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대통령이라면? 많은 이들이 동질감을 느낄 테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개를 좋아했다. 여기엔 개인적 취미 그 이상의 함의가 담겼다.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자연스레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상징의 일종이기도 하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데려온 킹 찰스 스패니얼 4마리를 좋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큼지막한 백구와 황구, 치와와, 스피츠 방울이까지 두루 애정을 쏟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진돗개 백구를 키웠다. 재산 압류 당할 때 이 개도 포함됐는데, 순종이 아니라서 40만 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물론 수명과 시기상 안 맞으니, 대통령 시절 개라기보다 다른 백구 둘이겠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요크셔테리어 4마리를 좋아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보신탕을 즐겼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에서 준 풍산개 둘과 ‘똘똘이’란 이름의 치와와를 길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더콜리 ‘누리’에게 각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삽살개 ‘몽돌이’를 키웠지만, 보신탕 또한 광팬이었던 걸로 유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를 닮아 백구를 사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풍산개 마루와 유기묘 찡찡이를 청와대에 데려왔다. 안철수 대표는 과학자답게 ‘로봇견’에 관심 많았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속어로 ‘폭풍 간지가 쩐다’해서 ‘푸간지’로 불린다. 웃통 벗은 사진을 언론에 배포해 탄탄한 남성미를 강조하고, 외국 정상들과 회담에 덩치 큰 검은 사냥개를 동반시키기 일쑤다. 그런데 사실 ‘마초(macho·남성적인)’ 이미지를 쌓아온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흰색 예쁜 푸들을 끌어안고 좋아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은 그 개가 푸틴이 아닌 부인 소유라고 선을 그었다.

■ 카리스마 푸틴은 사실 여린 남자?

“워싱턴에서 친구를 원하면 개를 길러라.” 트루먼 전 미 대통령이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워싱턴 정가에서 오직 인간에게 충성스러운 개를 빗대어 한 말이다. 미국인도 백악관의 애완동물에 관심이 많다. 미 대통령은 거의 백악관 생활을 하면서 1~2 마리 애견을 기른다. 다양한 동물을 좋아한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 지도자 흐루시초프에게서 개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푸쉰카’라는 이 개는 군 병원에서 폭발물이나 도청 장치가 몸속에 있는지 검사받았다는 뒷얘기가 있다.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재임 시절 백악관 참모들에게 맹세를 시킬 만큼 중요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는 애완견 레인저가 살찐 것을 걱정했다. 백악관 참모들은 “우리는 레인저에게 비스킷이나 다른 어떤 종류의 음식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개 밀리의 강아지 가운데 한 마리인 스팟은 두 차례에 걸쳐 백악관에서 살았다. 스팟은 백악관에서 태어나 아들 부시와 함께 텍사스에서 지내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백악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 속담에 ‘정승 죽은 데는 안 가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 간다’고 했던가. 2004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미·일 정상회담에서 부시 집안의 애견 스팟이 죽자 조의를 표한 것으로 알려져 구설수를 입었다. 아버지 부시의 부인 바버라 여사는 “세계에서 가장 힘든 직업인 대통령에게 개의 조건 없는 사랑만 한 것이 없다”고 술회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에서 거짓말이 들통나자, 여론은 물론 아내 힐러리와 딸 첼시마저 등을 돌렸다. 힐러리는 자서전에서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하게 클린턴을 따른 건 애완견 버디(래브라도 종) 였다”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적을 겨냥할 때 ‘개처럼(like a dog)’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 트럼프의 거친 ‘Dog설’은 내부 폭로 부하도, 정치 맞수도 ‘개’에 비유해 논란이 많다. 트럼프는 유난히 개를 싫어한다. 백악관에 애완동물을 들이지 않은 첫 대통령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First Dog’은

“왕은 항상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는데, 목에 방울을 달았다. 강아지가 방울 소리에 놀라 뛰면 이것을 매양 재미로 여겼다.” 조선 왕 중에서 개를 좋아했던 임금은 의외로 연산군. 놀랍게도 우리나라 최초의 ‘First Dog’에 대한 실록 기록이다. <1506년(연산12) 5월 19일>. 폭군으로만 알려진 연산군이 목에 방울을 단 애완견을 키운 것. 그 무렵 연산군의 막장드라마는 9월 초 종영(인조반정)을 앞두고 파국으로 치달을 때다. 시기적으로 장녹수와 둘이 ‘쓰담쓰담’을 즐겼던 것 같다. 이보다 앞서 연산군이 애완견을 키운 흔적이 나온다. “주둥이가 짧고 털이 길며, 발이 짧고, 검은색 당나라 개(唐狗)를 구해서 들이라.”<1500년(연산6) 3월 1일>. 그 무렵 연산군은 사냥개와 별개로 몸이 작은 발바리 견종의 애완견, 즉 ‘당나라 개’를 기른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개’의 정체는 무엇일까? 당나라 시절 몇몇 궁중 그림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애완견의 조상 격인 강아지가 보인다. 이 개들을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량해서 페키니즈, 시추, 퍼그 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국가 간 외교 선물이나 사신 편에 종종 전해졌다. 연산군이 말한 ‘당나라 개’는 거꾸로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진상품으로도 활용됐다. 1468년(세조14) 4월 17일에도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선물 목록에 스라소니, 매와 함께 포함됐기도 했다.

