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imagination)은 형상을 그려 본다는 뜻. ‘상상(想像)’이라는 말은 원래 ‘상상(想象)’이었다. 오래전 중국 황하 주변에도 코끼리가 살았다. 점차 기온이 떨어지고, 귀한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들을 살육하면서 점차 인간의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코끼리를 볼 수 없으니, 뼈만 가지고 코끼리 형상을 그렸다. ‘상상’이란 코끼리 뼈만 가지고 머릿속으로 그려 내는 행위였던 것. 중국 환경사를 다룬 <코끼리의 후퇴>라는 책에서도 나온다. 4000년 전만 해도 북경을 포함한 중국 전 지역에 코끼리가 살았는데, 점점 남하해서 이제는 윈난성 일부에만 볼 수 있다.

한때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라는 썰렁 개그가 유행했다. 직업별, 전공별, 대통령 통치 스타일별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다. 그중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갑’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을’에게 시킨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모자 그림에서도 상상력의 프레임을 테스트할 수 있다. 어른들은 대부분 모자라고 대답한다. 반면 어린 왕자는 보아 뱀이 코끼리를 삼킨 것이라고 말한다.

‘옳다’와 ‘틀렸다’는 ‘다르다’와 다른 의미다. 모자 그림의 해석을 두고 어른들의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의미는 될 수 있을지언정, 어린 왕자의 주장이 맞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뭣이 중한가? 가장 중요한 거는 고정 관념을 뛰어넘는 열린 마음이다.

■ 조선 태종 때 귀양간 코끼리의 출신지를 찾아

1500년 전 제작된 백제 금동대향로 몸통에는 코끼리·원숭이·악어·사자 등을 표현했다. 그 시절 백제의 코끼리는 어디서 왔을까? 백제의 장인은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만으로 그려냈을까? ‘양직공도’에서 볼 수 있듯 백제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다. 인도의 아시아 코끼리보다는 양자강 남쪽에서 살던 코끼리가 백제 시대에 선물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목화자단기국’ 바둑판에도 코끼리·낙타·공작새 모습 등을 새겼다. 윗면은 상아를 이용해 세밀하게 줄을 쳤다. 백제 사람들이 코끼리나 악어, 낙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1413년 조선 태종 때 관리를 밟아 죽인 혐의로 순천 장도(노루 섬)로 유배당한 기구한 운명의 코끼리가 있었다. 이 코끼리는 애당초 1408년 ‘항국’ 국왕이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실권자였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보낸 외교 선물이었다.

일본은 요시미쓰의 죽음으로 코끼리를 3년 묵혔다. 더구나 불교에서 신성시한 흰색 코끼리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 시절 돌려 막기 식으로 다시 조선에 선물했다. 코끼리를 보내고 대장경을 얻어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실록에는 일왕 ‘원의지(源義持)’가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일왕은 ‘천황’(덴노)이 아니고 쇼군이다.

그럼 ‘항국’(港國)은 과연 어디인가? 오늘날 말라카 해협을 관할한 인도네시아를 일컫는다. 코끼리를 일본에 보낸 1408년 무렵 ‘항국’은 조와국, 즉 ‘마자빠힛’ 왕국이다. 시기적으로 따져보면, 태국 아유타야 왕조 무역사절 장사도와 ‘마자빠힛’ 왕국의 진언상이 조선과 일본을 드나들 때와 딱 맞는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팔렘방(舊港)을 수도로 둔 스리위자야 왕국은 1377년에 멸망했다. 팔렘방은 2018년 아시안게임 개최지이기도 하다. 태종 시절 그 코끼리는 조와국, 즉 마자빠힛 왕이 일본에 보낸 선물로 추정된다.

일본 측 자료도 정확한 게 없다. 아마 무역상 진언상이 무로마치 막부와의 교섭을 위한 선물로 가져왔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에는 조선으로 올 코끼리가 목적지가 변경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 태종 때 애물단지 ‘살인 코끼리’… 조선 왕조 최초의 동물 재판 주인공

1411년 2월, 조선에 들어온 코끼리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궁궐 한 쪽 사복시에서 말과 같이 사육됐다. 게다가 이듬해 공조 전서(지금의 국토부 장관)를 지낸 ‘이우’가 코끼리에게 짓밟혀 죽은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코끼리를 놀리며 구경하다가 침을 뱉는 등 심한 스트레스를 줬기 때문. 화가 난 코끼리는 그를 밟아 죽였다

살인범이 된 코끼리는 태종과 세종에 걸쳐 조선 왕조 최초의 동물 재판 주인공이 됐다. 재판 결과(?), 1413년(태종13) 11월 전라도 순천의 장도(노루 섬)에 귀양 보내졌다. 작은 섬에 코끼리가 좋아하는 먹이가 얼마나 있겠나 싶다.

코끼리는 점점 말라갔다. 사람을 보면 눈물까지 흘렸다. 이 소식을 접한 태종은 매우 가엽게 여겼다. 6개월 만에 다시 코끼리를 전라도 육지로 불러들여 절대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지시했다.

졸지에 코끼리를 떠안게 된 전라도 관찰사는 1420년(세종2) 보고서를 올렸다. 태종의 뜻을 받아 잘 키워 보려 했으나 하루에 100㎏이 넘는 귀한 식량을 축내는 데다, 매우 위험하기까지 한 코끼리를 전라도 혼자서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다는 거였다. 전라도에서 이미 6년 이상이나 키웠으니,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서로 돌려가며 키우게 해달라는 거였다.

