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하면서 각국 사신과 무역사절이 줄을 이었다. 맨 처음 입국한 사절은 1393년(태조2) 6월 16일, 태국에서 온 무역상 ‘장사도(張思道)’ 일행 20명이었다. 당시 태국 아유타야 왕조(Ayuthaya,1350~1767)는 섬라(暹羅)로 불렸다. 1376년 명나라 홍무제로부터 국새를 사여 받고, ‘책봉-조공’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유럽에서는 대개 ‘샴’으로 호칭했다. 샴고양이 원산지다. 아유타야는 태국에서 일어났던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무역이 나라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과 인도, 유럽을 잇는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아유타야 왕조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독점 무역을 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서 많은 이윤이 생기자, 중국인 관료를 등용해 왕실 무역을 시작했다. 태국의 왕과 왕족들은 ‘프라클랑’(Phrakhlang)이라는 재정 및 외국 무역을 관장하던 부서에 적극 가담했다.

‘프라클랑’은 세금을 거둬 보관해두면서 왕립 금고 역할을 했다. 상아를 비롯해 티크, 자단·백단 등의 목재, 후추, 공작새 등 주로 밀림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팔았다. 중국에서 도자기와 비단 등을 사다가 인도 등 제3국의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아유타야는 빠른 속도로 국제무역항의 성격을 띠게 됐다.

■ 고려 말~조선 초 태국과의 교류

태국 무역사절단은 1391년(공양왕3) 7월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아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무렵이다. 그 해 고려를 방문한 일행은 태국으로 무사히 돌아간 것 같다. 2년 후, ‘장사도’가 이끈 더욱 큰 규모의 태국 무역사절단이 조선에 왔기 때문. 태국 정부나 무역상들은 고려 말에 방문했던 일행으로부터 코리아라는 새로운 무역 시장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1391년 태국에서 온 무역상의 고려 방문과 1393년 장사도의 조선 방문은 당시 아유타야 왕조의 활발한 무역 활동에 기인한다. 태국 사절단이 고려와 조선을 방문한 시기의 아유타야 국왕은 1388년에 즉위한 라메쑤안(Ramesuan; 1388~1395) 왕이다.

그는 대대적인 팽창 정책을 추구했다. 치앙마이(Chiang Mai) 일대에 있던 란나(LanNa) 왕국을 공격하고,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왕국까지 정복했다. 태국 왕실은 전쟁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해 해외 무역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삼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1388년과 1399년, 아유타야 왕국의 사절단은 일본에도 파견됐다. 유구국(=오키나와)에서도 무역선이 왕래했다.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은 태국에서 상아, 사슴 가죽, 설탕, 티크 등의 목재를 싣고 갔다. 평균 40여 일을 항해해 일본에 팔고, 대신 구리와 은 등을 받아 왔다.

장사도 등 태국 무역사절단은 일본에 오다 보니 옆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시장 개척 겸해서 한국에 온 것으로 보인다. 중간 무역 항구는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천주). 송나라 시절부터 취안저우는 고려 및 일본과 해상을 통한 국제 무역 교류가 발달한 곳이다.

■ 동양과 서양을 잇던 무역 왕국 아유타야 (Ayuthaya)

1393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장사도는 당시 태국 정부에서 중용한 중국계 상인으로 보인다. 그가 가져온 물품은 염료를 내는 소목(蘇木) 1천 근(600㎏), 향나무 일종인 한약재 속향(束香) 1천 근, 그리고 흑인(土人) 2명이다.

무역 물품에 흑인 두 사람이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이때 들어온 2명의 흑인은 이성계가 특별히 경복궁 문지기로 배치했다. 요즘 식으로 풀이하면, 외국인에게 청와대 경호 업무를 맡긴 셈이다. 흑인 2명이 조선의 대궐 문을 지키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신라 괘릉과 흥덕왕릉에 아랍인으로 추정되는 장대한 위용의 무인 석상을 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제 막 개국한 조선은 흑인의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 기능과 벽사 역할을 노렸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한겨울 추위는 달가워하지 않았을 터.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태국 사절단이 일행이 조선을 방문한 것을 매우 흐뭇하게 받아들였나 보다. 지금도 해외 수교가 국가의 권위를 올려 주는 것과 마찬가지. 조선 정부는 전문 외교관이던 배후(裵厚)를 답례 사신으로 태국에 보낸다.

