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토론토에 다녀왔습니다.
여름 가을의 토론토는 아름답습니다, 박물관과 토론토 대학, 병원 등 오페라하우스를 따라 온타리오 호수까지 남북으로 뻗어 있는 유니버시티 로드는 토론토의 상징입니다. 맑고 파란 하늘과 도로 중앙에 심어진 화초들이 주변의 건물과 잘 어우러진 이곳은 내가 토론토에 갈 때마다 좋아해서 늘 찾는 길입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 사이로 지팡이를 짚고 걷는 걸음새는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상쾌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이 몰려왔습니다. 예전엔 그런 감정이 생기리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 나는 잠깐동안 황망한 기분에 잠겼으며 갑자기 목이 메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금년 2월 내 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한 분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오키나와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무렵 듣게 되었습니다. 내 나이 19세 때 시작된 인연이니 40여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에 계신 지인이 그분이 떠나셨는데 알고 있느냐는 이메일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이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듣고선 가슴이 먹먹해지고 내 머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요양소 발코니에 앉아 어두운 태평양 바다로 떨어지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폰에 저장된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들으며 오직 나만이 아는 그분이 받은 냉대와 모멸의 삶, 거칠고 슬픈 질곡의 한 세상을 떠올렸습니다. 다행히 성공한 효자 아들 덕분에 말년에는 편안한 삶으로 젊어서의 고생을 보상받으셨고 극진한 정성으로 간호하며 임종을 지키는 아들 손자 옆에서 큰 고통 없이 눈을 감으셨으니 그래도 행복하게 생의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거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여름날의 토론토 거리에서 그분, 이혼 전 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무슨 심경의 변화이며 이것은 과장된 감정이 아니고 진정 나의 진심인가? 미운 정이 든다더니 정말 쌓이고 쌓여온 미운 정 때문인가? 그러나 오래전 이미 미움은 소멸되었거늘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이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운 정이었던 것입니다. 밤사이 조용히 내린 흰 눈처럼 나도 모르게 소복이 쌓여왔던 고운 정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목 놓아 울었고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어서 가슴 아파한 적은 있었지만 이미 남이 된 세상 떠난 전 시어머니가 그리워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분의 운명과 인생이 한 사람 한 여성으로서 너무 가여워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깊은 연민과 동정은 했었으나 절절하게 보고 싶어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로 세상에서 가장 미워했던 두 사람이 오히려 이혼 후 극적으로 부둥켜안고 화해하며 울었던 공유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미 남남이 된 사이로 때늦은 감이 있었지만 한국 방문 때마다 뵙고 그분이 걸어온 한평생의 가슴 시린 넋두리를 몇 시간이고 들어드리며 함께 살았던 지난 시절의 얘기들을 도란도란 나누었습니다. 그런 따뜻했던 기억과 마지막 만남에서 무수한 상처를 일시에 치유해준 한마디“세상에 에미밖에 없더구나.”가 그런 그리움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영화구경도 가고 박물관 미술관도 찾아다니며 아름다운 찻집에서 함께 자식의 흉도 보며 친 모녀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적인 고부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소망은 그냥 꿈이었는지 이제 내가 시어머니가 되었지만 늘 꿈꿔왔던 고부관계는 역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도 아름다운 고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척과 지인들이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는데 어쩌면 아시아 사람들 특유의 고부관계는 숙명적인 비극이 아닌가 합니다.

딸을 잃은 후 고부간에도 모녀와 같은 감정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의 신념도 빛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시’자 소리만 들어도 끔찍하다며 아우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는 나를 슬프게 합니다. ‘웰컴 투 시월드‘라는 한국 방송을 보면서 참 한국적인 방송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시월드'라고 잘도 용어를 만들어내는지. 그러나 그런 말이 오히려 고부간에 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방송에 나와서 고부간의 갈등을 들춰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조목조목 서로 반박하는 모양새나 말투가 과연 사회적으로 긍정적인가는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왜냐면 오히려 그런 방송이 더 고부간의 거리감을 크게 만드는 것 같아 불쾌해졌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가 소중하면 상대방의 부모도 소중하고 내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도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요? 꼭 혈연이어야만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해서는 항상 거리를 유지하고 깊은 유대를 갖기를 꺼리는 배타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유난히 혈연에 집착하고 입양을 싫어하는 동양인의 정서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 나를 낳아준 부모, 나와 피를 나눈 형제만을 내 가족으로 생각하는 시대는 지나고 있습니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가까이서 항상 관심과 사랑,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는 관계도 가족이며 혈연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나는 지금 그리움 그 이상으로 그분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남편 귀국 후 미국에 홀로 남아 있었던 6년 동안 낳자마자 보낸 막내아들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살림을 맡아 해주셨던 것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감사함이 그분이 떠나신 후에야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내가 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립니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라고 소리쳐도 오직 공허한 메아리만 흩어질 뿐입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을 사십 대에 깨달았더라면, 내 젊음과 건강이 희생되었다고 억울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분이 깨닫기까지 더 많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면 모두가 행복해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 삶의 방향도 달라졌을 테고 이 나이에 토론토의 거리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들은 기다림과 희생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묘약은 없을까요? 있다면 나의 사십 대처럼 지금 이 시간을 방황하며 살고 있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마리

글쓴이 오마리는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불어, F.I.D.M (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미국에서 The Fashion Works Inc, 국내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경영하는 등 오랫동안 관련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그림그리기를 즐겼으며, 현재는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많은 곳을 여행하며 특히 구름 찍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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