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고(故) 김인수, 2대 유길훈(울산), 3대 권혁수(충북 공예명인) 전승
조선 중기 약천 ‘남구만’ 선생 극찬, 외국사신이 선호한 ‘상산자석벼루’
‘상산자석’으로 천년의 진천군 농다리, 두타산성 축조, 벼루 제작 등 의미 깊어
진천군‧군의회 관련 기관 ‘무반응’…‘무형문화재’ 및 ‘상산자석박물관 건립’ 희망
30여 년 생활 전담한 헌신적 내조와 고향 후배들의 아낌없는 후원 ‘버팀목’
단양 영춘석 무형문화재 지정, 보령남포석벼루 무형문화재 지정 및 전수관 운영

[충북=내외뉴스통신]이건수 기자= 조선 중기 인평대군 시문집인 ‘송계집’에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잘 알려진 약천 남구만(1629~1711) 선생의 ’두타산의 벼루 작아서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데(陀山石硯小容指) / 글씨 쓰면 먹빛이 구름 같아 붉은 빛을 발산하네(潑墨如雲紫耀光)‘ 라는 ’상산자석벼루‘를 표현한 글이 수록돼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상산자석벼루‘는 16세기 이전부터 명성을 떨치면서 널리 사용됐던 진천 명품 특산품이었다.

더구나, 외국 사신들이 가장 갖고 싶은 조선의 물품으로 ‘상산자석벼루’를 선호했다는 것은,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는 그 어떤 벼루보다 값진 최고의 벼루였음을 증명한다.

‘상산’은 진천의 옛 지명이며, 초평면 두타산 일대의 암석이 붉은색을 띄고 있어 자석(紫石)이라 불리었는데, ‘상산자석’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두타산 일대의 붉은 돌을 이용한 축조물과 가공된 기록은 남아있다. 그 처음이 두타산성이고, 또 하나의 축조물은 바로 천년 세월을 버텨온 ‘농다리’다.

과학적 공법의 우수함을 짐작하게 할 만큼 특이한 양식으로 짜여진 이 ‘농다리’를 축조하는데 쓰여진 돌이 상산자석이다. 또한, 자석을 이용해 벼루를 만들었고, 자석벼루가 유명해진 것은 조선 중엽의 일이었다.

벼룻돌은 함경북도 ‘종성석’, 평안북도 위원의 ‘위원석’, 평양 근처 대동강 변의 ‘대동강석’, 황해도 장산곶의 ‘해주석’,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석’, 충청북도 진천의 ‘상산자석’ 등이 유명했다.

문헌상에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진천군 초평면 두타산 자락에는 벼루를 만들던 마을인 ‘연촌(硯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1960년대에는 ‘상산자석벼루’를 만드는 기능인이 1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촌리’는 1914년에 연치리(硯峙里)와 점촌(店村)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85년에 ‘원남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수몰되는 바람에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도안ㆍ증평ㆍ청주 등지로 떠났으나, 최근 다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벼루‘는 문방사우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벼루는 선물로 많이 주고받았으며, 글씨를 쓰는 선비라면 유명한 벼루 하나 쯤 소장하고 있었다. 

벼루의 종류와 명칭은 산지와 재질, 형태와 용도, 모양과 문양, 용도 등에 따라서 분류하고 호칭되기도 하지만, 그 명칭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벼루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됐다. 삼국시대에는 흙으로 구워 만든 토연(土硯)과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陶硯)이 사용됐다. 또한, 석연(石硯)도 삼국시대부터 사용됐지만 고려시대에 와서야 유행됐고, 모양은 주로 원형과 사각형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벼루는 문양과 모양에 사상과 문화가 있다. 당시의 생각과 생활상을 벼루의 형식과 문양에 표현했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 조상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생활상, 그리고 문화를 말해 준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에는 어쩔 수 없는 법, 해방과 더불어 붓 대신 넘쳐나는 필기구 때문에 벼루는 쇠퇴했고, 연촌(硯村) 마을에 남아있던 몇몇 장인들도 흩어져 자연히 벼루기술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를 지키기 위한 최초로 노력을 기울인 장인이 1대 김인수(1907~1972)선생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김인수 선생은 현존하는 상산자석벼루의 전통기술을 갖고 있던 분들에게 물어물어 벼루 제작기술을 배우고 완성해 나갔다.

이후, 1967년 사고로 인해 팔을 잃은 자식을 대신해, 당시 용정리에 살고 있던 유길훈씨를 제2대 전승자로 받아들여 기술을 전수했다. 유길훈 2대 계승자는 또, 1978년 문하생이었던 권혁수씨를 3대 계승자로 받아들였다.

