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는 건데 (71)
[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는 건데 (71)
  • 박승규 / 문화평론가
  • 승인 2019.07.2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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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불멸의 새 봉황. 신화와 전설로 내려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기린처럼 태평성대를 이룰 성군과 함께 세상에 나타난다고 믿었다. <논어>에도 “봉황은 세상에 도가 행해지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숨는다”고 적었다.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 암수를 각기 따로 불렀다.

도교 세계관에서는 천리를 나는 ‘붕(鵬)’과 함께 조류로서는 최상 랭크에 위치한 환상종이다. 일본어로는 호우오우(ほうおう)라고 읽는다. 포켓몬 중 하나인 칠색조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봉황과 상상의 동물 주작, 불사조 피닉스의 형상은 공작을 모티브로 했다. 그때만 해도 공작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 공작의 분포 지역이 인도와 동남아, 중국 윈난 지방인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새가 아닌 상상의 동물로 여겼다.

대개 봉황 그림에는 아름다운 물방울무늬를 날개와 꼬리에 그려 넣었다. 공작의 깃과 매우 흡사하다. 봉황의 문화원형이 공작임을 말해주는 간단한 증거다.

봉황 문화는 중국 후한 때부터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는 불교와 함께 전래했다. 봉황은 불교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영물로 여겼다. 살아있는 생물은 먹지 않는다고 여겨 사찰 대웅전 처마 밑에 봉황을 장식하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봉황 무늬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에 봉황문이 남아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정상에는 막 하늘 위로 날아가려는 듯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을 새겼다.

봉황과 함께 군왕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긴 영물로 용이 있다. 용과 봉황은 최고 지도자의 신령스러움을 더했다. 원래 모든 용봉 신화에서 봉황은 용보다 우위에 있었다. 용은 지신 또는 물의 신이지만 봉황은 그보다 상위인 천신에 속한다.

봉황은 모든 조류의 왕이다. 새는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용은 물고기 비늘을 하고 있다. 불경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금시조(봉황) 역시 용을 잡아먹거나 격퇴한다.

인도 등 동남아 신화 속 가루다(Garuda)도 금시조와 같은 이미지. 용을 잡아먹는다는 새 중의 왕이다. 머리는 매와 비슷하고, 몸은 사람을 닮은 ‘조두인신’, 날개는 금빛이다. 머리에 여의주가 박혀있고 입으로 화염을 내뿜는다고 인식했다.

가루다(garuda)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국장(國章·국가의 상징). 인도네시아 항공사 이름이기도 하다.

▲ 완주 모악산 송학사. 용 잡는 금시조(金翅鳥) 벽화 (화공 이연욱 작)
▲ 완주 모악산 송학사. 용 잡는 금시조(金翅鳥) 벽화 (화공 이연욱 작)

■ 조선 궁궐에 용 대신 봉황을 그린 까닭

봉황의 위상이 떨어진 것은 조선 시대부터. 가장 큰 이유는 명나라 용신 사상의 영향이 컸다. 게다가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에 반해 조선은 유교를 내세웠다. 농경을 중시했던 명나라는 땅과 물을 관장했던 용을 더 쳐주었다.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과도 같다. 그래서 일찍이 물을 지배하는 것으로 믿어져온 용은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됐다.

용과 봉황의 서열을 매길 때도 용을 상위에 뒀다. 용은 황제, 곧 천자의 상징으로 삼고, 봉황을 황후의 상징이나 천자에 사대하는 제후의 상징으로 썼다. 이른바 용과 봉황이 지배 철학으로써 종속 관계를 표방하는 아이콘이 된 것. 조선시대 왕궁의 정전 천장에는 용을 그리지 못하고, 봉황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천장에는 두 마리 봉황이 날고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조선 말기 대한 제국을 선포하면서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경희궁 숭정전 천장의 봉황 그림이 황제의 상징인 용 그림으로 바뀌었다. 지금 봉황무늬는 대통령의 전용 휘장으로 쓰인다. 청와대 정문에도 봉황문이 새겨져있고, 효자동 분수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과거 취임을 앞두고 MB는 대통령 상징 봉황문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봉황이 왕조시대 잔재 같은 고압적이고 권위적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특정 종교단체에서 우상숭배라는 압력을 넣었다는 뒷담화가 난무했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는 봉황이 갖는 전통문화적 의미와 신성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봉황은 결코 미신이나 주술적 존재가 아니다. 특히 봉황은 용보다 더욱 고귀했고, 고대 동이족 문화에 더 가까웠다. 국가의 상징체계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를 바꾼다면 어찌 될 것인가?

강원도 홍천 공작산은 한 마리 공작이 날개를 펼친 듯한 산세로 이름 붙였다. 공작은 깃털 때문에 관상용으로 인기가 많은 조류다. 주로 인도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일대에 서식한다. 자바 공작(녹색)과 인도 공작(청색)으로 양분된다.

인도공작은 인도의 나라 새이기도 하다. 일찍이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벌하러 갔다가 화려한 공작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사냥할 생각마저 잊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공작은 서양에서도 귀하게 대접받았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여신 헤라의 상징 중 하나. 헤라가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서양 미술 작품을 보면 대부분 헤라 옆에 공작이 그려져 있다. 제우스 옆에 독수리가 있는 것과 같은 경우다. 제우스는 독수리를 조종해 신과 사람들을 늘 감시했다.