그러나 태국에 사신을 파견하려던 조선의 첫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조선 외교관 배후와 장사도 일행은 6개월 후인 1393년(태조2) 12월, 태국으로 가던 길에 일본에 이르렀다가 봉변 당한다. 1394년(태조3) 7월 5일, 장사도는 “왜구에게 습격당해 이성계가 준 예물 등을 모두 약탈당했다.”면서 조선에 되돌아왔다.

그는 “다시 배 한 척을 빌려주시면, 올해 겨울에 본국에 돌아가겠다.”라면서 칼과 갑옷, 구리 그릇과 흑인 2명을 다시 바쳤다. 겨울철에 남쪽으로 부는 북서 계절풍을 기다려 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이때 장사도가 전년에 바친 흑인을 포함해 총 4명의 출신지는 알 수 없다. 동아프리카 계통의 반투 니그로 노예, 또는 남태평양 지역의 원주민 계통일 수 있다. 어쨌든 기존에 바친 흑인 2명을 태조 이성계가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또다시 진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 일본 왜구 때문에 망친 고려 말~조선 초 태국과의 교류

장사도 일행은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후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태국에 가려다 되돌아온 지 한 달 후가 지났다. 이 무렵 실록에는 장사도 이외에 또 한 명의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진언상’이란 자다. 1394년(태조3) 8월 7일, 이성계는 외국 무역사절에게 벼슬을 내렸다. “섬라곡 사람 장사도를 예빈경(禮賓卿)으로 삼고, 진언상(陳彦祥)을 서운부정(書雲副正)에 임명해라.”

예빈경은 종3품의 외무부 관리, ‘서운부정’은 종4품의 문관. 천문 등을 맡아보는 오늘날 기상청 격인 서운관(書雲觀) 관직이다. 원양 항해를 하려면, 천문과 기상 지식에 밝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진언상을 서운부정에 임명한 듯하다. 파격적인 예우였다. 실록 기록 앞뒤를 살펴보면, ‘진언상’은 장사도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되돌아갈 때, 동행한 사람으로 보인다. 장사도 일행은 북서 계절풍이 부는 그해 겨울 다시 태국으로 나선 것 같다.

이러한 사실들은 1396년(태조5) 7월 11일 실록에 자세히 적혀있다. “예빈소경 배후와 통사(通事) 이자영이 섬라곡국(暹羅斛國)에 회례사(回禮使)로 갔다. 태국의 사신 임득장(林得章) 등과 더불어 돌아오다가 전라도 나주의 바다에 이르러 왜구에게 붙잡혀 다 죽고, 이자영만이 사로잡혀 일본으로 갔다가 이제 돌아왔다.”

언뜻 보면 외교관 배후와 통역관 이자영을 포함한 조선 사절단이 1394년 겨울에 출발해, 1395년 초 역사상 처음으로 태국을 방문한 것처럼 보인다. 조선 사신 배후가 1393년 시도한 첫 번째 태국 방문은 왜구 때문에 실패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1394년 말 두 번째 태국 방문 여부는 확실치 않다. 조선 사신이 성공적인 태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왜구에게 당했는지, 아니면 태국에 가는 도중에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동남아시아 국가와 교류에 관한 국내 최고 전문가인 조흥국 교수는 조선 사신의 태국 방문에 관한 사료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인도네시아 무역 사절단이 뺏긴 공작

1406년 명나라 정화 함대의 대항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 역시 명나라와 감합 무역을 1404년부터 개시했다. 또 1406년은 유구(=오키나와) 3개 소국을 통일한 초대 중산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해양 국가로 발돋움할 시기였다.

1394년 태국 무역상 ‘장사도’와 동행해 조선에 왔던 ‘진언상’이란 자는 12년 후 <태종실록>에서 다시 등장한다. 1406년(태종6) 8월 11일 “남방 조와국(爪蛙國)의 사신 진언상이 전라도 군산에 이르러 왜구에게 약탈당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무역 사절단으로 조선을 다시 찾았다가, 왜구에게 몽땅 털린 것이다. 진언상은 무역선에 실었던 공작·칠면조·앵무·잉꼬 등의 진귀한 새와 침향·용뇌·후추·소목·향 등 여러 약재, 가죽 제품 등을 모두 뺏겼다. 붙잡힌 자가 60명, 싸우다 죽은 자가 21명이었다. 남녀를 합해 오직 40명만 죽음을 면해 해안으로 올라왔다.