당시 초평에는 서너 군데의 벼루제작 공방이 있었을 정도로 ‘상산자석벼루’는 활성화 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돈이 되지 않는 벼루공방은 하나 둘 문을 닫게 되고, 급기야 제3대 권혁수씨 역시 전업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벼루의 전통제작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 명맥을 유길훈 전승자 혼자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이후 유길훈 전승자도 울산으로 옮겨가게 됨으로 인해, 상산자석의 명맥은 끊어지게 될 상황이 됐다.

이때 권혁수씨가 그런 안타까움을 절실하게 느끼고, 본인의 생업을 포기하고 유일하게 상산자석벼루를 전통방식으로 제작하는 3대 전승자로 남아, 맥을 이어 나가는 일에 정진하고 있다.

1959년생으로 진천군 초평면이 고향인 ‘권혁수’ 전승자는 2018년 4월 ‘충북 공예명인(제12호)으로 지정됐으며, 자택 한 켠에다 ’석진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고향 지킴이기도 하다.

또한, 아들인 ‘권순재’를 제자로 삼고 벼루제작기술을 전수하고 있으며, 작품전시 등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님을 일찍 여윈 ‘권혁수’ 전승자는 진천농업고등학교 축산과에 다니면서 과 수석을 할 만큼 공부에 매진했으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별세로 하고 싶은 꿈을 접고 시작한 것이 ‘상산자석벼루’ 만드는 일.

권 전승자는 “자석벼루 제작만으로는 현실적으로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워 중간에 수없이 포기하려 했으나, 이어 갈 사람이 없다 보니 맥이 끊겨 버릴 것 같은 안타까움과 사명감 때문에 생활고를 뛰어 넘어 버팀목으로 살아온 것이 30여 년이 흘렀다.”고 힘든 생활을 견뎌온 소감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묵묵히 벼루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지금까지도 남편의 생활에 대해 한 번도 원망해 본 적 없을뿐더러,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세상에서 제일 남편을 존경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남편이 ‘상산자석’의 전통을 이어가는 지역 문화지킴이가 돼야 한다면서 끊임없이 격려를 보내고 있다. 끝없는 사랑이 고단한 생활고를 넘어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명감에 절대적인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인이자, 한국산야초연구소장이며 ‘권혁수’ 전승자의 고향 후배인 이재민 씨가 틈나는 대로 공방을 찾으면서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소위 권 전승자의 홍보 담당이자, ‘상산자석’ 홍보대사 역할도 마다않고 수행하고 있다.

이재민 시인은 “권 전승자는 상산자석벼루로 시작해서 끝날 정도로 오로지 ‘상산자석’에만 애착을 갖고 있는 장인이다.”라며, “2015년에 무형문화재 지정 신청서류작성에 협조를 해달라고 해서 함께 하다 보니, 제 자신도 ‘상산자석’의 매력 속에 빠져 버렸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바늘과 실처럼 내년에 ‘충북 무형문화재’ 지정이 될 수 있도록 옆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아울러 ‘상산자석’이 진천의 전통특산품으로 거듭나는데도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각오다.

든든한 지원군은 또 있다. 이재민 시인의 고향 친구이자, 청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권 전승자의 고향 후배인 이범성 대표도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초등학교 때 ‘자석벼루’가 신기하다고 여겼었고, 번창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선배님이 홀로 어려움 속에 명맥을 이어가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며, “제 고향의 소중한 전통자산인 ‘상산자석’이 계승· 발전돼 진천의 명품, 명소가 되도록 아낌없는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를 열 수 없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이 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역사와 문화가 있는 것이다.

1백 년 전에는 전국에 100여개의 ‘벼루산지’가 있었다. 지금은 울산, 단양, 보령, 그리고 진천, 4군데 밖에 없다.

울산으로 건너간 유길훈씨는 울산광역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2017년 언양의 녹석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됐고, 단양 영춘석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단양 영춘자석벼루는 상산자석보다 검은 빛을 띄며, 10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또한, 충남 보령의 남포석벼루는 무형문화재 지정은 물론, 국내 유일하게 전시관과 체험관 등을 갖춘 ‘전통벼루박물관’ 이 조성돼 있다. 남포석의 역사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등장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역사가 오래됐고, ‘상산자석’의 원산지인 충북 진천군에서는 무형문화재 지정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좁다란 공방에서 오로지 개인이 사명감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처지이다.