▲ 흰 공작(백공작)
▲ 흰 공작(백공작)

■ 신라 흥덕왕의 사치 금치령에 포함된 공작 깃

우리나라는 신라 때부터 공작을 길렀다. 우리 역사에는 없지만, <일본사기>에는 2건의 공작 관련 기록이 나온다. 서기 598년 신라 진평왕 20년과 657년 백제 의자왕 17년에 일본에 공작 한 쌍을 보냈다.

일본 황실 보물 창고 <정창원>에서는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 바둑판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목화자단기국’으로 일컫는 바둑판에는 공작과 낙타, 코끼리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신라와 백제가 이런 동물을 외교 선물로 보냈다는 것은 그들이 동남아시아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뜻한다.

신라 귀족들은 무척 화려한 생활을 했다. 통일을 이룬 후 차츰 정치가 안정되면서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 그 무렵 국제 무역항은 울산의 개운포. 경주와 가까워 무역항으로 크게 번성했다. 처용설화의 무대인 개운포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락거리며 각종 남방 물품을 들여왔다.

거의 200년에 걸쳐 해외 명품들이 신라를 휩쓸었다. 급기야 834년 흥덕왕 때에 이르러 사치 금지령이 내려졌다. 흥덕왕은 신분별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한편 ▲ 목도리와 허리띠에 금은실, ‘공작미’ ‘비취모’ 사용 금지 ▲머리빗과 모자에 ‘슬슬전’ 금지 ▲말안장에 ‘자단’과 ‘침향’ 사용 금지, 수레의 깔개로 ‘구수’ ‘탑등’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공작미는 공작의 꼬리, 비취모는 캄보디아 물총새의 털. 슬슬전은 이란산 에메랄드를 박은 비녀, 침향은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나는 향나무. 구수와 탑등은 페르시아에서 온 양탄자를 말한다. 이들은 호화 사치품으로 몰래 밀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왕이 이렇게 규제를 내렸을 정도이니, 신라의 귀족 여인들에게 얼마나 대유행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불국사 다보탑에서는 아라비아산 유황까지 발견됐다. 신라에서 중동의 향료까지 수입해 썼다는 증거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자가용인 마차나 수레까지 ‘튜닝’해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 공작도 두 날개로 난다
▲ 공작도 두 날개로 난다

■ 선조 때 귀양 간 공작 한 쌍

공작의 아름다운 깃은 신라 때부터 장식용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후백제 견훤은 고려 태조 왕건의 등극 축하 선물로 공작 깃으로 만든 둥근 부채 ‘공작선’을 보냈다. 공작선은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왕실 의례 물품으로 취급됐다. 주로 전주 전라감영 내에 ‘선자청’을 두어 부채를 제작했다. 우리나라 부채는 외교 선물로 여러 나라에 보내졌다.

고려 때는 송나라에서 수입 품목 중에 공작도 들어 있었다. 상인들은 물소 뿔, 상아, 비취, 공작, 앵무새 등 사치품을 가져와 팔았다. 고려 시대 최고의 문장가 이규보는 당시 최고 권력자에게 최충헌에게 여러 번 자질을 시험당했다.

1199년(신종2) 5월 최충헌은 집 마당에 석류 꽃이 활짝 피자 이인로와 이규보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이규보의 재능을 눈여겨본 최충헌은 그를 발탁했다. 1213년(강종2) 이규보의 나이 46세 때 최충헌은 그의 집 마당에 노니는 공작에 대해 시를 짓게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40여운에 이르는 이규보의 시를 읽고, 최충헌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무렵 실세 최충헌이 실제 공작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시절, 인도네시아가 우리나라에 보낸 공작을 가로챈 대마도 해적 사건 말고도 몇 번 공작새가 등장한다. 1462년(세조8) 1월, 세조는 유구국(=오키나와)가 간절하게 원한 대장경을 주면서, 다음번 사신 편에 공작과 앵무새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연산군은 공작 깃을 명나라에서 수시로 구입해 ‘흥청망청’ 썼다. 1505년(연산11)에는 한 번에 공작 깃 300개를 북경에서 사 오라고 독촉했는데, 흥청 등의 노리개 제작용이었다.

1589년(선조22) 7월 대마도주가 보낸 공작은 태종 연간 코끼리에 이어 조선 왕조 역사상 두 번째로 귀양 간 동물이 됐다. 조총 몇 정과 함께 보낸 공작 한 쌍의 처분을 놓고 조정에서는 몇 달을 논의했다.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받지 않자니, 이 또한 난감한 일이었다.

선조는 제주에 놓아 주도록 하자 예조가 아뢰기를, “제주까지 수송하자면 폐해가 있으니 남해안 섬에 놓아주자”는 의견을 냈다. 결국 6개월간 골머리를 앓은 끝에 되돌려 보내지 않고 고흥 앞바다 섬으로 보냈다. 사실상 유배 처분이었다.

1647년(인조25) 7월, 표류해 온 중국 푸젠성 상인 배에 공작 3마리가 있었다. 인조는 “청나라 사람은 먼 곳에서 나는 물건을 귀히 여기고, 뽐내고 자랑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하면서 “이번에 오는 청 사신 편에 공작을 보낸다면 저들은 필시 거만을 떨며, 잘난 체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공작을 청에 주었는지, 조선에서 키웠는지는 기록에 없다. 상인은 중국에 돌려보냈다. 그날 이후 한양에서 공작을 볼 기회는 사라졌다. 연암 박지원 등 이따금 청나라 사신 길에 나선 사람들이 북경의 새 시장에서 공작을 본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언제쯤이면 봉황이 춤추며 날고 기린이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이 오려나. 벽오동 심은 뜻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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