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1500년 동안 지하에서 웃는 사람. 신라장군 이사부. 주지하다시피 그는 울릉도를 정벌해 이름을 날렸다. 덕택에 지금까지 전 국민에게 칭송받는다. 정작 그는 우산국 정벌보다 가야 정벌에 더욱 두각을 드러냈다. 가야인에게는 가히 저승사자와 같았던 인물. 이사부에 의해 주축인 대가야도 멸망했다.

서기 512년(지증왕13) 이사부는 우산국 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우산국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힘으로 다루기 어렵고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가짜 사자를 큰 배에 싣고 가 항복을 받았다. 물론 낯선 맹수는 심리적으로 두렵고 큰 위협이 되었을 법하다.

전쟁 때는 종종 맹견을 사용한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악명 높은 스페인 제국주의자 피사로 형제가 잉카제국을 정벌할 때 일. 그들은 레온치코(스페인어로 작은 사자라는 뜻)라는 맹견 2000마리를 동원해 원주민을 죽이고, 개 먹이로 썼다. 정복자 발보아 역시 레온치코로 파나마 원주민을 학살했다. 발보아는 오늘날 ‘태평양을 발을 담근 최초의 유럽인’이자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받는다.

역사기록은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할 때 만만하고 쉽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섬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이사부가 강릉·삼척지역 실직주 군주가 된 것은 505년경. 실제 정벌이 이뤄진 것은 512년이니 7년이 소요됐다. 구전설화에는 이사부가 최소한 2차례 이상 원정을 시도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이사부는 사자를 어떻게 알았나? 그리고 하필이면 왜 사자일까? 울릉도에는 별다른 맹수가 없었다. 내륙에 흔한 곰이나 호랑이를 잡아다 풀어 놓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자는 한·중·일에 모두 없던 동물이다. 일본에는 호랑이도 없었다. 동물원도 없던 시절. 이사부와 신라인들은 사자를 어디서 알고 나무 사자를 만들었을까? 마치 고구려 벽화 속 주작과 현무와 같은 상상 속의 동물로 여겼을까? 과연 우산국 정벌의 진실과 이사부가 동원한 사자의 실체는 무엇일까?

 ■ 이사부는 정말 사자를 봤을까?

사자 형상은 불교의 전래와 결합해 유입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사부의 우산국 원정 다음이다. 삼국 중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가 신라다. 고구려는 371년 소수림왕 때, 백제는 384년 침류왕 때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오면서 공인됐다.

신라는 가장 늦게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승려 원표가 오면서 정식으로 전해졌다.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로 쉽게 전파되지 못하고, 527년(법흥왕14) 이차돈이 순교한 후 비로소 공인받았다.

불교는 종교적 역할 이외에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전달해 문화 발달에 공헌하고, 중앙집권화에 도움을 줬다. 신라의 불교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사자 모양은 경주 감은사 사리장엄구 사천왕상에 새겨진 사자다. 이사부의 우산국 원정 170년 후인 682년 일이다.

결국, 우산국의 사자 소동 속의 사자는 실제 사자가 아니다. 이사부가 진짜 사자를 보고, 이를 모방해 나무 사자를 만든 것도 아니다. 무섭고 낯선 짐승을 볼 때 사람들은 놀라기 마련. 우산국 사람들이 사자를 닮은 사자견 티베탄 마스티프(Tibetan Mastiff)를 보고 놀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찌 보면 독도와 울릉도에 상당수 서식했던 큰 바다사자를 혼동했을 개연성도 크다.

사자견은 대단히 사납기로 유명하다. 원래 늑대나 설표(눈표범)로부터 양과 같은 가축이나 사람들을 지키며 맞서 싸우던 녀석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짱아오(藏獒; Zangao)’라고 한다. 티베트를 일컫는 ‘서장(西藏)의 큰 개’라는 뜻. 티베트 현지에서는 ‘떠키(Dokhyi ; 집을 지키기 위해 묶어놓은 개, 아니 너무 무서워서 묶어 놔야 할 개) 또는 ‘썬거’(사자)라고 부른다.

한반도에는 수렵을 생업으로 한 나나이족 등 여러 북방 민족을 거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라가 동해안 진출 과정에서 고구려 영향권에 있었던 실직국 지역에서 사자견을 얻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신라군이 우산국을 칠 때 처음 본 사자견이나 바다사자를 보고 놀란 것을 후대의 기술과정에서 바뀌었을지 모른다.

이사부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1145년> <삼국유사;1281년>에 실려 있다.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불교가 왕성했던 고려 시대 때 기록이다. 최소 600~70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작성됐다. 울릉도 정벌의 역사에는 종교적 의도가 숨어 있다. 무엇보다 불교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사자 프레임’을 씌운 일종의 프로파간다 아닐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중국 중심 사관에 물들었다고 지적받는다. 특히 <삼국유사> 편찬 당시 고려는 원(몽골)에 완전히 예속되어 원의 문화가 널리 퍼지고, 일본 정벌로 인한 부담으로 사회가 피폐해진 시기였다. 이 때문에 일연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 자주정신과 불교에 의한 민중 구원을 강조했다.

