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 동쪽은 ‘말들의 땅’이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馬)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고려 시대 버전인가. 동대문과 아차산 사이에는 말을 키우고 군인들이 기병 전술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면목동이나 성동구 마조로, 전곶(箭串·살곶이)교, 마장동, 자양동 등은 모두 국영목장 때문에 유래한 지명. 이 일대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인 행당산에는 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단 등 제단이 있었다. 태종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다리 중 가장 큰 살곶이 다리(76m)을 지나 한강변으로 매사냥을 다녔다.

광진구 자양동은 원래 ‘자마장리’에서 자양동으로 전음됐다. 조선 개국 초 말 1천 마리를 기르면, 용마가 난다는 전설에 따라 암컷 말을 기르기 시작했다. 2015년 자양 1동 주민센터 앞에는 암말 동상(자마상·雌馬像)을 세웠다. 건국대학교가 축산대학으로 시작한 이유도 지역과 관련 깊다. 말의 질병을 치료·예방하는 시설과 전문 인력이 있었던 전통에서 비롯됐다.

말은 전 세계에서 기른다. 기원전 5,000년을 전후해 아시아(카자흐스탄)에서 최초로 키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말젖과 고기를 먹기 위해 말을 가축화했다. 곧,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전략 물자가 됐다. 지금의 경운기에서부터 자동차, 탱크 역할까지 모두 맡았다.

일률단위인 마력은 말로부터 생겨난 말이다. 영국에서 처음 생겨난 마력은 당시 말 한 마리가 할 수 있는 일률의 마력으로 표현했다. 현재까지도 특히 차의 힘을 나타내는 용어로 마력을 많이 사용한다.

산업화 이전의 말 육성은 주로 국가가 주도했다. 국가는 말이 부족할 경우 필요한 만큼 징발하거나 구매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렇다. 고려 원나라 간섭기, 원·명 교체기, 조선 초기, 임진왜란은 말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 조선 초기는 최고의 준마를 생산

우리 조상은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에서 명마가 나고, 고구려 말은 몸집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 말은 삼국시대 이래 생태적으로 키가 ‘3척(90cm)’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말을 타고서도 능히 과실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다는 ‘과하마(果下馬)’ 같은 작은 조랑말이 주종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몽골 계통의 말이 적지 않게 전래되면서 다소 체격이 큰 중형 말들이 생산됐다. 조선 초 국가에서 키우던 말의 합계는 1~2만 필 사이였다. 개인이 사육한 말을 모두 합해 3만 필을 넘지 않았다.

국영 목장에는 수시로 호랑이와 표범이 침입해 소나 말을 상하게 했다. 그러자 의정부 녹양 목장 등 호환이 심한 곳은 폐쇄하고 해안가나 섬 위주로 목장을 운영했다. 강화도와 진도, 도련포, 마응도, 두원태 목장 등이 유명했다.

조선 초기에는 우수한 전마(戰馬)들이 조공 무역을 차지했다. 조선 중기까지 매년 수백에서 수천 필의 말을 명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중국에서 호마(胡馬)라 불리는 체격이 큰 말을 수입했다. 기존 조선말과 교배해 우수한 말을 생산했다.

세종은 국가에서 키우던 군마들을 군사들에게 나눠 주어 키웠다. 전시에는 언제든지 징발할 수 있도록 했다. 1445년(세종) 5월 28일, 실록 기록에 따르면 제주의 9792필을 포함해 국가 전체에 약 2만 2406필의 말이 있었다.

제주마를 비롯한 공출은 대부분 수말 위주. 제주의 암말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오랫동안 관습화했다. 때문에 우수한 형질의 수말들이 유출되어, 좋은 말의 유전이 이루지 못한 잘못을 범했다. 게다가 북방민족과 호마 무역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품종개량을 할 수가 없었다.

연산군은 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 연산 4년에는 함경도 지방의 호마에 관심이 많아 구해오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말을 고를 땐 몸집이 작더라도, 길이 잘 든 말을 원했다.

