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의 <역사>(숲, 천병희 역)를 보면 BC480년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본국민과 주변 모든 부족을 동원해 3차 그리스 원정을 떠난다. 전투요원만 264만 명인데 종군하인과 수송요원, 요리사, 노예 등등을 포함하면 약 5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이 그리스로 진군한다.

이미 1,2차 그리스 원정에서 대제국 페르시아는 큰 수모를 겪은 바 있다. 선왕 다레이오스(다리우스)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 세상을 떠난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전쟁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피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의 이끌림에 따라 예견된 패배의 길을 간다. 아무리 신과 같은 대제국의 황제지만 주위 환경과 여론, 미신 등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인가 보다. 운명의 이끌림! 그리고 ‘준비된 패배’를 이 보다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을까?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이 아뷔도스에 도착하자 그는 아뷔도스인이 만든 단(壇)에 앉아 해안을 내려 보며 육군과 해군 함대를 관병한다. 헬레스폰토스가 함선으로 덮이고 아뷔도스의 해안과 들판이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행복해 하다가 눈물을 흘린다. 숙부 아르타바노스가 이유를 묻자 크세르크세스는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 생각하다가 비감에 잠겼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페르시아가 이토록 발전한 것은 위험을 감수한 용기 때문이라며 숙부를 다독인다.

그는 높은 단 위에서 까마득하게 넓은 빈 들판에 까마득하게 많은 사람들이 캠프를 차리고 물을 떠 나르고 그 날 먹을 밥을 짓고 사열하는 모습을 본다. 이들 중 누군가는 내일이나 모래 전투가 시작되면 파리 목숨처럼 사라질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벌레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들, 그들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전쟁에 운명을 맡기고 하루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고 있다. 문득 크세르크세스는 그들의 운명이 가여워졌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있겠는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을까? 참여하지 않으면 국가의 폭력에 의해 죽을 것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 내일이 될지, 모래가 될지, 아니면 운 좋게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말한다. “큰 일은 큰 위험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법이오.” 황제이며 전투를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인 젊은 크세르크세스는 이 순간 인간의 짧은 삶에 대해 생각한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온갖 행태를 수집하여 소상하게 3차 페르시아 전쟁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잔악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물됨을 폄하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대목도 눈에 띄었는데 “수백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들 가운데 크세르크세스의 용모가 가히 뛰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페르시아 왕족의 외모에 대한 칭찬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도 나타난다. 플루타르코스는 4세기초 페르시아에 이어 대제국을 이룩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행적을 따라가는 <알렉산드로스 전>에서 다레이오스 3세와 그 왕비 및 페르시아 여인들의 외모를 극찬한다.

어쨌든 크세르크세스는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기는 인물이다. <역사>에는 크세르크세스에 대한 일화가 매우 많다. 그런데 나에겐 무엇보다 무소불위의 존재인 크세르크세스가 눈물을 흘리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전쟁을 앞둔 거대제국의 황제가 말이다! 그는 곧 제국의 체면을 구기며 전쟁에서 패한다. 그리고 페르시아로 돌아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대목은 ‘큰 일은 큰 위험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문장이다.

그 넓은 영토, 소아시아 전역과 그리스 반도 북쪽을 거의 다 평정한 대제국의 황제가 손바닥만한 도시국가 아테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

여기서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니체도 크세로크세스와 비슷한 말을 한다.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고. 그러니 ‘베수비오 화산가에 도시를 세우고 미지의 바다’로 출항할 준비를 하라고.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오 화산 옆에 도시를 건설하는 정신은 대체 어떤 정신일까? 니체에게 삶은 ‘영웅적인 감정이 춤추고 뛰어 노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다. 그렇다면 니체의 ‘위험하게 살아라.’ 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페르시아 원정 같은 전쟁에 나가거나 목숨을 버릴 각오로 살라는 것일까?

우리는 원시시대나 고.중세인들의 삶과 비교하면 위험하게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사고사나 질병에 의한 죽음 외에 삶에 크나큰 위험이 항존했던 옛날과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소확행이 유행어가 되었다. 대단히 영웅적인 삶도 바라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나 꿰차면서 큰 고통없이 사는 삶, 그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니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겁쟁이들. 곰에게 사탕을 물려주면서 쓸개 떼어 가는 인간의 간지를 느끼지 못하는 마비상태의 삶을 너희는 바라는가? 라고 되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니체의 ‘위험하게 살라’는 소확행은 아닐 것 같다. 앞서 말했듯 현대인은 사실 위험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위험한 삶은 어떤 삶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니체의 ‘위험하게 살아라.’를 창조하며 살아라! 싸우며 살아라!라고 이해하고 싶다. 일상생활에서는 조금만 자기 삶의 무게중심을 옮겨보는 실천이라고 말하고 싶다.

