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듯 황희는 조선 초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대개 ‘황희 정승’으로 이름과 직위가 합쳐 불린다. 조선 시대 역대 정승을 거친 수많은 인물 가운데, ‘정승’의 대명사처럼 여긴다.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을 합치면 총 24년을 정승 자리에 있었다. 황희는 세종대왕이 승하하기 4개월 전까지 일을 하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 연간은 성군 세종과 황희의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낸 합작품이기도 하다.

황희 정승과 소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황희가 두 마리 소로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 어떤 소가 일을 잘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가 귓속말로 대답했다.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자신이 더 일을 못한다고 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랬다는 것. 황희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함부로 남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개가 빤히 눈을 뜬 채 황희와 마주 보자 “나도 갈 때가 됐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 말고도 황희 정승 설화는 여러 개가 전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공작과 관련한 이야기다.

■ 공작이 거미를 먹고산다고?

황희는 정승을 지냈어도 청백리여서 살기가 빈곤했다. 심지어 그의 장례에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나누어 입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황희가 임종 때, 부인이 살아갈 방책을 마련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는 “공작은 깃털이 화려해도 거미를 먹고 산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족들은 영문을 몰랐다. 그 후 중국에서 공작이 왔는데, 어떤 걸 주어도 안 먹고 굶었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황희가 일렀던 말을 알려줬다. 이 일로 가족들은 가난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

또 다른 버전은 이렇다. 중국에서 조선의 지혜로움을 알아보기 위해 공작새를 보내왔다. 그런데 공작이 무엇을 먹는지 몰라 고민에 빠졌다. 조정에서는 황희의 부인에게 정승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인이 ‘공작은 거미를 먹고 산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리하여 거미를 먹여 공작새를 살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황희 정승 설화에 왜 공작이 등장하는가? 하는 문제다. 수많은 동물을 놔두고서 말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외국서 들여온 공작은 몇 마리 안 된다. 게다가 공작의 먹이로 거미라... 과연 황희 정승은 공작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까?

■ 팩트 체크 ① 공작은 무엇을 먹나?

공작은 주로 나무 열매와 벌레 따위를 먹으며 산다. 곡류, 과일, 풀씨 등도 먹고, 때로는 개구리나 뱀 같은 파충류, 곤충도 잘 먹는다. 닭과 거의 같다. 황희 정승 설화처럼 거미도 먹는다. 설화가 전혀 다른 말은 아닌 듯하다.

거미가 등장한 황희 정승 일화는 “산 사람 입에 설마 거미줄 치랴”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동물 중에는 암컷에 비해 유난히 화려한 수컷이 많다. 닭과 꿩, 원앙도 수컷이 멋진 깃털을 뽐낸다. 대표적인 동물은 공작. 수컷이 꽁지를 펼치면 아름다운 오색 깃털이 부채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공작 꽁지라고 생각하는 깃은 사실 허리에 난 깃털이다. 칠면조의 부채 모양 꼬리도 허리에 나있는 깃털이다. 대부분 수컷 새들은 왜 화려할까? 수컷의 깃털이 길고 무늬가 많으며 선명할수록, 암컷을 유혹하는데 유리하다고 한다.

수컷의 화려한 겉모습은 암컷의 주목을 끌기에 유리하지만, 자칫 천적에게 들키기 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생존력이 높다는 증거가 된다. 천적의 눈에 띄는 모습을 해도 야생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수컷 공작은 화려한 꼬리를 계속 진화시켰다. 흰 공작(백공작)은 알비노가 아니라 공작의 아종이다. 몸이 흰 색인 돌연변이가 아종으로 정착한 형태다.

■ 팩트 체크 ② 수많은 새 중에 왜 하필 공작인가?

공작은 날개가 오색이다. 오행설(五行說)과 관련해 현세에 있는 조류 중 왕좌를 차지한 길조라고 생각했다. 또 이를 흉배에 수놓으면 성군을 모시는 충신이 된다는 뜻이 담겼다.

시대에 따라 흉배는 조금씩 변했지만, 문관 1품 영의정의 흉배에는 공작이나 두루미(학)을 새겼다. 조선조 최장수 영의정(18년) 자리를 차지한 ‘황희=공작’의 이미지가 굳혀졌을 수 있다.

한편 황희 정승과 공작 설화는 불교적 민간 신앙에 바탕을 두고 윤색됐을 가능성도 크다. 1450년(세종32) 1월 22일, 세종이 병이 심해 동대문 밖 효령대군의 집으로 병을 피해 나가 있을 때다. 여러 신하들은 전국의 명산과 사찰에서 세종의 쾌유를 비는 공작재(孔雀齋)를 거행했다.

