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빠트린 이유(63)
[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빠트린 이유(63)
  • 박승규 문화평론가
  • 승인 2019.05.0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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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 1407년(태종7) 6월 21일, 왕은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 2개를 준비했다. 도마뱀을 집어넣은 후, 자리를 펴고 향을 올렸다. 이어 푸른 옷을 입힌 어린아이 20명에게 버들가지로 도마뱀을 괴롭히게 했다. 그날 창덕궁 광연루에서 열린 기우제 장면이다.

물을 관장하는 신은 용. 평상시 물속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비를 만들어낸다고 여겼다. 용과 비슷한 도마뱀을 괴롭히자 비가 내렸다는 중국 소동파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따라 한 것. 미국 중부 인디언 풍습도 유사하다. 가물 때 개구리를 단지에 넣고, 물가 나뭇가지로 단지를 치며 비를 기원했다. 도마뱀과 버들가지, 개구리 등은 모두 물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다.

태종의 ‘도마뱀 협박 작전’은 이틀이나 계속됐지만 효과를 못 봤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했는데 비는 내리지 않았다. 도마뱀은 결코 용이 아니었다. 그 당시 도마뱀도 ‘꼬리 자르기’로 위기를 모면했을지 모를 일. 심지어 도롱뇽이나 지렁이(土龍)에게까지 기우제를 지낸 것을 보면 당시 가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만하다. 황당한 처방이라며 웃어넘기기에는 조상들의 간절함이 너무 절실하다. 4년 후 1411년, 도마뱀은 용을 깨우기 위해 다시 등장한다. 도마뱀을 놓고 진행한 ‘석척기우(蜥蜴祈雨)’는 세종과 예종 때도 경복궁 경회루 연못가 등에서 진행됐다. 이후 쭉 조선의 공식 기우제로 종종 행해진다.

▲ 등산로에 많이 보이는 아무르장지뱀
▲ 등산로에 많이 보이는 아무르장지뱀

■ 용을 깨워 비를 기원하다

농경 국가에서 물은 백성의 생존과 국가 존폐를 좌우한다. 비에 대한 관심은 멀게는 단군신화까지 올라간다. 환웅은 3명의 신하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는 모두 비바람과 관계된 인물이 아니던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상 관련 기록 424건 중 가뭄이 112건으로 가장 많다. 가뭄이 심할 때마다 왕은 자신의 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궁궐이나 종묘에서 제를 올렸다. 백제 아신왕 11년(402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벼가 타들어가자, 왕이 직접 횡악(橫岳·북한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동양에서는 물을 지배한다는 용과 관련한 의식이 많다. 특히 운행우시(雲行雨施), 즉 마음대로 비를 오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용은 가뭄 때 기우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용이 사는 웅덩이를 뜻하는 ‘용소’가 기우제 장소로 인기를 끈 이유다. 용을 그려 물속에 넣으면서 지내는 기우제 화룡제(畵龍祭)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화룡기우’의 유래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628년 신라 진평왕 50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시장이 있는 곳은 음기가 성한 까닭에 시장을 양기가 성한 남쪽으로 옮기면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기우제에 용이 등장한 사실은 여러 문헌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고려 1086년(선종3), 1089년 때도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화룡기우’를 진행했다.

▲ 호랑이 머리를 한강에 던져 기우제를 지냈던 한강 저자도. 압구정동 아파트 지을 때 모래를 퍼가 지금은 사라졌다.
▲ 호랑이 머리를 한강에 던져 기우제를 지냈던 한강 저자도. 압구정동 아파트 지을 때 모래를 퍼가 지금은 사라졌다.

가뭄이 극심했던 1402년(태종2) 7월 2일, 왕은 종묘사직과 명산·대천 등에 대신을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또 무녀와 맹인, 승려까지 모아놓고 비를 빌게 했다. 조선은 유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를 탄압했으나 도교·불교·무속 신앙이 뒤섞인 기우제는 예외였다. 평상시 천대를 받았던 맹인과 무당은 물론 조선시대 배척했던 승려들까지 기우제에 몽땅 동원됐다. 태종은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오면 참여했던 무당이나 승려에게 모시나 베, 쌀 등을 하사했다. 태종 재위 18년간 1403년(태종3)을 제외하곤 모두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나머지 17년 동안 매년 평균 2-3회씩 기우제를 지냈다.

■ 호랑이가 가장 무서워했던 것

도마뱀이 제대로 잠자는 용을 깨우지 못해서 일까? 대기근이 발생한 1416년(태종16) 5월부터는 호랑이 머리까지 동원해 기우제를 지냈다. 용이 산다는 강이나 용소 등에 호랑이 머리를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기우제 의례 중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두 동물이 싸울 때는 비가 온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북한산과 남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진짜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넣었다. 특히 태종·세종·문종·단종 시대만 보면, 실록 기록에 15번이나 보인다. 호랑이 머리를 강에 넣는 의식은 ‘침호두(沈虎頭)’라 하여 1809년(순조9)까지 관행으로 진행했다. 아마 조선 시대 호랑이가 최고 두려워했던 것은 곶감이 아니라 가뭄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5월 10일 경에 내리는 비를 특별히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른다. 이 날은 태종의 기일이다. 1422년(세종4) 태종이 승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무렵 날이 몹시 가물었다. 세종은 백방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태종이 근심하며 비장하게 말했다. “이렇게 심한 가뭄이 드니 백성들이 어찌 살라는 것인가. 과인이 죽어서 하늘에 올라간다면 천제(天帝)에게 즉시 비를 내려달라고 하겠다.” 그토록 비를 기다리던 태종이 승하한 4일 뒤, 실록은 ‘큰비가 왔다’고 적었다. 단비가 내린 그해는 풍년이 들었다. 이후 해마다 5월 10일이 되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백성들은 이를 일컬어 ‘태종우’라 했다. 이순신 장군까지 <난중일기>에서 ‘태종우’에 대한 언급했을 정도로 조선 사회에 널리 전파된 이야기다. <난중일기>에는 오랜 가뭄을 걱정하거나, 비가 내려 기뻐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온다.

