑질하는 상류층들, <스카이 케슬>의 주인공들, 즉 하늘의 성에 살고 있는 ‘최고의’ 인간들, 그러나 타인의 눈에 휘둘리는 자들, 빈곤한 내면을 돌보지도 노력하지도 않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노력이란 현실적 성공과 출세를 위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고자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니체는 단호하다. 고귀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 평등을 외쳐대는 꼴이 아주 못마땅한 니체 선생이시다. 니체는 점잖게 인간은 평등하지,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라고 말하는 자들의 위선에 구토를 느낀다. 니체는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위비멘쉬에 속한 자들 사이에서의 평등한 인정한다. 니체는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우리에게 ‘강권’한다. ‘제발’ 인간 말종을 딛고 위버멘쉬로 살라고 말한다. 니체가 루소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면서 무엇보다 인간평등을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괴테는 강하고, 고도로 도야되고, 모든 육체적인 일에 능숙하며, 자기 자신을 억누르며, 자기 자신에게 경외심을 품는 인간을 구상했다. 자연의 범위와 풍요로움 전체를 자신에게 감히 허용해도 되는 인간, 이런 자유를 누릴 만큼 충분히 강한 인간: (...,) 약해서가 아니라 강하기에 관용적인 인간: 악덕이라 불리든 미덕이라 불리든 이런 허약성만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금지되지 않는 인간을...그런 자유로워진 정신은 즐겁고 신뢰가 가는 숙명론을 겸비한 채 우주 한가운데 서 있다.”-니체 <같은 책 49>

‘강하기에 관용하는’ 인간은 ‘자유를 누릴 만큼 충분히’ 강하다. 니체는 약자가 약함을 무기로 강자를 끌어내려 ‘평균화 대중화’시키는 현상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상류층의 갑질 범죄는 이들이 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강자는 스카이케슬의 주인공들과 같은 마음을 품지 않는다. 양진호씨나 대한항공 가족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이들은 니체의 의미에서 전형적인 약자들, 노예정신의 인간들이다. 돈의 힘 위에 올라타서 세상을 매수하고 위세를 부린 것에 불과하다. 강자의 외피들 쓴 약자들이다.

인간은 평등한가? 그럼에도 나는 인간은 평등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강자가 못될 것이라는 불안감의 반영일까? 아무튼 나는 노력하는 인간이든, 교활한 인간이든, 갑질하는 인간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그가 인간인 한 법과 삶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권리와 존엄함에서 평등하게 대접받고 평등한 처우를 받아야 하니까. 그런데 문득,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인간인 한’이라는 나의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함’이란 또 무엇일까? ‘인간인 한’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할까? 나는 다르게 말하고 싶다고 느낀다. 아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 문장을 다시 쓴다. 노력하는 인간이든, 갑질하는 인간이든, 히틀러든, 네로든, 강아지든, 돼지든, 소든, 새든, 염소든 평등해야 하고 평등의 원리에 의해 고려돼야 한다고. 세상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평등이란 무엇일까? 교과적으로 말하면 신분, 지위 고하, 성별, 재산 등등에 관계없이 인간의 가치는 동등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평등이란 인간종에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물 해방>의 저자인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평등이 “어떤 존재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도덕적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이라면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혹은 어떤 능력이 동물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동물과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게 된다. 인간적인 어떤 특징의 질과 양, 또는 능력 여부로 평등을 논한다면 인간종 내부에서 인간성원들이 평등하다고 주장할 수 없지 않겠는가? 대한항공 조현아와 가난한 내가 평등할 수 없고, 나와 정신지체 장애인이 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우월주의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진술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함’이란 무엇일까? 그 근거가 무엇인가? 없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선험적으로 존엄한 존재야! 동물보다 훨씬 존엄한 존재지! 라는 논변의 근거를 다시 물어 보자! 결국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느님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위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기독교 신앙, 하느님에 의해 우리는 존엄한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에게 패악을 부릴 권리가 부여된다고 믿어왔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인간종인 내가 개나 돼지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인간의 관점이 아닌 우주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보다 내가 나은 존재일까? 알 수 없다. 그저 영리하고 힘 있는 지배자로서 인간은 자신의 특징들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해서 동물보다 인간이 우선 고려대상이 되어야 하고,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고, 지배하고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인간과 동물이 고통과 쾌락 앞에 평등하며 각각의 이익에 대해 동등한 고려를 해야 한다면, 우리가 동물을 마음대로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을 수 없듯이 말이다. 사실 인간도 동물의 범주에 속한다.) 고통과 쾌락을 인간과 유사하게 느끼는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지능 지수나 자아감 등이 낮은 정신 장애인이나 식물인간, 그들의 이익을, 그들의 고통을 인간일반과 동등하게 다루어야 하듯이 동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문득 내 안에 저항이 생긴다. 자연의 생태계가 그러하지 않는가? 약육강식! 그것이 자연의 질서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이신가? 동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채식을 해야 한다고? 자연의 구조가 그렇고 동물들도 약한 동물 잡아먹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싱어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동물은 동물을 먹지 않고 사는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먹거리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 죽이고 전쟁하도록 생겨먹었지만 조절하고 살고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르는 불평등하고 잔인한 온갖 행태를 중단해야 하고 채식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여기서 장황하게 논의하지는 않기로 한다. 다만 나는 인간이 자연 안에서 평등의 원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또한 원리적으로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 평등해야 하고, 살아 펄쩍펄쩍 뛰며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게 함부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해서 먹거리를 위한 최소한의 고통만을 동물에게 가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의 일부로서 우주적으로 볼 때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완전한 채식을 내가 실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이것은 나의 위선적인. 혹은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머리로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고 복잡하고 번거롭다. 나의 식탁을 바로 바꿀 용기가 없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지점으로 변하기를 내가 나에게 기대해 본다.)

인간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너무 멀리 왔다. 어쨌거나 니체에게 물어본다면 니체는 위버멘쉬와 인간말종과 동물이 각각 다른 존재의 위계를 갖는다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는 무엇에게든 ‘평등하게 배려하기를 요구’하는 싱어의 도덕적 전제를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고 본다. 싱어는 ‘평등은 도덕적 이념이지 사실에 관한 단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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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은 매주 첫째주 화요일에 개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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