조선 정부는 왜구에게 당한 진언상에게 다시 한 번 친절을 베풀어준다. 1406년 9월 1일, 태종은 일행에게 각각 겨울옷 한 벌과 신발 등을 하사했다. 9월 16일 그가 돌아가자 각종 물품을 후하게 하사해 보냈다.

진언상이 타고 오다가 왜구에게 약탈당한 무역선은 제법 컸던 모양이다. 승선 인원으로 보면 120명이 넘는 대형 무역선이다. 그중 40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면, 피해가 상당히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진언상이 자바를 출발한 것은 1406년 5월 22일. 당시 조와국(爪蛙國) 왕은 그에게 토산물을 갖고 가서 특별히 조선 왕국에 진상하라고 했다.

1394년 8월, 첫 방문 때 조선 정부의 환대를 경험한 진언상은 조와국과 조선과의 공식적인 교역을 트기 위해 재차 조선에 오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1406년 7월 1일 그가 탄 배가 군산 외곽의 선유도 인근에 다다랐을 때, 홀연히 해적선 15척을 만났다. 힘껏 싸웠지만 역부족으로 모두 당했다. 아마 일본 왜구를 만나 이틀간 쫓고 쫓기다가, 결국 왜구가 배를 접수한 모양이다.

■ 해적에게 습격당한 인도네시아 무역사절 진언상

진언상은 조와국으로 돌아가면서 증명서 하나를 써줄 것을 간청한다. 본국에서 자기가 해적에게 약탈당한 일을 믿지 않을까 두렵다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그의 일행이 타고 왔던 선박을 작은 배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 새로운 무역시장 개척을 위해 새로 건조한 200여 톤 급 대형선이었는데, 선원 대부분이 왜구에게 살해되어 운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 진언상은 내년에 다시 오겠다며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조선을 떠났다.

자 그렇다면, 실록에 나오는 조와국(爪蛙國)은 어디인가?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자와(Jawa) 섬을 말한다. 영어로는 자바(Java). 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가 서쪽 끝에 있고, 동쪽에는 발리섬이 있다.

섬의 면적은 남한보다 1.3배 넓은 138,794km²로 세계에서 13번째 크기다. 인구는 1억 4,50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섬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인구(2,300만 명)보다도 6배 많다. 인구밀도는 km²당 1,121명에 이른다. 방글라데시 등 벵골 지역과 함께 지구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다.

진언상이 조선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의 습격을 받을 무렵 명나라의 정화의 대항해가 시작됐다. 1405년 6월, 1차 원정을 떠난 명나라 정화 함대는 1406년 초 엄청난 선단을 이끌고 자바 중앙의 스마랑(Semarang)을 방문한다.

지금도 정화의 이름을 딴 ‘삼뽀꽁’(Sam poo kong)이란 관광지가 유명하다. 자바항에 있을 땐 자바의 내란으로 정화 함대의 병사 170명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중부 자바의 무역항 스마랑은 16세기까지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스마랑에서 남쪽으로 3시간여를 달리면 인도네시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인 족자카르타다. 자바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자바 문명의 요람이다. 신라 천 년의 버텨온 우리나라 경주와 같은 도시다. 족자카르타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 사원과 프람바난(Prambanan) 이슬람 사원이 버티고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미얀마의 바간 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다. 8세기 샤일렌드라 불교 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수백 개의 불상과 종탑, 부조들은 사람들을 압도한다.

■ 일본 왜구 때문에 망친 조선 초 인도네시아와의 무역 교류

예부터 아시아 지역은 거대한 규모의 시장을 형성했다. 그중에서 특히 중국과 인도는 문명적으로나 인구 면에서 매력적인 시장이었다. 전 세계 상인을 불러 모으는 흡인력을 가졌다. 이 양대 거대 시장 간에 실크로드 비단길과 바닷길이 열리면서 상호 막대한 교류가 형성하게 된다. 그 무렵 인도양 상인들은 동부 아프리카 케냐의 몸바사 항구로부터 자바 섬까지 교역했다. 그들이 아프리카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은 인도양에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계절풍 몬순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동부의 스와힐리(Swahili) 족은 아랍과 아프리카계의 혼혈인 ‘반투 니그로’에 속한다. 그들은 아랍과 인도와의 무역 물품을 취급한 검은 카라반이었다. 인도양의 몬순은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는 남서풍이 불어오며, 가을 중엽부터 봄 중엽까지는 북동풍이 분다. 명나라 정화 함대 또한 이 몬순 풍을 활용했다. 광활한 인도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 연안까지 논스톱 항해가 가능했다.