세종은 코끼리를 충청도로 올려 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코끼리는 공주에서 또다시 사람을 해치고 말았다. 1421년 3월, 충청도 관찰사는 세종에게 ‘연쇄 살인 코끼리’를 섬에 유배시키길 간청했다. 결국 그 코끼리는 10년 동안 ‘2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2번 유배’ 가서 생을 마쳤다.

연산군은 재위 10년 차 시절, 코끼리 발과 무소뿔을 대궐에 들이라고 어명을 내렸다. 외국에서 사서라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연산군이 왜 코끼리 발을 탐냈는지는 기록에 없다.

■ 수양대군과 봉림대군에게 절한 북경의 코끼리

1637년 청 태종 홍타이지는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략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300여 명을 심양에 인질로 끌고 갔다. 백사 이항복의 9세손이자 19세기 관리였던 이유원은 1814년(순조14)에 태어나 1888년(고종25)에 죽었다. 그는 만년에 쓴 『임하필기(林下筆記)』라는 저서에서 봉림대군과 코끼리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었다.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 볼모 시절, 어느 날 북경에 들어갔다. 코끼리 우리 앞을 지나는데 별안간 코끼리가 절을 하는 게 아닌가! 가만히 있던 코끼리가 절을 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행태가 더 기이했다. 처음에는 두 무릎을 모두 꿇으려 했는데, 아차! 싶더니 급히 한 무릎만 꿇었다.

봉림대군 일행이 거처로 돌아와 주위에 물으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왕의 기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디 코끼리는 영특한 짐승이니 천자를 보면 두 무릎을 꿇습니다. 조선의 왕자께서 그 기운이 비범해 코끼리가 잠시 혼동한 듯합니다. 하지만 천자와 제후의 관계는 고금의 예이니, 코끼리가 결국 제후에게 하듯 한 무릎만 꿇은 것입니다.”

코끼리가 절했다는 것은 ‘잘 훈련된’ 코끼리로 추측된다. 조련사가 얼마나 잘 길들였는지 춤은 물론이고, 마음껏 묘기를 부리는 코끼리였다. 이유원은 “코끼리를 춤추게 할 때 마음대로 재주를 부리게 하였으되, 내어 놓는 돈의 다소에 따랐으니, 이 또한 세상 풍속이 나빠진 탓이다.”라고 적었다. 코끼리의 개인기 대 방출은 입금 금액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이유원은 1845년(헌종11) 동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봤지만 <열하일기>를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봉림대군이 귀국한 게 1645년 5월이다. 그로부터 135년이 지난 후, 연암 박지원은 코끼리 조련사 주머니에 관람료가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코끼리를 봤다. 그때 북경의 코끼리들도 무릎을 꿇고 절을 했으니까 말이다.

이유원에 앞서 1828년(순조28)에 동지사로 북경에 간 박사호 또한 봉림대군(효종)에게 절한 코끼리와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코끼리는 천자를 보면 두 무릎을 꿇고, 제후 왕을 보면 한쪽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세조대왕이 수양대군 시절 연경에 들어갔더니, 8마리의 코끼리가 모두 절하면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라는 세속의 전언을 소개했다.

이때 명나라 코끼리는 봉건질서를 통해 사람을 가렸지만, 나중에 청나라 때 코끼리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돈’에 의해 사람을 가린 것 같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코끼리가 영험한 동물이라는 인식이 민간에까지 전승되자, 군주로서 위엄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동물원(창경원)으로 전락

창경궁은 성종이 즉위 15년(1484)에, 당시 생존했던 선왕 세조·덕종·예종의 비(妃)인 정희·소혜·안순왕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을 시초로 한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탄 뒤 다시 지어져 조선 후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됐다.

여러 왕이 창경궁에서 태어났으며 취선당에서 주로 살았던 장희빈이 처형을 당한 곳도 창경궁이다.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다음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여드레 동안이나 두어 죽게 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일제는 전각을 헐어버리고 진귀한 동물과 식물들을 방방곡곡에서 채집해서 옮겨 놓고, 일본에서 벚꽃 나무 수천 그루를 날라다 심었다. 궁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원(苑)은 사냥이나 놀이를 즐기는 곳이니 궁궐을 유원지로 격하시켜버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이라며 창경원의 문을 연 것은 1909년 11월 1일이었다.

창경궁이 동물원이던 시절, 1960~70년대 ‘창경원 동물원 구경’은 모든 국민의 로망이었다. 단연코 최고 인기 스타는 집채만 한 코끼리. 처음 코끼리를 본 느낌은 단순히 ‘크다’ 그 이상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봉한 인도 영화 ‘신상(神象)’은 주제음악(OST)와 함께 흥행에도 성공했다. 주인공 코끼리 ‘라무’의 기억이 선명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창경원으로 몰려들었다.

조선 태종 때 들어온 코끼리는 전국을 전전하다가 귀양 가서 죽었지만, 1912년 한반도에 비로소 두 번째 코끼리가 들어온다. 500년 만에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는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상상의 꿈’을 심어주고, 국민 행복지수를 높여줬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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