더구나 ‘상산자석’은 성을 축성하던 재료로 사용됐고, 농다리를 축조하는 재료로 사용된 진천의 귀중한 문화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권혁수’ 전승자는 “끊임없이 두드려본 지자체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고 강조한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지정과 함께 하루빨리 ‘전수관’을 만들어 전수자를 확보하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수십 년 해온 것처럼 변함없이 자석을 다듬어 전통방식의 명품 ‘상산자석벼루’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권혁수’ 전승자를 만나러 돌가루가 뿌연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 위치한 ‘석진공방’을 찾았다.

- ‘상산자석벼루’ 1대→2대→3대 전승자들의 계보는.

“1920년 초반, 충남 보령시 웅천면에서 일본식벼루인 뚜껑 있는 남포벼루를 만들었던 신철우씨가 박성규씨에게 벼루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다. 그 이전까지는 전통방식의 뚜껑 없는 나무로 벼루집을 만들어왔다.

그 이후, 박성규씨가 1945년에 타계하기까지 계속해서 벼루를 만들었으며, 그 기술은 아들인 박흠익과 친구인 진천군 초평면 황골에 사는 고(故) 김인수 선생에게 전해졌다.

일제강점기 때 김인수 선생은 연촌마을에서 벼루를 배운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초평초등학교에 석공예조합을 만들어 후학에 힘쓰다가, 초평면 용정리에 공방을 만들어 친구의 아들인 유길훈(現 울산무형문화재) 스승에게 기능을 전수해, 진천군 초평면 신통리에서 2000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유길훈 스승 역시 진천을 떠나 울산광역시로 옮겨가게 됐다.

때문에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벼루의 전통제작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1978년부터 2대 유길훈 스승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제가 3대 전승자로 2000년경 지금의 문백면 사양리로 이주해, 자택 옆에다 공방을 자그맣게 차려놓고 ‘상산자석벼루’를 전통방식으로 유일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 ‘상산자석’(常山紫石)과 벼루를 만들었다는 ‘연촌리’(硯村里)에 대해 소개.

“‘상산’은 진천의 옛 지명이며 초평면 두타산 일대의 암석이 붉은색을 띄고 있어 자석이라 불리고 있다.

‘상산자석’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산자석은 진천의 옛 지명인 상산에서 나는 붉은 돌이라는 뜻이다.

두타산 일대의 붉은 돌을 이용한 축조물과 가공된 기록은 남아있다. 그 처음이 두타산성이고, 또 하나의 축조물은 바로 천년 세월을 버텨온 농다리다.

진천 농다리(鎭川 籠橋)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여 있는 다리로, 이 농다리를 축조하는데 쓰여진 돌이 상산자석인 것이다. 또한, 상산자석을 이용해 벼루를 만들었고, 조선조 중엽부터 자석벼루가 큰 인기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벼룻돌은 함경북도 ‘종성석’, 평안북도 위원의 ‘위원석’, 평양 근처 대동강 변의 ‘대동강석’, 황해도 장산곶의 ‘해주석’,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석’, 충청북도 진천의 ‘상산자석’ 등이 유명했다.

조선 중기 숙종 시대의 문신 ‘남구만’의 약천집에 실린 글로 미루어 ‘상산자석벼루’는 16세기 이전부터 명성을 떨치면서 널리 사용됐고, 조선 특산품으로 중국에서 각광받는 벼루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연촌리’에서는 조선조 초반부터 벼루를 만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벼루는 궁중의 각종 연회 선물의 물목에 빠지지 않았다. 특히, 대륙에서 오는 황제의 선물 물목에도 반듯이 벼루가 포함됐는데 그 중에서도 자석벼루가 대표적이었다. 단종부터 성종까지의 시기에는 ‘자석벼루’가 매우 유행했다.

문헌상으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 말엽, 초평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황골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황색돌이 나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초평의 오래된 사찰인 영수사 계곡 전체에 자석이 분포되어 있으며, 동잠계곡 등 초평 전역에 자석이 널리 분포되어 있어, 예부터 상산자석을 이용한 자석벼루의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그 벼루의 이름을 ‘상산자석벼루’라 불려졌다.

그런 연유로 당시 세력가들이 속속 초평으로 들어와 살게 됐고, 광산 김씨 집성촌, 경주 이씨 집성촌 등이 여러 마을로 분포되어 있다.

지금의 진천군 초평면 황골마을 윗마을이 연치리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연치리와 점촌이란 마을을 통합해 연촌(硯村)이라 불렀다. 당시의 벼루 공들은 ‘연촌’과 ‘황골’ 등지에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촌리는 1985년에 ‘원남저수지’가 완공되면서 마을과 도안초등학교연촌분교 등이 수몰됐고,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도안ㆍ증평ㆍ청주 등지로 떠났으나, 최근 다시 마을이 형성됐다.”

