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외국을 잠시 다녀왔습니다. 잠시라고 했지만 오가는 날을 합해 22일간이니 짧지는 않았습니다. 짧지 않은 잠시 동안 나라를 비워 보니 그렇게 심신이 맑아질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사 다 알고, 재단하고, 해결할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재잘대는 논객들, 그리고 아무리 떠들어도 마이동풍인 정·관객(政官客)들 모습이 눈과 귀와 머릿속에서 멀어지니 펼쳐지는 세계가 모두 신천지인 것 같았습니다.

여행 중 1,000만 명에 이른다는 인도 사두(sadhu 힌두교의 고행 수도승)들의 철학적 담론을 접한 것은 가장 신선한 청량제였습니다.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30여 년 전 1주일간의 주마간산 격 인도 여행 때 어슴푸레 느꼈던 감상과 겹쳐 삽상한 감흥을 주었습니다. 집을 나와 고행을 하며 진리를 찾는 사두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명언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인도입니다. 몇 편을 나름대로 재편집해 소개할까 합니다.

# 무학 노인에게서 배운 작가 수업
첫 인도 여행 때, 남인도 행 열차 안에서 한 힌두 노인이 내 목에 걸린 끈 달린 볼펜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끊임없이 메모를 해야만 하지요. 특히 여행을 할 때는 훗날의 기억을 위해 많은 것들을 적어 놓아야만 합니다. 이 볼펜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나는 노인에게 작가 수업을 시키듯 대답했다.

글을 배운 적이 없다는 노인은 한참 뒤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작가가 아니지만 당신이 한 말에 동의할 수가 없소. 당신이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글로 써야 할 것이오. 진정으로 경험한 것이라면 당신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의 가슴속에 새겨지기 때문이오. 가슴에 새겨진 경험을 갖고 글을 써야 좋은 글이 되는 것 아닌가요?”

너무 멋진 말이어서 수첩을 꺼내려는데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영혼 깊이 새겨진 진실한 경험이 아니라면, 그것은 글로 쓸 가치도 없소. 머릿속에 한순간 스쳐지나가고 마는, 그래서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소?” 나는 부끄러움에 슬그머니 볼펜을 벗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10년 전 열차 안에서의 작가 수업은 나의 글쓰기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 식당 주인의 장사 철학
인도 여행 몇 년 만에 발견한 그럴듯한 싸구려 식당에서 나는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콧수염에 풍채 좋은 식당 주인 라자 고팔란은 배가 고파 온갖 음식을 주문한 나에게 “사람이 메뉴를 먹을 순 없는 일이오. 아무리 메뉴를 들여다보아도 배가 부를 리 없소. 세상의 모든 책이 다 그렇듯이!”라고 한마디 던졌다. 종업원들이 모두 결혼식에 가 메뉴에 적힌 음식을 다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이 직접 끓인 멀건 수프와 전날 만든 것 같은 만두 몇 개로 허기를 겨우 면하고 식당을 나섰다.

섭섭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끝마다 명언이 튀어 나오는 주인에게 “또 봅시다”하고 인사했다.그가 얼른 되받았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신이 미소 짓고 있는 게 보이지 않소? 우리가 내일 보게 될지 다음 생에 보게 될지, 어떻게 알겠소.” 이튿 날 아침, 나는 다음 생에 보게 될지 모른다는 식당 주인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다시 그 식당을 찾았다. 네팔 여행 1주일 만에 네팔 전문가나 된 것처럼 떠들어 대는 손님에게 주인은 “인도에서는 인도만 생각하고, 네팔에서는 네팔만 생각할 것!”이라고 일갈하는 중이었다.

