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년 7월 28일(음). 한 여름 삼복 오후. 정조가 등극한지 1년이 넘어선 25살 때. 세 명의 건장한 사내가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앞 보신탕집에 들어갔다. 그 식당은 궁궐 정문 앞에 위치한 데다, 제법 맛 집으로 소문났던 모양이다. 궁궐 호위 군관인 강용휘가 단골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강용휘·전흥문·홍상범 이들 셋은 보신탕 값으로 3푼을 치렀다. 강용휘는 쇠몽둥이 철편을, 전흥문은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서 궁에 잠입했다. 홍상범은 2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상황을 보고 대응키로 했다. 다행히 이들의 정조 암살 기도는 미수에 그쳤다.

노론 홍계희 가문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홍계희의 친족 황해 감사 출신 홍술해와 손자 홍상범(24세) 등은 즉위 초 정조를 암살하고 은전군(정조의 이복동생)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전흥문(35세, 천민 출신 장사), 강용휘(41세, 궁성 호위군관) 등을 매수했다. 강용휘는 정조의 침실 지붕까지 침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 사실을 다룬 영화 <역린>에서는 조금 더 살이 붙었다. ‘최후의 오찬’을 하면서 정조 암살을 모의한 곳은 바로 보신탕집이었다.

조선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이른바 ‘경신 대기근’이 발생했다. 당시 조선 인구의 1200~1400만 명 중 약 1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우리나라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다. 일부 굶주린 사람들은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고 한다. 대략 이때부터 개고기 식용 문화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은 백성들에게 개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했다.

정조 때 유득공은 개장국을 먹는 것은 복날 풍속이라고 하며 즐겼다. 유득공은 <경도잡지>에 “개고기를 파의 밑동과 섞어 푹 찐다. 닭고기나 죽순을 넣으면 맛이 더욱 좋다. 이것을 ‘개장(狗醬)’이라 부른다. 혹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려, 흰쌀밥을 말아서 먹기도 한다. 이것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고 적었다. 원래 개장은 찜 요리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쪄 먹는 수육 또는 국으로 말아 먹는다. 그 무렵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초복에는 별식으로 개고기를 내렸다. 국립대학 기숙사 식당에서 초복에 주는 보신탕이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학식’이었던 것. 정조가 1795년 6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줄 때 잔칫상에 개고기 찜이 올라온 것도 흥미로운 장면이다. 주 재료는 ‘황구(黃狗)’를 썼다.

■ 보신탕에 우애를 담은 정약용

정조도 보신탕을 먹었다. 영의정 김상철은 “신이 들으니, 임금께서 보신탕을 드신다는데 앞으로도 계속 드시면 좋을 것입니다. 드셔 보시고 해가 없을 경우 장복하시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의정 이휘지도 한몫 거들었다. “드시는 데 있어 환(丸)이 탕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 내용은 정조의 일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연대기인 <일성록, 1780년(정조4) 5월 15일 >에 등장한다.

다산 정약용은 거의 ‘보신탕 종결자’ 수준이다. 1801년 11월 함께 유배길에 오른 정약전·약용 형제는 전남 나주에서 이별했다. 형은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갔다. 다산은 형과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들에게는 공부에 열중하라고 꾸중했지만, 1811년(순조11)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건강을 위해 보신탕을 권한다. 덫을 놓아 들개 잡는 법과 요리법까지 자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다산이 귀양살이 10년째, 나이 50살이 되던 해다.

“형님이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흑산도 안에 들개(山犬)가 100마리가 아니라 1000마리도 넘을 텐데요. 저라면 5일에 한 마리씩 삶아 먹겠습니다. 활이나 총이 없어도 그물이나 덫을 설치하면 되지요.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미역 등 해조류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겠습니까.”

정약전은 이때 흑산도에서 바다 물고기 생태 연구에 한창이었다. 그러나 흑산도에는 개는 커녕 변변한 포유동물이 없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그의 명저 <자산어보>에서 가마우지 새의 고기 맛까지 “억세고 질기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정약전은 조선 최초의 어류 백과사전을 내기 위해 ‘회는 징하게’ 드셨을 듯하다.

“들깨 한 말을 보내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삶습니다. 그리고는 식초ㆍ된장ㆍ기름ㆍ파로 양념을 하여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정(楚亭, 박제가의 호)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 유득공, 박제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은 보신탕 마니아

다산이 쓴 요리법을 보면, 오늘날 보신탕 끓이는 레시피랑 거의 같다. 된장이랑 들깨로 잡냄새를 잡는 방법도 그렇다. 단 한 가지 산초가 없는 이유는 그 당시에 향신료가 귀해서다. 다산은 흑산도에서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님을 위해 5일마다 개고기 한 마리를 먹을 것을 권유하고, 들깨 한 말까지 보내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마지막 부분에는 자신이 설명한 요리법이 선배였던 박제가에게 배웠다고 적었다.