동아시아의 바다 역시 계절풍의 바다였다. 여름의 남서풍, 겨울의 북동풍은 한반도를 동남아시아와 연결했다. 우리나라 동해까지 올라오는 구로시오 해류는 동아시아의 해양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이 실크로드 바닷길의 연장선에서 ‘처용’으로 추정되는 아랍인들이 이미 삼국시대에 신라까지 왔었다. 신라 공주와 사랑에 빠진 이란 왕자의 러브스토리 ‘쿠시나메’ 또한 흥미를 더해준다.

그 무렵 인도네시아는 7세기부터 인도와 중국 사이의 해상무역을 이끌었던 동쪽 수마트라 중심의 ‘스리위자야’(Sriwijaya) 왕국과 13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자바 섬을 근거지로 한 ‘마자빠힛’(Majapahit; 1293년~1520년) 왕국이 번영했다.

자바 중부에 번영했던 최후의 인도식 왕조 마자빠힛은 자바와 수마트라 해 전역을 지배할 정도의 대함대를 보유했다. 14세기 후반 제4대 하얌 우룩(HayamWuruk, 1350-1389) 왕의 시대가 최전성기였다. 그는 인도네시아 전역과 말레이반도 일부까지 지배하면서 중국이나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마자빠힛 왕국은 15세기부터 쇠퇴했다. 그 배경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명나라 정화의 대항해 등으로 해양 지배 체계가 위협받게 됐다. 둘째, 무엇보다 이슬람 상인 세력과 향신료를 등을 노린 서방 세력의 침투가 시작됐다. 후추와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VOC) 등 국제적 무역 전쟁의 일급 품목이었다.

■ 세상에 이런 일이! 엉뚱한 곳에서 등장한 진언상의 공작새

그 무렵 자바에는 주로 광둥성과 푸젠성 출신 중국 남부 출신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293년 몽골(元)이 자바 정복을 위해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을 때, 포로로 잡혔거나 귀국하지 않고 정착한 중국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몽골 병사가 아니라 주로 중국 남부에서 징집된 병사였다. 마자빠힛 왕국은 이때 몽골의 침입을 물리친 삼불제(三佛齊), 즉 스리위자야 다음에 세운 국가였다. 명나라는 정화의 대항해 이후 15세기 중엽부터 사무역을 금지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관계를 조공 무역에 한정시킨 해금 정책을 폈다.

자바 섬에서 활동하던 중국인들 가운데 귀향을 포기하고 그 섬에 눌러앉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명(明) 초기에는 수천 호에 달했다. 오늘날 화교의 선조가 됐다. 광둥성 출신 진조의(陳助義)는 세력을 키워 ‘해적왕’으로 나섰나가 정화에게 제압당했다. ‘진언상’이라는 사람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태국의 ‘장사도’와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왕실 소속 무역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1406년 7월 진언상이 군산 앞바다에서 몽땅 해적에게 털린 물품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실록에 나타난다. 빈털터리가 된 진언상이 9월 1일 한양에 올라와 조선에서 배를 빌려 귀국한 지 열흘 후였다.

1406년(태종6) 9월 26일, 대마도 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사신을 보내 공작새와 소목과 후추 등을 바쳤다. 그들은 “남쪽의 오랑캐(南蕃)의 배를 약탈해 얻은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쪽의 오랑캐 배’는 진언상이 타고 온 무역선이 틀림없다. 군산 앞바다에서 진언상의 배를 약탈한 해적은 서남해 일대에서 해적질 일삼던 왜구였다. 그 배후는 바로 당시 대마도를 지배한 도주 종정무의 세력이었다.

신하들은 “진기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않는 것이 옛 교훈입니다. 하물며 그것은 약탈한 물건이지 않습니까? 받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태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작을 왕실 후원인 상림원(上林園)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 해적 때문에 망친 조선 초 인도네시아 자바와의 교역

1406년 9월 16일, 우여곡절 끝에 진언상은 자신이 타고 온 큰 배를 조선 정부가 제공한 소형 선박과 맞바꾸고, 이듬해 다시 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한국을 떠났다. 일본 연안을 지나는 도중 진언상은 풍랑을 만나 일본에 표착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일본 해적에게 옷까지 다 빼앗겼지만, 다행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무로마치 막부의 호의로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막부가 마자빠힛으로 파견하는 일본 사신이 탄 배에 탑승해 간신히 자바로 귀국할 수 있었다. 아마 진언상은 막부와 마자빠힛 왕국과의 교역을 연결하는 조건을 내세운 듯하다.

