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금실 좋은 부부를 가리켜 ‘잉꼬부부’라고 부른다. 거문고와 비파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알콩달콩 하게 사는 부부 사이를 일컬을 때 쓴다. 그런데 ‘잉꼬(いんこ, 鸚哥)’란 말은 일본 말로 앵무새다.

예를 들어 연상 연하 비(정지훈)·김태희 커플은 앵무새 부부’인 셈. 하지만 잉꼬를 앵무새로 바꿔 부르면 ‘갑분싸’. 시쳇말로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뀐다. 대개 앵무새는 남의 말만 흉내 내는 새라는 안 좋은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잉꼬’라고 부르면 왠지 어감상 더 사이가 좋은 이미지로 둔갑한다. 실제는 ‘잉꼬=앵무새’인데 말이다.

잉꼬는 그냥 작은 종류 앵무새일 뿐 부부금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부부금실의 대명사인 원앙도 마찬가지. 원앙은 어느 한 쪽을 잃더라도 새로운 짝을 얻지 않는다고 하여 부부간의 정절과 애정 또는 백년화목의 상징으로 여겼다.

신혼부부의 이불은 ‘원앙금침’이라 불렀다. 그러나 원앙은 전혀 금실이 좋지 않다. 실제 원앙 수컷은 천하의 바람둥이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바로 떠나버린다. 혼자 남은 암컷이 새끼들을 키우는 게 원앙의 진실이다.

전통혼례식에 등장하는 한 쌍의 나뭇조각은 원앙이 아니라 기러기다. 7080 가수 전영록의 노래 <애심> 중의 가사 ‘영원히 변치 않는 원앙이 되자’는 이제 고쳐야 하는가?

해적하면, 함께 연상되는 모습이 어깨에 앉아 있는 앵무새다. 소설 <보물섬>의 실버 선장과 앵무새의 이미지가 워낙 인상 깊어 대표적인 해적 캐릭터로 자리 잡았기 때문. 17세기 전후, 중남미의 물자들이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선 카리브 해를 거쳐야 했다.

해적들은 주로 이런 운반선들을 노렸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도 앵무새가 등장한다. 예로부터 뱃사람들은 오랜 항해로 인한 무료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몰티즈 견종은 지중해 페니키아 선원의 반려동물로 배 안에서 사육됐다고 한다.

특히 앵무새는 해적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다름 아닌 팔아먹기 좋아서다. 해적들은 전 세계 바다를 누리며 해적질을 했지만, 국가에서 인정한 사략선의 경우 무역상 노릇도 맡았다. 앵무새나 공작과 같은 새들은 여러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좋아한 사치품 중의 하나였다.

앵무새는 유럽에서 단연코 인기였다. 화려한 깃털을 가지고 사람과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앵무새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귀족들의 애완동물로 크게 사랑받았다.

■ 당나라 때 CCTV. 초록 앵무새 ‘녹의사자(綠衣使者)

앵무새는 약 372종에 달한다. 다른 새보다 지능이 높은 편에 속하는데 대형 앵무류 같은 경우에는 5살 어린이에 버금가는 IQ를 보인다. 훈련에 의해 간단한 물건 옮기기 등이 가능하다. 언어능력과 더불어 장점으로 여겨져 동물원 쇼에서 보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앵무새는 해적보다는 여인과 잘 어울린다. 르누아르 그림이나 19~20세기 ‘오달리스크’ 그림에서도 앵무새 모습을 자주 나온다. ‘오달리스크’는 방을 의미하는 터키어 ‘오다’에서 유래했다. 옛 터키 황제 ‘술탄’의 시중을 들던 여자 들을 말한다.

그들은 엄중한 감시와 금기의 장소인 ‘하렘’이라는 곳에서 기거했다. 아랍어로 ‘하렘’이란 신성한 지역을 뜻하는데, 부녀자가 남편 말고 다른 남자들과 마주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인도에서도 앵무새는 원앙보다 부부 금실의 상징이 됐다. 이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인도 앵무새 70일 야화>에서 비롯됐다. 옛 인도의 한 부유한 상인이 장사를 떠나면서 아내의 부정을 걱정해 앵무새에게 감시를 시켰다. 아내는 어느 날 멋진 왕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아내가 매일 밤 왕자를 만나러 가려 하면 어김없이 앵무새는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며, 문제를 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왕자를 만나러 가도 된다는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번번이 해답을 찾으려고 밤새 골몰히 생각을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70일이 지난 후 여행길에 돌아온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앵무새의 도움으로 정절을 지킬 수 있었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삶의 성찰과 지혜를 얻게 됐다는 게 골자다.