다산의 선배였단 박제가는 다산보다 개고기 요리에 정통한 한수 위 ‘꾼’이었던 것 같다. 다산의 정성스러운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 요리법으로 형 약전이 개고기를 먹었는지 알 수 없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우애 넘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외로운 유배생활을 버텼다. 그러다가 안타깝게도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 흑산도에서 생을 접었다. 그는 다시 뭍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박제가, 유득공 등 대표적 실학자들이 어찌 그리 개고기 레시피를 자세히 알았을까? 또 다산이 유배 생활 틈틈이 개잡는데 열중하고, 직접 개고기 요리를 해 드셨을지 무척 궁금하다. 하지만 다산은 18년간 귀양살이 이후에는 쏘가리 등 민물고기를 즐겼다. 다산은 대단한 보신탕 애호가였지만, 실상은 귀양살이의 고단한 몸을 견딜 영양 보충원이었던 셈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 성호 이익(1681∼1763)은 직접 양봉도 하고 닭도 길렀다. 그 때문인지 <성호사설> 속에도 동물 관찰기를 많이 남겼다. 이익은 동물 중에서 개가 어느 정도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동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키우던 개는 호랑이에게 잡혀 죽었다. “비록 닭이나 개는 미물이라 해도 살아 있는 짐승을 보면서 어찌 잡아먹을 것만을 생각하랴. 사람들이 말하길 어떤 개는 고기 맛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또는 삶아 먹어야 한다느니 구워 먹어야 한다느니 평을 한다. 짐승만 보면 있는 대로 다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약육강식은 짐승의 일이다. 날짐승·길짐승도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사람과 같다. 어찌 차마 해칠 수 있겠는가?”

■ 아들에게 개를 키우지 말라고 한 연암 박지원

개는 인간의 친구일까, 먹이일까? 인도 건국의 아버지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함과 그 도덕적 진보는 동물에 대한 처우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 시대에도 보신탕을 두고 여러 논쟁이 있었다. 찬성론자의 대표 주자는 단연코 다산 정약용. 다산의 아들 정학유도 부전자전 마찬가지다. 그가 지은 <농가월령가>에서도 며느리가 친정에 갈 때, 8월에는 개를 잡아 삶아 가기를 권했을 정도.

반면 연암 박지원은 반대론자의 대표격이다. “개를 키우지 마라.” 연암은 둘째 아들 박종채에게 이리 일렀다. 개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연암은 동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겼다. 금수에게도 천명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소박한 생태주의자’였다. 한 번은 평생 타던 말이 죽자 고이 묻어주라고 했더니 하인들이 어기고, 잡아먹어 버린 일이 있었다. 당연히 연암은 발끈했다. 말의 뼈를 수습해 잘 묻어주고는 하인들을 내 쫓아 혼쭐을 냈다. 그 종은 문밖에서 대죄 한지 여러 달 만에야 비로소 용서받았다.

그때 연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과 짐승은 비록 차이가 있지만, 너와 함께 수고한 짐승이거늘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한 것이냐?” 미물에게조차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연암의 모습이 아닌가.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인들이 말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중국 지식인과 나눈 필담에서 “티끌에서 벌레가 나오며 사람은 모든 벌레 중의 한 족속에 불과하다”는 게 연암의 기본 생각이었다.

반면 다산은 “사물을 생성하는 것은 하늘이고,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호랑이와 이리 등 살상하는 맹수를 죽여서 사슴과 노루를 편하게 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쫓아내어 어진 신하를 보호하는 것이니, 이는 곧 천지의 지극한 인이다”라고 말했다. 다산에게 보신탕을 먹는 의미는 정조 사후 본인을 탄핵한 반대파 무리에 대한 소소한 응징 차원이었을까? 같은 듯 다른 연암과 다산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개 값이 2냥이면, 양반은 1냥 반

연암은 왜 개를 키우지 말라고 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 연암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개를 기른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느니만 못하구나.” 개를 키우면 혹시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모르니, 아예 키우지 말라는 취지였다. 동물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주었던 리얼리스트 연암의 성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를 기르지 말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결절이다. 나는 이 말씀이 아버지 삶의 동선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또 기러기는 형제를 뜻한다고 잡숫지 않으시고, 까마귀는 반포지효의 새라며 애틋하게 대하셨다. 나는 아버지 외에 이런 분을 뵌 적이 없다.”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아버지는 개와 기러기, 까마귀도 귀하게 대할 정도로 심성이 따뜻했다”고 술회했다.

연암은 또한 개를 양반보다 한수 위에 두었다. <양반전>에서는 ‘개 값이 2냥이면, 양반은 1냥 반’으로 평했다. 당시 1냥은 현 시세로 치면 5만 원이므로, 개 값은 10만 원이다. 양반이 개만도 못하다고 특유의 언어유희로 표현한 것이다. 연암은 서울에 30냥짜리, 즉 150만 원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다산 정약용(1762~1836). 25년 간격을 두고 태어난 이들은 같은 시대를 풍미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조(1752~1800)가 있었다. 연암과 다산, 이 둘은 나이 차이도 많고 당파도 달라서(연암은 노론, 다산은 남인) 그랬는지 생전에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다산은 연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열하일기>도 읽어 봤다.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박제가(1750~1805). 그는 다산에게 보신탕 레시피를 전수했고, 아마 <열하일기>도 갖다 줬을 것이다. 박제가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낮에는 규장각에서 다산과 함께 근무했고, 저녁에 퇴근하면 연암 그룹과 어울렸다.

연암은 가정 경제가 심각하게 어려워지자 나이 50줄에 늦깎이 생계형 관직에 나섰다. 다산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 아래 승승장구하다가, 정조 사후 18년 세월을 유배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 다산이 18년 유배 기간이 끝날 무렵에 마무리한 <경세유표> 동관(冬官) 이용감(利用監) 조항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실려 있다.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6권을 보았다.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 20권을 읽었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중국의 기구와 이용 제도는 보통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것이 많았다.”

1800년 정조 승하 후 박지원도 시름시름 앓다가 1805년에 생을 마감한다. <열하일기>와 <목민심서>는 둘 다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적인 교집합을 이루었다. 하지만 개에 대해서만큼 연암과 다산은 평행선을 달렸다. 단 한 가지만은 같았다. 정조와 연암과 다산 셋 모두 담배 유익론자이자, 골초였다는 것.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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