마자빠힛 국왕은 진언상과 함께 온 일본 사신의 방문을 일본 시장 개척을 위한 좋은 기회로 여겼다. 1408년~1410년경 진언상을 정식 사신으로 임명해 다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일본과 조선으로 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그가 탄 배는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또다시 풍랑을 만나 자바 섬으로 회항해야 했다. 일본이나 조선에 오려면 여름 계절풍을 타야 순항할 수 있다. 그런데, 해마다 여름철이면 태풍 발생 시기가 겹친다. 여차하면 죽음의 항해나 마찬가지였다.

■ 자기 대신 손자를 조선에 보낸 진언상

1411년 5월경 진언상은 다시 자바를 출발해 7월에 일본 하카다(博多)에 도착했다. 규슈(九州) 북쪽 후쿠오카(福岡)에 위치한 하카다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었다. 마자빠힛 왕국의 정식 사신으로 일본에 온 그는 쇼군을 만나기 위해 수도인 교토(京都)로 1412년 2월에 올라갔다.

일본에 체류하던 진언상은 1412년(태종12) 4월, 손자인 ‘실숭(實崇)’을 조선에 보냈다. 수년 전 조선의 환대에 대해 거듭 감사 인사를 전한다. 1412년 5월 25일 실숭과 조와국 일행들이 조선을 떠났다. 그들은 일본까지 왜구의 위협에 따른 호위를 부탁했지만, 조선 정부는 거절했다. 이로써 1394년부터 1412년까지 한국과 자바 사이의 16년간 짧은 교류는 끝났다.

조선과 인도네시아 교류의 물꼬를 튼 진언상은 이날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실록에는 진언상은 물론, 다른 인도네시아 사신이나 무역상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명나라가 정화의 대항해 이후 바다를 향한 문을 닫은 것처럼 조선 또한 해외 무역에 대한 관심을 접게 된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정식 수교를 맺은 것은 1973년 9월 17일이다. 진언상의 방문 이후 579년 지난 다음이었다.

■ 두 번째 대마도주가 바친 공작새는 고흥 앞바다 섬으로 유배

1589년(선조22) 7월 12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또다시 공작이 등장한다. 태종 연간 문제(?)의 일본 대마도주가 진상한 것. 그 공작 한 쌍은 결국 조선 왕조 두 번째로 귀양 간 동물로 자리매김했다. 이 공작 한 쌍의 처분을 놓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분분했다. 일부 대신은 “보내온 성의는 가상하지만, 원래 진금(珍禽)·기수(奇獸)는 왕이 즐기는 게 아니다. 수토(水土)도 맞지 않으니, 그냥 되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조는 “자신도 그 생각에 동의하지만, 혹 외교적 선물에 의심을 살까 염려되니 다른 곳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 또 다른 대신은 “우리나라에 공작새를 놓아기를 만한 곳이 없다”고 답했다.

이렇게 옥신각신 우여곡절 끝에 일본 사신이 돌아간 뒤 제주도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그래도 제주까지 수송하는 문제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최종적으로 공작 한 쌍은 고흥 앞바다 섬으로 보내는 것으로 귀결됐다. 태종 때 들여온 공작이 왕실 후원인 상림원(지금의 비원)에서 키웠던 것에 비하면, 사실상 유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걸쳐 세 번의 대마도 정벌을 진행했다. 고려가 망하기 직전, 이성계의 혁명 정부는 1389년(창왕1) 2월 박위를 앞세워 최초의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왜구의 침략이 그치질 않자, 조선 정부는 1396년(태조5)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을 추진한다. 세 번째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1)에 이종무 장군을 보내 단행됐다. 이후 왜구들의 침략과 노략질은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무역상들은 하필이면 왜구가 들끓을 때에 왔다. 그들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와의 전쟁은 장장 반세기에 걸쳐 전 국토에서 벌어졌다.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소모전이었다. 그리고 전혀 의도하지 않게 조선의 해외 무역을 위축시킨 요인이 됐다.

고려는 ‘내자불거(來者不拒)’ 즉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농업을 우대하고, 상공업을 천시한 조선의 바다는 서양 포경선의 요란한 작살이 깨울 때까지 점점 어둠에 빠져들었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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