당나라 시절 수도 장안에 살던 양숭의의 처 유씨가 이웃집 이씨와 사통을 하면서 양숭의를 죽이려고 했다. 부자 양숭의는 앵무새를 좋아하여 항상 몸소 먹이를 주며 길렀다. 어느 날, 양숭의가 잔뜩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자 유씨와 이엄이 그를 죽여, 물이 말라버린 우물 속에 매장해 버렸다.

하인들 중에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앵무새만 이를 보았다. 유씨는 모른척하며  남편을 찾아달라고 관청에 신고했다. 관청에서는 밤낮으로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가 없어 다시 양숭의의 집을 수색했다. 그런데 횃대 위에 있던 앵무새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을 했다.

“집주인을 죽인 자는 유씨와 이씨다.” 관리가 이들을 잡아 고문하자 사실대로 실토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법에 의해 처리하고, 당 현종에게 보고했다. 현종은 앵무새가 의기가 있다고 칭찬하며 궁궐에 데려와 기르고, ‘녹의사자’에 봉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새를 기르는 사람이 많은데, 그중에서 ‘녹의사자’ 녹색 앵무새를 기르는 사람이 상당하다. 똑똑한 앵무새는 CCTV 이자 스토리 텔러이고, 사랑의 오작교… 아니다. 오작교는 까마귀와 까치이니, 앵무교 역할을 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앵무새 덕후’ 신라 흥덕왕

우리나라에서 앵무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서기>에는 647년 신라 진덕여왕 즉위 초, 656년 백제 의자왕 16년, 686년 신라 신문왕 6년에 까치와 함께 총 3번에 걸쳐 일본에 앵무새를 보냈다고 적혀있다.

당나라 시절, 귀족과 후궁들이 애완동물로 개와 앵무새를 기르는 일은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앵무새는 새장에, 후궁들은 깊은 궁궐에 갇혀 있다. 서로 운명이 비슷해서일까. 적막한 궁궐에서 후궁들은 고양이, 두루미 같은 새, 심지어 물고기 같은 동물들을 항상 길렀다.

당 현종의 애첩 양귀비는 ‘강국자’로 불린 애완견과 하얀 앵무새를 키웠다. 백옥처럼 하얀 앵무새는 평소 황금으로 만든 새장에 있었는데, 말도 잘하고 양귀비의 뜻을 잘 헤아렸다. 이 앵무새는 안록산이 양귀비의 환심을 얻기 위해 준 선물이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733년, 신라 성덕왕이 당 현종으로부터 흰색 앵무새 한 쌍을 포함해 오색 비단 등의 예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무렵 당 황실에 실제로 흰색 앵무새가 다수 있었다는 증거다. <삼국유사>에는 826년에 즉위한 신라 흥덕왕이 짝을 잃은 앵무새가 슬퍼하다 죽는 것을 보고 노래를 지었다는 설화가 있다.

당나라에 다녀오던 사신이 앵무 한 쌍을 왕에게 바쳤다.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자, 홀아비가 된 수컷이 짝을 찾으며 슬피 울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왕은 거울을 걸어놓았다. 수컷 앵무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기 짝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쪼아도 반응이 없자 이내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슬피 울다 죽었다.

흥덕왕이 죽은 앵무새를 두고 노래까지 지어 공감한 것은 자신의 처지가 실제로 그와 비슷했기 때문. 흥덕왕은 즉위하던 해 장화부인과 사별한 다음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아마 ‘잉꼬부부’란 말은 통일신라 흥덕왕 때 기록에서부터 앵무새가 금실이 좋다고 알려진 것이 아닐까.

■ 앵무새는 삼국시대부터 외교 선물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나 송나라 상인들에 의해 앵무새와 공작이 들어왔다. 앵무새가 새겨진 청자도 출토됐다. 이규보는 “모두가 말할 줄 알아 그물에 잡혔구나. 애교스러운 아이처럼 혀 놀림 어색하고, 차려입은 처녀인 듯 꾸밈새가 예쁘구나”라는 앵무새에 대한 시를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앵무새와 관련한 기록은 더 자주 보인다.