공작재는 불교의 밀교(密敎)에서 공작명왕(孔雀明王)을 본존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재앙을 없애거나 병마를 덜고, 목숨을 오래 살게 하도록 베푸는 의식이다. 세종 이후에도 ‘공작 명왕경’에 근거한 공작재 등 왕실이 주최한 밀교 법회는 끊이지 않았다.

1452년(문종2) 5월에도 수양 대군이 도승지 강맹경과 더불어 문종의 건강을 비는 공작재를 베풀었다.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1438∼1457)는 단종이 붕어하기 한 달 전 1457년 9월,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혼령의 살(殺)을 맞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횡사했다고 전한다.

그는 죽기 전에 늘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밤새 공작재를 열었다. 1466년(세조12) 9월에도 세조가 병들자 공작재를 올렸다.

■ 공작은 영원불멸의 명의(名醫)이자 의왕(醫王)

인도의 국조(國鳥) 공작은 영원불멸을 상징한다. 불교나 힌두교를 포함해 이슬람교까지 공작을 찬양한다. 하지만 기품 있고 우아한 공작의 외형적 모습보다 공작을 찬양했던 가장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공작이 독이나 독충, 또는 독뱀 등의 천적이며, 이런 해악으로부터 병을 치료할 해독 작용을 가졌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공작이 해독 효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것은 아마도 뱀과 독거미 같은 독충을 쉽게 잡아먹는 데서 기인했을 것이다.

인도에서 공작은 뱀과 천적인 ‘가루다’ 또는 금시조(金翅鳥)와 동일한 역할로 묘사된다. 인도 신화에서 공작은 가루다의 깃털에서 탄생한 길조로 여기는데, 같은 기능을 암시한다.

공작의 이미지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도 초기 베다 시대부터 여러 해독 작용에 공작을 이용해왔다. 인도 전통 의학서에도 해독제 제조에 공작의 쓸개를 사용하는 치료법을 남겼다.

밀교의 주술과 다라니법을 통해 일체의 재난을 제거하는 ‘공작명왕’의 모습에서 후대의 발전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공작이 영원불멸의 명의이자, 의왕인 셈이다. 조선 왕실에서 중병의 치유를 기원하는 공작재를 연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팩트 체크 ③ 황희 정승 시절 조선에 공작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공작’이 있었다. 물론 야생 공작이 아니다. 1406년 외교 선물로 들어온 것. 1406년 조선에 온 공작은 아마 녹색이 짙은 ‘자바 공작’일 것이다.

1406년(태종6) 7월 1일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무역 사절단 ‘진언상’이란 자가 군산 앞 선유도 인근 바다에서 왜구에게 약탈당했다. 그는 지금의 자바를 중심으로 한 ‘조와국’, 즉 ‘마자빠힛’ 왕국의 사신이었는데, 2번째 방문 길에 당한 것이었다. 이미 1394년 태국 무역상 ‘장사도’와 동행해 조선에 왔던 적이 있었다.

1406년 5월 22일, 일행 120명과 자바를 출발한 진언상은 해적을 만나 80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 무역선에 실었던 공작·타조·앵무·잉꼬 등의 진귀한 새와 물품을 몽땅 뺏기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진언상은 태종의 호의로 옷과 신발, 소형 선박 등을 얻어 조선을 떠났다.

그런데 진언상이 9월 16일 조선에서 배를 빌려 귀국한 지 열흘 후였다. 대마도 도주 ‘종정무’가 공작과 후추 등을 바쳤다. 그들은 “남쪽 오랑캐의 배를 약탈해 얻은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배는 바로 7월 진언상이 타고 온 무역선이었다. 대마도주가 태종에게 바친 공작은 원래 자바 ‘마자빠힛’ 국왕이 조선에 보내려던 외교 선물이었다.

태종은 그 공작을 왕실 동물원이라 할 수 있는 ‘상림원’에서 길렀다. 창덕궁 후원인 상림원은 지금의 ‘비원(秘苑)’이다. 공작의 수명은 야생에서는 20년, 동물원에서는 40~50년 정도 산다.

당시 황희는 태종 이방원의 비서실장(지신사)이었다. 진기한 공작이 들어왔는데, 비서실장이던 황희가 안 볼 리가 없다. 황희는 그때부터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4년 동안 비서실장으로 중용했다. 이후 6조 판서를 죽 역임했다.

글자 그대로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 직을 모두 거쳤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 각 부처 장관을 모두 마치고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소리다. 아마 살아생전 황희는 상림원에서 키우던 공작을 여러 번 봤을 것 같다. 황희가 ‘정승’의 대명사가 된 것은 공작의 음덕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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