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 수면을 빨갛게 물들이고 선 벚나무, 긴 머리 소녀처럼 늘어진 가지를 휘날리는 수양버들… 벤치에 앉아 호수 위에 그려지는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 뒷짐 지고 거북이걸음으로 산책하는 사람, 유모차를 밀며 아기와 가을볕을 즐기는 아낙, 막 점심을 먹고 나와 종이컵을 손에 든 채 동료들과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 도심 공원으로 자리 잡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石村湖水)의 가을 풍경입니다.

언제부턴가 이 호수에는 겨울 철새 백조 두어 쌍이 터를 잡고 눌러앉았습니다. 백조들이 수면 위를 유영할 때마다 긴 이랑이 그 뒤를 따르고 하얀 그림자가 얼비치어 새털구름처럼 퍼져 나갑니다. 어쩌다 은백의 큰 날개를 활짝 펼쳐 휘저을 때면 백광(白光)의 플래시라도 터뜨린 듯 호수 전체가 환해집니다. 백조의 화사한 날갯짓에 호숫가를 거닐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마음이 설레곤 합니다. 송파 지역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호수의 매일 매일이 작지 않은 축복입니다.

석촌호수는 1970년대 초반 두 줄기로 나뉘어 있던 한강 송파나루 물길을 하나로 모으면서 생겨난 인공호수입니다. 송파대로가 호수 복판을 가로질러 호수는 동호와 서호로 나뉘어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호수 주변에 나무를 심고 산책로와 쉼터를 만들면서 석촌호수는 송파구가 자랑하는 호수공원이 되었습니다. 호수의 반쪽인 서호는 롯데월드의 놀이터가 되면서 종일 안내 방송과 유객(遊客)들의 환호성으로 소음(騷音) 공장이 되어버렸지만 동호만은 최근까지도 주민과 인근 직장인들의 온전한 휴식처로 사랑받아온 터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재벌기업 롯데가 그 동호 언덕 위에 123층짜리 초고층 빌딩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높다란 타워크레인의 그림자가 수면을 가로지르고 산책길도 작업 차량과 건설기계 소음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정작 사건은 서울시와의 줄다리기 끝에 문을 연 롯데월드몰 부분 개장 행사와 함께 벌어졌습니다. 행사 일환으로 ‘러버 덕’인지 뭔지 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노란색 고무 오리가 동호의 수면에 뜬 것입니다. 호수면의 넓이에 비해 아파트 6층 높이(19.5m)로 턱없이 큰 고무 오리는 마치 유아용 비닐 물놀이 풀에 오리 인형을 띄워 놓은 것처럼 기이한 모습입니다.

플로렌타인 호프만이라는 네덜란드의 설치 예술가는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처음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평화와 행복의 메시지를 전한다며 몇 년 전부터 프랑스, 일본, 네덜란드 등지에서 순회 전시됐는데 그게 작가의 애초 의도인지 행사 주최 측의 호도(糊塗)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고무 오리의 석촌호수 등장은 때맞춰 문을 연 '롯데월드몰'의 공공예술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롯데월드몰의 개장 기념 마케팅 홍보인 셈입니다.

놀라운 것은 몰려든 인파의 반응입니다. 너도나도 그 고무 오리를 카메라에 담느라 아우성입니다. 고무 오리를 처음 본 사람들의 첫 마디는 “우와, 진짜 크다”거나 “정말 귀엽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덩치로도 귀엽다는 소리를 들으니 작가의 시도는 일단 성공적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 큰 고무 오리가 찾아야 할 물은 아무래도 여기는 아니지 싶습니다.

123층의 주 건물이 한창 공사 중인 가운데 부속 쇼핑몰들의 개장 기념행사가 벌어지면서 잠실 네거리 일대, 석촌호수 주변은 그야말로 저잣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에 몰리는 인파가 수만을 헤아립니다. 롯데백화점과 월드몰 등에서 판매 중인 2만 4천 원짜리 러버 덕 축소 인형 1차 판매분 3천 개가 이틀 만에 동이 났습니다. 호숫가 산책로에는 이 요란스러운 행사를 기획한 송파구와 롯데월드몰의 자축 깃발이 휘날립니다. ‘Rubber Duck Project Seoul 10.14~11.14' 한 달 동안 더 많은 인파가 몰려와 더욱 떠들썩한 자리가 되어야 더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판입니다.

거대한 고무 오리를 고정하느라 묶은 줄이 호수면 사방 끝까지 길게 뻗어 있습니다. 이런 인공 구조물을 보겠다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매일 북새통을 이룹니다. 그 서슬에 우아한 자태로 호수를 수놓던 백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몇 마리 흰색 오리들이 호수 구석을 배회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을 너무 좁게 살아서 이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제게는 고무 오리에 감탄하는 소란이 한탄스럽기만 합니다. 우리 곁을 찾아온 자연의 사절 백조를 몰아내고 띄운 인공의 고무 오리에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황새를 복원하고 곰과 여우를 방사하며 자연 회복에 정성을 기울이는 터에 이 무슨 황당한 물놀이인지.

고무 오리 소란에 떠나버린 백조들을 생각하며 착잡한 기분에 잠깁니다. 고요와 사색, 작고 아늑한 것들은 이제 분초를 다투며 살게 된 우리 일상에서 도태되어야 할 퇴물들일까. 떠들썩하고 야단스러운 것, 크고 요란한 것을 좇는 게 인간의 본성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세태의 변덕일까.

어차피 재벌기업 롯데 울안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석촌호수. 동호의 점령은 롯데 타워 건설 계획 때부터 갖고 있던 그들의 속셈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호를 놀이터로 내주었으니 동호라도 사색의 산책길로 남겨 두면 좋으련만. ‘러버 덕’ 다음엔 또 어떤 도깨비들이 열을 지어 이 호수의 고요와 사색을 몰아낼지 우울해집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는 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이 지구상 다른 생물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생각마저 듭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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