중종은 어승마에서 낙마를 하자, 화가 나서 관련자들을 크게 벌했다. 명종은 어려서부터 승마를 즐겼다. 말의 상태와 좋고 나쁨을 잘 구별했고, 말 타고 달리기를 좋아했다.

■ 조선 최고의 말테우리(목축 전문가) 제주도 김만일

조선 시대에는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거나 관리들의 사행, 운수 등을 뒷받침하는 장소로 ‘역참’이란 게 있었다. ‘한참’은 원래 역참과 역참 사이의 한 단위 거리에서 유래했다. ‘한참 쉬었다.’, ‘한참을 바라봤다’, ‘한참을 기다렸다.’ 등 일정한 시간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역참과 역참 사이의 한참을 역마를 이용해 달리다 보니 시간도 걸렸을 것이고, 시계가 없던 시절엔 시간을 대용하는 말로 한참이 사용됐다.

‘말(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제주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은 말의 수가 전쟁 이전의 1/10로 감소됐다. 남은 말들도 피골이 상접해 군마나 역마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612년(광해4) 제주의 김만일이라는 사람이 키우는 말이 만여 필에 달한다는 보고가 임금에게 전해진다. 1640년(인조18) 12월 1일 실록에 따르면, 제주도 국영목장에서 9314필, 전국 역마 3274필을 모두 합쳐서 1만 2588필이 있었다.

김만일은 언필칭 1만 필에는 못 미치지만, 상당수 말을 사육했던 것 같다. 세종 때와 비교하면, 제주의 사육 두수는 크게 변함이 없으나, 잇단 전란의 여파로 육지의 말은 남아나지 않았다. 김만일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에도 말 500필을 국가에 헌납했다. 광해군을 거쳐 인조에 이르기까지 총 1300필을 조정에 올려 보냈다.

서귀포 한라산 일대의 넓은 땅을 목장으로 제공하고, 대신에 우수한 말을 정기적으로 진상한 것이다. 그 공로로 광해는 김만일에게 종 2품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제수하고, 인조는 종 1품 숭정대부에 봉했다. 제주 출신으로 최고의 관직에 오른 그는 조선 최고 말테우리(목축 전문가)였다.

정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재래 말의 품종이 더욱 작고 쓸모가 없어져서인지 북방의 말(호마)을 수입해 개량을 시도했다. 1798년(정조22) 무렵 국가가 기르던 총 말의 숫자가 7,367필로 적어지고, 정조 사후 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다. 정조 이후의 기록에는 아예 마정(馬政)에 대한 언급이 유명무실해졌다.

■ 역사 속의 명마들

위대한 영웅에게는 명마가 있었다. 그들의 발이 되어 평생을 함께 달렸다. <삼국지>에서 제일 유명한 말은 관우의 ‘적토마’. 하루에 천 리를 달리고 온몸이 붉은 명마다. 피부가 얇고, 땀샘이 많아 피 같은 땀을 흘린다는 투르키스탄 지역의 ‘한혈마’라고 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말은 제왕의 탄생을 알리는 신의 매개자로 등장한다. 나라를 세우거나 왕업을 이룰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여 해부로왕은 아들이 없었다. 천신께 제사 지내자, 그가 탄 말이 큰 바위를 향하여 눈물을 흘려 금와왕의 탄생을 알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을 알린 것도 상서로운 흰말이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의 금와왕과 유화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유화부인이 정식 왕비가 아닌 탓에 주몽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왕자들에게 수많은 괴롭힘과 죽음의 위협을 받아 왔다. 이런 주몽에게 금와왕은 말을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은 힘이 좋고 날쌘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만들었다. 느린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주몽이 말의 혀뿌리에 바늘을 박아두었다고 적었다. 금와왕은 보기 좋은 말은 자신이 가져갔고 볼품없어 보였던 말은 주몽에게 하사했다. 나중에 주몽은 그 말을 타고 부여에서 탈출했고, 결국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가장 오래된 재일 동포 이름은 ‘아직기’다. <일본서기>에는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의 명으로 말 2필을 가져와 일왕에게 선물하고 말 사육기술을 전수했다고 기록했다.