- 3대 전통계승자가 된 배경은.

“삼촌(권오준) 친구인 유길훈 스승에게서 벼루를 배워보라는 말을 듣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승님 수하에 입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여덟 살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저로서는 여의치 못한 가정환경 때문에, 결국 도심지 학교를 포기하고 시골 농업학교에 진학했다.

열심히 공부해 과수석을 할 만큼 공부에 매진했으며, 축산관련 사업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별세로 집안 사정이 기울어 1978년 벼루인생에 뛰어 들게 됐다.

1년여를 기초입문에서 허덕이던 내게 유길훈 스승님은 작품전에 출품해 보라는 목표를 안겨줬고, 그 뒤로 1983년 독립하기 5년여를 스승님의 기능을 전수받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힘든 날의 연속에서 미용사인 아내를 만났고, 생활비도 아내가 전적으로 담당했다. 두 아이를 낳아 남편과 아버지란 이름까지 함께 짊어져야 했지만, 아내가 생활전선에서 미용실 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덕분에, 지금까지 벼루를 만드는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최고의 끝없는 내조를 해 줬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각종 출품전과 공모전, 그리고 작품전시를 거치면서 제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사의 대표적인 문양으로 우리 고대사의 상징으로 벼루를 만들어 나갔다.

또한, 벼루를 만들고 있는 기능자가 저 하나이기 때문에 저도 스승님처럼 후학을 양성해, 상산자석벼루의 맥을 이어나가야겠다는 책임감이 가득하다.

문화재로서 이 시대가 아닌 먼 미래에서도 전통문화의 가치가 빛나게 하려면, 전통기술의 전승이 끊이지 않고 이어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신념이 됐다.

그래서 전통문화로 계승되어 갈 전승자의 발굴과 그 전승자들에게 전통과 기능을 끊이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싶다. 상산자석벼루, 벼루장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젠 또 하나의 꿈이며, 목표이다.”

- 지자체에 ‘상산자석벼루’를 계승, 발전하기 위한 협조를 요청했는지.

“그동안 수없이, 틈나는 대로 지자체나 관련기관에 찾아, 하다못해 기본적인 제도적 뒷받침이라도 해 달라고 협조를 부탁드렸고, 사정도 많이 해 봤다. 하지만 한 마디로 전혀 반응이 없다.

저도 나이(61세)가 들었고, 열악한 환경에다 기초적 생활마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뒤를 이을 것인지 걱정이다. 작품을 만드는 기간도 최소 20일에서 3개월이 걸리고 가격도 만만치 않으니 판매도 쉽지 않다.

이렇게 생활 유지도 힘들다 보니 개인적으로도 홍보도 못하고, 진천군에서도 관심이 없고, 전승자도 오로지 혼자라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다. 악순환이다.

그렇지만 고향 출신인 저라도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우수한 전통을 이어온 ‘상산자석벼루’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시대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15년 전 만 해도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사업이 대부분 내려 보내는 하향(下向)식 사업이 주를 이루었다.

국가차원에서 제도적인 보완과 함께 지역의 관광명소, 장인, 그리고 특산품 등을 장려하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됐다면, 요즘은 주민들 실생활에 필요한 상향(上向)식 사업이 대세다

실제로, 2018년 초 인근 초평면 양촌리에 ‘책마을 사업’으로 280여 억 원이 책정돼 진행 중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생곡마을 경주 이씨 집성촌 종친들을 위해 써 준 ‘화수정’ 현판과 함께, 대한제국시절 4대 서고가 초평에 있었다는 역사성으로 문화재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2018년 말, 저를 비롯한 뜻있는 분들이 진천군에도 ‘벼루’에 국한하지 말고 ‘상산자석박물관’으로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대두됐다.

즉, ‘상산자석’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자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농다리를 축조한 돌도 상선자석이고, 역시 두타산성을 쌓을 때 사용된 것도 상산자석이다. 

여기에 오래 전부터 상산자석으로 벼루도 만들었다. 그 원산지가 진천군 초평면이고, 두타산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상산자석이 널리 분포돼 있는 초평면 영수사(천년궤불 소장) 입구 쪽에 ‘상산자석박물관’(고연박물관 or 만국벼루박물관)을 건립해, 도내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들이 ‘상산자석’ 관련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벼루를 제작하려면 돌이라 무게도 있고 위험도 하면서, 또한 체력소모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전 과정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철저한 사전준비와 함께 마무리과정이라도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알찬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박물관 옆에다는 전승자가 ‘벼루공방’을 운영하며 박물관도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천의 ‘또 다른 유서깊은 명소’가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런 방안을 강구해 진천군이나 군의회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협조 반응이 없다.”