▲ 드라마 ‘용의 눈물’ 태종의 기우제 장면
▲ 드라마 ‘용의 눈물’ 태종의 기우제 장면

■ 세종이 측우기를 만든 이유

논농사는 ‘물 농사’이기도 하다. 지금은 천수답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바둑판처럼 깔린 수로에 양수기와 지하수까지 끌어올려 농사를 짓기 때문. 저수지 등 관개시설이 열악했던 예전에는 비가 와야 논에 물을 댔다. 조선 왕조 시절 도합 1600번이 넘는 기우제가 열렸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에서 가뭄은 최악의 재해였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하늘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임금. 왕들은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환과고독(鰥寡孤獨·늙은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 의지할 데 없는 독거노인 등)을 구휼하고,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이가 없게 했다. 가뭄이 심하면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 수를 줄이고, 백성들의 부역 등을 없앴다. 왕부터 자중하면서 최대한 하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세종 즉위 이후에도 가뭄은 계속됐다. 즉위 초 10여 년간 단 한 해도 가뭄이 들지 않는 해가 없었다. 세종 5년에는 심한 가뭄 때문에 강원도 영서 지방 전체 가구의 3분의 1이 사라지고, 농토의 절반이 폐허가 됐다. 세종 7년에는 가뭄이 들자 임금은 궁 밖으로 나가 근교를 돌아보며 농부들에게 작황을 물었다. 농사를 망쳤다는 대답을 들은 세종은 점심도 먹지 않고 궁으로 돌아왔다. 세종은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경회루 동쪽에 초가집을 짓고 2년 동안 살 만큼 백성들과 아픔을 함께했다. 1426년(세종 8년) 2월에는 빈번한 화재로 한양 전체가 잿더미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가물어 바짝 마른 집에 옮겨붙었다. 인가 2000여 호가 불탄 대참사였다.

세종은 비록 여러 번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넣었지만, 단지 기우제만 올리며 비를 기다리지 않았다. 날씨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과학적인 영농법과 천문학을 장려하고, 고유 달력인 칠정산, 자격루, 측우기 등을 개발했다. 무엇보다 측우기는 세계 최초로 국가에서 쓰이는 ‘표준화’된 기구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상에 따른 체계적인 영농법을 백성들이 실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것이다.

■ 기우제에 숨어있는 과학의 원리

음양 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가뭄은 양기가 과도할 때 발생한다. 가뭄이 심했던 조선 태종 때는 궁녀들까지 3교대로 휴가를 내보냈다. 음양의 이치를 강조한 세자 양녕대군의 건의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성종과 중종, 정조 때는 혼기를 넘겼는데 결혼하지 못한 사람을 조사하고, 혼수품을 보조하며 결혼을 장려했다. 성종은 혼수 비용으로 쌀을, 정조는 돈 5백 푼과 포목 2필을 보조해주고 매달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영화 <궁합>에서도 유사한 스토리를 볼 수 있다. 극심한 가뭄과 흉년이 지속되던 영조 연간, 대신들은 혼기 찬 옹주의 혼례를 왕에게 고한다. 왕은 옹주의 혼사만이 가뭄을 해소할 것이라 믿고 대대적인 부마 간택을 실시한다. 조선 최고 역술가가 부마 후보들과 옹주의 궁합 풀이를 맡게 된다는 설정을 바탕에 두었다.

인공위성으로 우주를 탐사하고, 화성에 가는 시대다. 과학기술과 관개시설 발달에도 불구하고 기우 의례는 수천 년의 명맥을 이어온다. 요즘에도 날이 가물면 여기저기서 기우제를 지낸다. 과연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올까? 근거 없는 미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우제에는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기우제를 지낼 때 불을 크게 피우면 연기와 재가 하늘로 올라간다. 그 재가 응결핵이 돼서 수증기를 끌어모아 비를 내린다. 제물을 태우던 기우제는 원시적 인공강우 기술이기도 하다. 인공강설 실험과 같은 맥락이다. 요즘은 비행기나 드론을 이용해 요오드화은 같은 ‘구름씨’를 뿌려 인공적으로 비를 만든다. 인공강우까지 성공한 인간이지만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에는 여전히 미약한 존재다. 인간이 천재지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한 초월적 존재에 기대는 전통 의례는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지하 시인이 ‘타는 목마름’을 외친지 그 언제이던가. 서민들은 소득 양극화와 청년 실업, 가계 부채, 노인 빈곤 등으로 가슴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비도 그냥 내리는 비가 아니다. 모든 것을 씻어주는 폭우성 빗줄기를 갈망한다. 모든 국민의 마음속 가뭄까지 씻어주는 현대판 기우제가 필요한 때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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