삼국시대 김유신이 타던 말은 주인을 잘못 만나 목이 달아났다. 화랑 시절 김유신은 ‘천관녀’와 사랑에 빠졌다. 천관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나라의 제사장, 즉 신녀(神女)였다. 신라 고유 신앙으로 실제 경주에서 ‘천관’이라 적힌 사당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애당초 이루어질 수 없는 아까운 사랑이었다. 충성스러운 그의 말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주인을 천관녀의 집 앞에 내려다 놓는 충심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는 칼을 들어 말의 목을 내리쳤다. 말의 목을 벤 김유신, 그날부터 삼국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여덟 마리의 뛰어난 ‘팔준마’와 함께 했다. 팔준마 덕분에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고 나라까지 세우게 됐다. 8마리의 말 중에서 이성계가 가장 아꼈던 말은 ‘유린청’. 홍건적과의 전투를 비롯해 남원 운봉에서 아기발도가 이끈 왜구를 물리쳤을 때도 함께 했다.

유린청은 전투에서 화살을 3번이나 맞았지만 31년을 살았다. 이성계는 자신과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유린청을 위해 석관을 짜서 묻어줬다. 세종은 <용비어천가>에 팔준마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키고, ‘몽유도원도’를 그렸던 안견에게 팔준도를 그리라고 명했다.

■ 다시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마장 가는 길. 요즘 명마는 전쟁의 승리 대신 일확천금을 가져다준다. 전쟁터 대신 극장과 경마장에서 온갖 명마들이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영화 ‘벤허’의 마차 경주 감동은 경마장 가는 길로 이끌었다.

제목부터 유혹적인 ‘애마부인’ 시리즈는 성적 판타지를 부추겼다. 요즘 몸짱 남자들의 근육을 보고 ‘말 근육’, 단단한 허벅지를 보면 ‘말벅지’라는 별명을 붙인다. 말의 균형 잡히고 튼튼한 근육을 닮았다 하여 사용되는 별명이다.

설령 말을 잘 타지 못해도 권력 가까이에 있다 보면, 명마 구입비로 수만금을 챙길 수 있다. 지금 과천 서울경마공원에는 1500마리 경주마가 있다. 전쟁이 터지면 ‘충무계획’에 따라 경마는 즉각 중단된다. 경주마와 관련 장비들은 군수 물자로 징발된다.

세계 각국의 민족성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자가 신문에 엉뚱한 광고를 냈다. 누구든지 파란 얼룩말 하나를 잡아오면 100만 불을 주겠다는 것. 독일 사람은 도서관에 들어가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영국인은 아프리카 지도를 사고, 사냥 준비를 했다. 프랑스 사람은 얼룩말을 사다 파란 페인트칠을 했다.

일본인은 얼룩말을 사다가 파란 털을 이식시켰다. 스페인 사람은 100만 불은 내 것이라며 술을 마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국 사람은 이렇게 말을 했다. “정말 100만 불을 줄까?” 민족성을 빗댄 농담이지만, 우리 사회는 정말 의심과 불신이 도를 넘는 것 같다.

‘다크호스’의 유래는 경마 용어다. ‘Dark’와 ‘Horse’가 합쳐져서 어두운 말, 즉 말에 대한 정보가 어둠 속에 가려져서 그 능력을 가늠하기 힘든 말을 지칭한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아 의외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요즘은 선거나 스포츠 경기에서 예상외로 힘을 가진 사람이나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인물이나 숨은 실력자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한다.

하 수상한 시절마다 우리는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렸다. 도대체 그 초인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매화 향기 아득한 광야에서 홀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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