- ‘충북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다면.

“2015년에 충북 무형문화재 지정 때 고연(古硯) 작품이 부족하다 해서 지정이 안 됐다. 내년 지정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2020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도비 70%, 군비 30% 지원받아 공방 전시실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월 생활비로 100여만 원과 행사 참여에 따른 지원금만 이어진다면, 후학도 양성할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

상산자석벼루를 진천군 전통특산품으로 선정·발전시키면서 상설전시장도 개설해 전국 초· 중학교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충북 무형문화재 지정이 되면 충청북도와 진천군홈페이지에 소개가 되고, 각종 행사의 안내 팜플릿에도 소개가 되기 때문에 판매도 수월해질 뿐만 아니라 진천의 명품으로도 널리 홍보될 수 있다.

전승 입문자 상시 모집 홍보를 계속하면 후학들도 모여들게 된다. 그러면 ‘전통벼루 작품전’도 주기적으로 개최할 수 있다.

아울러, 상업벼루 제작공장을 유치해 저렴한 가격으로 직접 제작방법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장프로그램도 진행함으로써 '상산자석벼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다.

전국전통공예품전시관에도 최소 2~3점을 비치해, 조선 중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유명한 약천 ‘남구만’ 선생이 아끼던 벼루이자, 외국 사신들도 선호했던 특산품이 바로 진천 상산자석벼루임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고, 주문판매도 가능해 지리라 예상된다.

현재, 충청북도공예조합의 이사로 오래도록 봉사하다가 지금은 감사로 봉사하고 있으며, 3년마다 ‘찾아가는 공예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에게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있다.

또한, 진천군의 협조만 있다면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체험프로그램을 확대해, 재주가 있는 학생을 대상으로 더 많은 프로그램을 시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충남 보령의 남포벼루는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전수관을 갖추고 그 지역 3~4명의 전승자를 배출했다. 단양의 영춘자석벼루는 보령에서 기능을 전수받아 지금의 단양에서 문화재로 지정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진천군의 적극적인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우선은 ‘상산자석박물관’을 건립해 두타산성과 함께 농다리 축조에 쓰인 ‘상산자석’을 널리 알리고 또한, 일본식 뚜껑 있는 벼루가 아닌 우리 고유의 고연을 재현하고 싶다.

‘상산자석벼루’는 진천의 문화, 예술, 전통이 고스란히 스며든 문화재이다. 그래서 더욱 진천군에 시급히 ‘전승관’ 건립이 필요한 이유이다. 또한, 진천군과 교육청에게 초등학교 방과후 프로그램에 석공예와 벼루공예 강의 편성을 의뢰할 예정이다.

일생 목표인 충북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철저한 준비와 함께, 단계별, 체계적 학습 프로그램을 만들어 더욱 많은 시간을 전승자 양성에 쏟을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과정별 제작의 난이도를 향상시키는 방법을 도입해, 오랜 시간을 통해 익혀온 제작기술을 조금 더 쉽고 빠르게 배우고 익힐 수 있게 만들고 싶다.

이에, 교육프로그램 전문가와 협의해 단기, 장기 프로그램을 실시해 보려고 한다. 단기교육은 공예전공자를 위한 1년 코스이며, 장기교육은 3년 코스로 계획하고 있다.

해당 교육프로그램에는 기초과정, 입문과정, 전문과정으로 분류해 교육을 진행할 것이다.

먼저 ‘기초과정’에는 원석을 고르고 채석하는 방법과 습득, 공구를 다루는 방법을, ‘입문과정’에는 공구를 다루고 디자인을 하며 기초적인 조각단계까지, 그리고 ‘전문과정’에는 세부조각과 마무리, 칠 작업까지를 분류해 문하생을 위한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더불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대 전통문양과 우리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주먹구구식이 아닌 전문적인 전승방법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충청북도와 정부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민관이 함께 전통문화를 지키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기능인으로서의 몫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린다.”

- 끝으로 한 말씀.

“대한민국의 현실은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전통기술을 갖고 있는 많은 전승자들이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결국 전통기술을 포기하게 된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자체의 적극적인 노력 여하로 전통기술을 펼칠 수 있는 전승공간을 마련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계승자를 키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한다.

‘상산자석’은 두타산성과 농다리를 축조하는 재료로 사용됐는가 하면, 벼루를 만드는 귀한 재료로 거듭났다. 이런 진천의 귀중한 문화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진천군에서도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잊혀지지 않고 군민들의 가슴에 살아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계승·발전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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