고팔란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서길래 엉겁결에 따라가 장을 보고 돌아오니 점심때가 되었다. 메뉴를 보고 ‘베지터블 브리아니’와 ‘베지터블 플라오’는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고 물었다. “둘 다 먹어 보시오. 그러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알게 될 거요. 지식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오.” 주인은 메뉴판을 회수하며 주방을 향해 외쳤다. “여기 베지터블 브리아니와 베지터블 플라오 1인분씩.” 그리고는 “음식과 메뉴판이 서로 다를 때는 메뉴판을 믿지 말고 음식을 믿을 것!”이라는 훈계도 잊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식판에 밥과 수프, 반찬이 칸칸이 담긴 대중 음식 탈리를 주문했다. 맛이 있었지만 수프가 약간 짰다. 그것을 지적하자 고팔란은 대뜸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간을 맞출 수 있지만, 소금에 음식을 넣으면 짜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지요. 인간의 욕망도 마찬가지요. 삶 속에 욕망을 넣어야지, 욕망 속에 삶을 집어넣으면 안 되는 법이오!”라고 받아쳤다. 그는 책이 아닌 삶에서 얻은 지혜를 향기 있는 명언으로 버무릴 줄 아는 영혼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 더러운 여인숙에서 얻은 교훈
‘올드 시타람’ 여인숙의 ‘올드’는 ‘고풍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래되고 형편없이 낡았다’는 뜻이었다. 늙은 주인 시타람이 우선 방부터 구경하라고 해서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강아지만한 쥐가 앞발을 곧추세운 채 나를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누추하기 짝이 없는 방의 수도꼭지는 천정을 향했고, 베개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벽의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나무 침대는 화장터에서 쓰일 장작감이나 다름없었다. 날은 저물고, 여행에 지쳤지만 “방이 너무 더럽다”며 깎아 달라고 하자 주인은 “네버 마인드”(신경 쓰지 말라)라며 손을 내저었다.

“숙박비를 깎는다고 방이 새것이 되는 건 아니잖소. 당신이 지금 이 방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방값을 깎는다 해도 완벽하게 만족하진 못할 거요.” 색다른 논리를 편 주인은 또 한마디 덧붙였다. “한 가지가 불만족스러우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운 법이오. 당신이 어느 것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있다면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오” 앞니가 두 개나 빠졌지만 그의 입심 하나는 당해 낼 재간이 없어, 만족할 만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더러운 방에 짐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배낭이 뚫린 채 스웨터에 구멍이 나고, 비닐봉지에 든 비상식량이 싹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어제 저녁 그 쥐의 소행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따졌지만 돌아온 것은 노인의 입심이었다. 시타람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신상에 향을 피우며 말했다. “신이 준 아침을 불평으로 시작하지 마시오. 그 대신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시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불평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가 있겠소? 당신이 할 일은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배우는 일이오.”

낮에 사원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니 옥상에 빨아 널어 둔 티셔츠가 보이지 않았다. 원숭이 짓이라고 둘러대는 종업원을 노려보고 있는데 주인이 물었다. “당신은 행복의 비밀이 무엇인지 아시오?.”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그가 스스로 대답했다. “행복의 비밀은 당신이 무엇을 잃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얻었는가를 기억하는 데 있소.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다는 걸 기억하는 일이오.” 그러고는 거역 못할 일침을 놓았다. “당신은 지금 인도에 여행을 온 것이지, 불평을 하러 온 것은 아니잖소.”

서너 해 뒤 다시 찾은 올드 시타람 여인숙은 뉴 시타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앞니 빠진 노인은 갠지스 강을 건너 세상을 떠났고, 아들 시타람 씽이 멋지게 개조한 ‘새것’이었다. 나는 뉴 시타람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이튿날 다른 곳으로 옮겼다. 새 여인숙에는 금빛 나는 샤워 꼭지와 폭신한 베개가 있었지만, 올드 시타람 노인이 갖고 있던 ‘영적 향기’가 없어서였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준 올드 시타람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악어조차도 눈물을 흘린다는 인도의 가난, 1달러면 하루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수억 명의 빈곤층이 사는 인구 대국, 장마가 오면 온 나라가 커다란 방주처럼 물에 뜨는 대륙.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유 해피?" 하고 아침인사를 건네는 인도 사람들은 행복해 보입니다. 타산적 궤변이 아닌 철학적 사변(思辨)으로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일까요?
“세상 속에서 살라. 하지만 세상에 속하진 말라”는 잠언처럼 난해한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홍묵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다. 이후 (주)청구 상무이사,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주)화진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언론사 정부기관 기업체 등을 거치는 동안 사회병리 현상과 복지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사의 기고문을 써왔으며 저서로는 한국인의 악습과 사회구조적 문제를 다룬 '한국인 진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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