■ 지증왕이 64세가 되도록 장가를 못 간 이유

지증왕이 유명해진 건 울릉도를 복속시킨 이사부 덕택이다. 그는 늦도록 결혼을 못 했다. 남근이 너무 큰 ‘대물’이었기 때문. 서기 500년 64세에 늦은 나이로 왕위에 올라 14년간 재위했다. 왕이 되자 본격적으로 배필을 구했다. 신하들은 온 나라를 수소문했다. 그 무렵 정체불명의 영물 개가 등장한다. 이 개는 신라 왕실의 후계와 왕실의 안정을 담보할 왕자를 낳을 왕비를 찾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주 모량부의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큰 개 2마리가 ‘북’만한 크기의 누런 똥을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것을 봤다. 대개 꿈이나 설화에서 똥은 단순한 오물이 아니다. 재물이자 복덩이다. ‘북처럼 큰 똥’을 눌만 한 개는 사자견 정도의 덩치라야 어울린다. 신하들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 똥 싼 주인공을 찾았다. 한 소녀가 말하기를 이는 ‘모랑부 상공의 딸이 빨래하다가 변을 본 것’이라 했다.

딸을 살펴보니 키가 7자 5치(지금 키로 환산하면 172.5cm)나 됐다. 당시 여인의 평균 키를 대략 150cm 정도로 추정하는데, 장신인 셈이었다. 왕의 배필로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되어 이 사실을 지증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크게 기뻐했다. 곧 수레를 보내 정중하게 맞았다. 지증왕은 개 덕분에 64살에 왕비를 얻어 아들 법흥왕을 낳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의 왕비 연제부인은 이찬 등흔의 딸’이라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 왕의 음경 길이가 기록된 왕이 딱 2명이다. 둘 다 신라왕인데, 지증왕과 경덕왕(재위: 742년∼765년). 지증왕의 음경 크기는 무려 1자 5치(23cmX1.5=34.5cm), 경덕왕은 8치(1치는 1척의 1/10, 29.7cmX0.8=23.76cm 였다.

1자의 길이가 다른 이유는 시대별 서로 다르기 때문. 지증왕 때는 한척(漢尺; 23cm), 경덕왕 때는 당대척(唐大尺; 29.7cm)을 적용했다. 고대 사회에서는 남근 숭배 사상이 많이 나타난다. 지증왕과 경덕왕의 남근이 컸다는 이야기는 두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이 강력했음을 말해준다.

■ 신라 왕실의 스캔들을 목격한 사자개

신라 진흥왕은 재위 27년(566년)에 왕자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는 진흥왕 33년(572년)에 죽었다. 이후 동생인 금륜이 576년, 25대 진지왕이 됐다. 당시 신라의 왕위 계승은 부자 상속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엄밀히 보면 금륜은 동륜 태자의 아들(26대 진평왕), 태손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진지왕은 즉위하자마자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해 국정을 맡겼지만 왕이 된지 불과 만 3년 만에 폐위됐다. <삼국사기>에는 자세한 이유가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음란함에 빠져 정사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폐위됐다”고 밝혔다.

태자 동륜이 죽고, 이어 금륜이 태자가 되고, 왕이 되자마자 곧 폐위된 자세한 내막은 신라사의 대표적 미스터리였다. 이런 문헌적 공백은 <화랑세기>가 제공해 준다. 비록 역사학계에서 논란이지만, 정사에 없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다. 신라 왕실을 뒤엎은 엽기적인 이야기이자, 신라 1000년 역사상 가장 불륜 행위의 끝판왕이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572년 3월 진흥왕의 장남 동륜 태자는 부왕의 후궁인 보명궁주가 사는 전각의 담을 밤에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사망했다. 진흥왕이 태자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태자가 보명궁주는 물론 왕의 다른 후궁인 ‘미실’과 사통한 사실이 들통났다.

이 막장 사건으로 인해 신라 왕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런데 진흥왕의 후궁 미실은 동륜 태자뿐 아니라 차남인 금륜 과도 몰래 사통했었다. 사실 동륜 태자는 미실이 풀어 놓은 사나운 개에 물려 죽은 것.

미실은 금륜을 왕태자로 옹립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왕이 된 금륜이 자신을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모후인 사도부인과 공모해 진지왕을 폐위시켰다. 그야말로 점입가경. 그리고 다시 죽은 동륜 태자 아들을 진평왕에 옹립했다. 진흥왕의 아들이자 미실의 연인이었던 동륜과 금륜이 모두 미실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도대체 신라의 팜므파탈 미실에겐 몇 명의 남자들이 있었을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다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미실의 남자관계는 물론 그녀의 존재 자체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화랑세기>에만 등장한다. 몰래 담을 넘던 동륜 태자를 물어 죽인 큰 개(오·獒)가 바로 ‘티베탄 마스티프’ 견종이다.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된 선덕여왕(김덕만)은 진평왕의 맏딸. 그녀의 동생은 서동(백제 무왕)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선화공주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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