애완견 말고도 사냥을 좋아했던 연산군은 매와 사냥개 수십 마리를 길렀다. 대전에서 회의할 때도 풀어 놓았다. 조정 대신들이 항의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궁궐 안에 사냥개를 많이 길러서 조회를 할 때도 함부로 드나드니,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라고 영의정 한치형이 간언할 정도였다.<1501년(연산7) 5월 6일>. 연산군의 사냥개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다음 해 일본 사신들을 맞아 영접할 때도 사냥개들이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의정부에서는 “오늘 아침 문무백관들이 반열에 늘어섰을 때에 사냥개가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니, 일본 사신들 보기에 온당치 못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사냥개를 내놓지 못하도록 하소서”라고 아뢨다. <1502년(연산8) 2월 5일>. 의정부 정승들이 나서 합동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때야 연산은 “담당 사육사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연산은 애견·애묘인이라기보다 동물을 학대한 사이코 쪽에 가깝다. 연산군은 곰과 표범, 호랑이, 여우 등을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을 내렸다. 잡혀온 짐승들을 궁궐 후원에서 고기를 주면서 구경하거나, 가두어놓고 마치 사냥하듯 직접 쏘아 죽이기도 했다.

■ 일본인들이 개보다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

1685년 에도막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쇼군이 지나가는 길에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한다. 1687년부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살생을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그의 치세는 조선 숙종(1674~1720) 재위 시기와 비슷하다. 숙종이 상당한 고양이 덕후였던 것처럼 쓰나요시는 특히 개들에게 지나칠 만큼 관대했다. 오죽하면 ‘이누쿠보(犬公方), 즉 ‘개 쇼군’으로 불렸을까. 항간에는 자신이 ‘개띠’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개를 부를 때에는 존댓말을 써야 했고, 개를 때리거나 죽이는 건 당연히 금지됐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에서 개를 비유한 속담이 없는 것도 그 때문. 개를 비하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았다. 개보다 고양이가 더 친근감 있게 다가온 이유 가운데 하나다.

병이 나면 동물병원에 가서 극진히 치료해야 했고, 수명을 다한 개는 주인이 직접 좋은 장지를 골라 묻어주도록 법제화했다. 개 도살자를 밀고하면 상금 30냥을 줬다. 점점 사람들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 개를 버려서 유기견이 늘어났다. 그러자 1695년 호적대장을 만들어 개를 관리하고 에도성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곳(현 나카노 지역)에 약 20만 평 규모 유기견 보호시설을 만들었다. 전국의 떠돌이 개 약 5만 마리를 치료하고, 먹여주며 재워주는 관청도 설치한다. 1마리 당 하루 세 끼 흰쌀밥과 말린 정어리와 된장국을 제공했다.

개를 먹이는 데 연간 금 9만 8천 냥(당시 막부 수입 80만 냥의 12%)이 들었다. 게다가 개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밤에도 산책을 시켜주는 관리를 따로 두고,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 한마디로 개 팔자가 상팔자였던 때였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나 군마는 물론 가축까지 상처 입히면 처벌받도록 법이 점점 강화됐다. 이후 포고령이 더해지면서 거의 대부분 식용 동물들의 판매조차 금지시켰다. 닭을 키우는 것은 괜찮지만 달걀을 먹는 것은 금지됐다. 비둘기에게 돌 던진 사람을 유배 보내고, 새가 둥지를 튼 나무를 벌채한 무사시의 주민들은 처벌받았다.

특효약이라는 민간요법에 따라 제비를 잡아 아들에게 먹인 아비가 처형되고, 자식도 추방됐다. 개나 고양이 등을 죽였다가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동물들에게 짐을 싣는 행위마저도 금지시킨다. 동물들이 힘들어하는 게 마음이 아파서라는 이유에서다. 급기야는 어떤 생물이든 학대하면 인간이 처벌받는 법으로 확대한다.

■ 세계 최고의 동물 애호가 개쇼군

어느 무더운 여름날, 쓰나요시 직속 무사였던 이토 아와지노카미는 모기가 뺨에 붙자 순간 철썩! 하고 모기를 때려죽이고 말았다. 모기를 죽인 것을 안 이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옆에 있던 사무라이 이노우에 히코하라는 얼굴이 하얘졌다. 아무리 쓰나요시의 가신이라도 죄를 면할 수는 없는 법.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유배를 당했다. 이노우에는 그를 말리지 않은 벌로 쓰나요시 휘하에서 쫓겨났다.

동물을 보호한 쓰나요시도 동물에게 불운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외출을 나간 그가 말을 타고 가다가 날아가던 까마귀의 똥을 정통으로 맞은 것. 화가 난 그는 “저놈을 당장 잡아라!”하고 외쳐댔다. 가신들이 필사적으로 까마귀를 쫓아 드디어 생포해왔다. 하지만 동물보호령을 자신이 내린 터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 조그만 옥(?)에 가둔 후 이즈의 섬으로 유배를 명령한다. 까마귀는 울에 갇힌 채 이즈까지 호송된 후, 그곳에 도착하자 섬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죄 사면(?) 되어 저 멀리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살생 금지법 집행 초기에는 목록에 토끼와 날짐승이 빠져있었기에 토끼(우사기)를 새라고 우기며 먹었다. 그러다 보니 그 시기 면 요리가 다양하게 성행할 수밖에 없었을 터.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우동’과 ‘소바’가 됐다. 개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죽은 지 10일 만에 금살법은 당장 폐지됐다. 현재 세계적 동물보호 단체 ‘WWF 재팬’ 대표는 도쿠가와 가문의 후손 도쿠가와 쓰네나리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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