1406년(태종6) 7월 1일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무역 사절단 ‘진언상’은 군산 선유도 앞  바다에서 왜구에게 당했다. 그는 지금의 자바를 중심으로 한 ‘조와국’, 즉 ‘마자빠힛’ 왕국의 사신이었는데, 무역선에 실었던 공작·호로새·앵무새와 물품을 몽땅 뺏기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1407년(태종7) 6월 명나라 영락제의 사신이 앵무새 3쌍을 가지고 왔다. 태종은 답례로 흰 종이 8천장을 보냈다. 태종은 바로 전년 조선에 오던 앵무새는 해적에 뺏겨 구경 못했지만, 명에서 보낸 앵무새를 대신 구경한 셈이다. 1431년(세종13) 5월에는 일본에 답례품으로 앵무새와 학, 흰 오리 등을 보냈다. 그 앵무새는 태종 때 받은 앵무새가 번식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1462년(세조8) 1월, 세조는 유구국(=오키나와)이 간절하게 원한 대장경을 주면서, 다음번 사신 편에 공작과 앵무새를 보내달라고 먼저 요청했다. 유구국은 동남아와 교역했기에 조선보다는 앵무새를 손쉽게 구했다. 유구 국왕이 보낸 앵무새는 5년 후 1467년 7월, 한양에 도착했다.

애완동물 마니아였던 성종의 경우 앵무새까지 키웠다. 성종은 진귀한 새를 8도에서 진상 받았는데, 특히 붉은 부리 고니(백조)를 좋아했다. 1480년(성종11) 8월에는 명나라에 앵무새와 원앙 각 10마리 등을 보냈다.

1499년(연산군5년) 12월, 연산은 왕실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에 앵무새 10여 마리를 정교하게 그려오라고 일렀다. 그 시절 최소 10여 마리 이상 앵무새가 있었다는 증거다. 3년 후 1502년 11월 연산군은 “사람의 말을 잘 흉내 내는 앵무새를 선왕(성종) 때 일본에서 바쳤으나, 값만 비싸고 나라에 이익이 없었다”고 짚었다.

연산은 앵무새 값이 명주 1천여 필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그 시절 조공 무역 시스템은 철저한 ‘give and take’였다. 국가 권위를 세우려면, 받은 물품에 대해 그 이상의 사여 물품을 줘야 했다.

■ 궁녀 감별사 앵무새?

정조 연간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같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가 수집한 사리가 나온 앵무새 이야기 한 토막. “동도에 어떤 사람이 앵무새를 길렀는데, 지혜가 뛰어나 스님에게 시주했다.

스님이 앵무새를 가르쳐 불경까지 외울 정도가 됐다. 간혹 횃대에서 말도 없고, 움직이지 않았다. 까닭을 물었더니, ‘심신을 모두 움직이지 않음은 무상의 도를 구하기 위해서다’라고 대답했다. 앵무새가 죽었을 때, 태워보니 사리가 나왔다.”

앵무새와 관련해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또 있다. 조선 시대 궁녀 선발 때 처녀 확인 방법으로 앵무새를 이용했다는 것. 앵무새의 피(鸚血) 한 방울을 팔목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탈락시켰다고 한다. 과연 앵무새가 조선 시대의 처녀 감별사 역할을 했었을까? 앵무새는 조선 중기까지 지금 시가로 수천만 원에 달했다. 어쩌다 한 두 마리 외교 선물로 들어올 정도였다. 그 비싼 앵무새를 함부로 죽인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중국 <박물지>에 도마뱀에게 붉은 흙을 먹여 기르면 온몸이 붉어진다고 한다. 이를 빻아서 여자의 몸에 바르면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오직 남자와 교합할 때만 없어진다고 한다. 이 고문헌 속 내용을 변형해 궁녀의 정조를 강조하기 위한 야사로 전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찰리’란 암컷 앵무새를 30년간 키웠다. 집안에 동물원까지 차려놓고 양, 돼지, 소, 백조, 심지어 표범에 이르기까지 각종 동물을 기르던 처칠은 1937년 청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암컷 마코 앵무새를 사들였다. 그리고 ‘망할(Fuck) 나치’, ‘망할 히틀러’라는 욕설부터 가르쳤다.

1965년 처칠 사후 찰리는 욕을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싫어해서 격리됐다. 그 욕쟁이 앵무새는 2004년까지 살았다. 나이는 무려 114살이었다. 처칠의 딸은 ‘찰리’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처칠은 “독수리가 조용할 땐 앵무새가 지저귄다”는 말을 남겼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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