직진 길에서 옆길로 새기, 정해진 등산로의 코스 이탈하기. 샛길로 접어들어 자발적으로 헤매기. 안 보였던 풍경보기 등. 이런 것이 현재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위험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습관화된 신체의 리듬 바꾸기. 그것은 달리는 차가 급 브래이크를 밟았을 때 기우뚱하는 불편과 놀람을 경험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새로운 모든 것은 니체가 보기에는 ‘악한 것’이고 이 악한 것이 병리적인 익숙함의 자리에 새것을 생성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나의 고유한 정체성이라 믿던 힘관계의 다른 배치와 마주침에서 느끼는 생소함. 이 생소함을 견디고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 익숙한 나의 힘을 빼는, 그 힘에 구멍을 내고 기우뚱하는 자발적인 이탈. 그것을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 안에서 웃고 있을 때 나는 변하지 않으려고 나를 붙들고 있으며 나의 신체는 낯선 오솔길과 낯선 힘들이 낯선 노래를 만들어 내는 위험하고 창조적인 세계는 만나지 못한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야 한다. 수영장이든 바다든. 물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수영을 배울 수 없다. 물에 들어가서 예기치 않게 물을 마실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물의 흐름과 물결의 운동 방향을 익혀야 한다. 몸이 지상에서 균형을 이루던 힘을 비틀고 파괴해야 한다. 위험하게 살아라! 그것은 말하자면 습관화 된 몸의 내적 감각지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신체가 주변 낯선 사물과 서로 작용하는 방식을 익히는 무수한 시도, 그것이 위험하게 살기라고 나는 정의 내린다.

스케이트를 배우려면 엉덩방아 찧고 다리가 부러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넘어져 타박상을 입을 위험을, 춤추기를 배우려면 춤추기 전의 뻣뻣한 신체를 다르게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굳어버린 근육을 다르게 사용하는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

니체는 우리에게 삶의 대가가 되라고 말한다. 삶의 대가는 타자들과 만남에 열려 있다. 낯익은 안락함을 걷어차버릴 용기와 불편한 감각을 체화시키는 능력,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의 소유자만의 영역일 것이다. 자유정신의 소유자는 삶의 대지에서 춤추는 자다. 니체에게서는 잘 알다시피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무엇이 아니다. 육체가 자유로운 것과 정신이 자유로운 것은 단 한마디 몸이 자유로운 것이라는 말로 통합된다.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유속성과 연장 속성이 실은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하다. 정신과 육체의 구별이 니체에게는 무용하다. 해서 자유로운 몸, 자유정신의 소유자는 힘관계의 배치를 유연하게 하면서 새로운 아(我)와 타(他)의 힘 상승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니체의 위험하게 살기는 힘 상승의 삶 살기의 다른 이름이다.

해서 들뢰즈의 다음 문장은 니체의 위험하게 살라와 같은 맥락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각 층위에서 한 법칙에 예속된 주체는 자연 안에 있는 더 크고 항구적인 대상들과 관계함에 따라 반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유한 무능력을 경험한다. 또 이 무능력이 항구적인 대상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고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김상환역

‘반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란 다시 말해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이것은 위험하게 살지 못하는 무능력, 게으르게 자기 정체성 속에 박혀 있기에 자연의 변화하는 대상들과 새로운 힘의 배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자연의 ‘항구적인 대상들’은 매 순간 ‘항구적으로’ 변화한다. 이 대상들과 계속적으로 반복을 수행하는 능력이란 계속적으로, 자발적으로 이 대상들과의 흐름에 따라 내 자신을 흐르게 해야 한다. 내가 유동하는 존재로, 나를 고착화하지 않을 때 대상들과 나는 매순간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반복의 양상을 뛰지만 사실 반복이 가능한 것은 차이들을 생성하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는 관계는 흐름으로서의 반복이 아니다. 반복은 차이를 생성하지 못할 때 종료된다. 그것은 동일성 속에 소멸되는 것 일뿐 더 이상 반복으로 변주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반복은 생성의 다른 표현이다. 반복은 운동이며 차이의 생성이며 따라서 반복은 흐름으로서 나의 진동하는 힘 관계의 차이들의 생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본다.

크세르크세스는 몰락하고 본국으로 달아난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기보다 니체는 몰락을 향해 걸어가는 용감함에 박수를 보낸다.(전쟁 찬양하자는 것은 아니다.) 몰락도 도전과 공격도 없는 소학행의 삶을 니체는 죽음이나 약자의 어리석은 탐욕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몰락은 어떤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네 몸에 힘을 빼라! 너라고 믿는 너를 허물어라. 너에게서 도망쳐 나올 준비를 해라. 그리고 새로운 힘과 접속하라. 네가 너라고 믿는 것들은 너와 무관한 것이다.

나와 싸우고 나의 동료들과 싸우고 세계와 싸우는 싸움꾼 니체는 이 싸움 속에서 위험과 승리의 세계를 만난다. 이 싸움의 세계는 고통을 줄 수 있으나 이 고통은 바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 말이 싸움이지 이 싸움이란 자기의 내적 힘 강화와 타자의 힘 강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호 상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강화도, 어떤 운동도 고통이 따른다. 니체는 이 고통을 통과해서 위대한 것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달리 말하면 행복이며 행복을 통해 위대한 것, 즉 행복들을 계속 통과해 간다.

“더욱 섬세한 감관들과 더욱 섬세한 취향을 가지는 것, 정선된 것과 최상의 것, 그리고 적당하고 자연스러운 음식에 익숙해 있는 것, 경호원과 책임자로, 그리고 특히 더욱 강인하고 대담하고 무모하며 위험을 즐기는 정신의 도구로 정해져 있는 강인하고 대담한 육체를 즐기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소유, 자신의 상태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숨지 않는다: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라면 인간은 태양 아래에서 행복을 가장 잘 견디는 피조물이라는 훈장을 구입한다!.. 그는 항 상 모든 방면에서 그리고 가장 깊숙하게 고통에 노출되어 있을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가장 섬세하고 지고한 행복에도 노출되어 있을 수 있다.”- 니체 유고 <1881 봄-1882 여름> 674

니체에게 행복이란 힘에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즉 고양된 존재를 향해 시련과 대결하는 순간에 실현되는 감정이 아닐까? 그것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의 강인함 속에서 맛보는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이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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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은 이번 회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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