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딸아이가 잠결에 엄마 죽지 말라며 엄마가 없으면 자긴 어떻게 사느냐고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꿈속에서 제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도 제 어머니가 죽는다는 것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암흑이었습니다. 상상만 해도 눈물이 맺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딸아이의 잠꼬대를 듣고 눈물을 닦아주며, 아이가 잠시나마 겪었을 고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날 아침 아이는 꿈의 충격이 너무나 컸나 봅니다. 등굣길을 나서면서 “엄마 죽지 마.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예전에 저 또한 어머니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먼저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아이도 언젠간 마주하게 될 영원한 이별의 아픔을 꿈결로 경험했으니, 엄마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실제처럼 와 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얼마나 몸서리를 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 왔습니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죽을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더라도 숨은 쉴 것이고, 차츰 어머니 없는 삶에도 익숙해질 거라는 예감에 마음이 헛헛해집니다. 나이가 들며 조문 가는 일이 많아질수록, 죽음이 저만의 상처가 아닌 모두가 당면하는 순리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이 인간 공통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 개인적 상처의 아픔이 가벼워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어머니께 말할 수 없이 죄송하지만, 저에게 딸이 생기면서 어머니에 대한 애착의 관계가 아주 조금은 소원해졌음이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체온이 담긴 따스한 손길은 하나둘 망각해버리고, 지금 아이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는 제 손길만 또렷하게 기억해갑니다.

부모의 죽음에 슬픔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큰 불효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를 상상해보면, 암흑 같은 공포와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에 놓이더라도 어머니의 죽음일 때만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만약에 애착의 정도를 설명하라면, 이번엔 아버지께 정말 죄송스런 이야기이지만 어머니께 더 큰 애착을 갖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저처럼 자식들이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 애착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들 가운데 자극에 대한 반응처럼, 어머니의 젖을 물고 어머니가 만드는 음식을 통해 길들여진다는, 즉 ‘먹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먹는 것보다 친밀한 스킨십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의 애착실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할로는 갓 태어난 어린 아기 원숭이를 철망으로 만든 가짜 엄마가 있는 우리로 옮깁니다. 인형모형으로 만든 가짜 엄마 하나는 철사로만 만들어서 딱딱하고 차가우며, 다른 하나는 털로 감싸 놓아 부드럽고 따듯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사로만 된 엄마에게 우윳병을 놓았는데 아기 원숭이는 우유를 먹을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갈 뿐, 항상 털로 된 엄마에게 가서 안겨 있었습니다.

또한 무서운 인형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자 아기 원숭이는 화들짝 놀라며 이번에도 털로 만든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습니다. 누가 우유를 주는지에 상관없이, 그리고 위협을 느낄 때에도 아기 원숭이는 따듯하고 폭신한 천으로 된 엄마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실험을 보면 생명 보존을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보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접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장하면서 애착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것이 바로 따듯한 스킨십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드러내지 않는 속사랑이라고도 하지만, 애써 마음속에 감춰둘 것이 아니라 표현이 필요합니다. 따듯한 접촉을 통해 사랑이 전해질 때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딸의 잠꼬대를 보며 불손하게도 가족에 대한 애착의 순위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부쩍 흉흉한 꿈이 늘어난 제 딸은 무섭다며 밤마다 제 품속에 파고듭니다. 자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조심스레 딸의 손을 잡아보니 어느덧 훌쩍 커버린 어른 손입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도 올려주고 아이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다, 저를 이렇게 들여다보며 키우셨을 부모님 생각이 나서 마음이 또 울컥해집니다.

그간 소원했던 것 같습니다. 주말에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드리고, 어머니의 아픈 다리를 주물러 드리러 친정에 꼭 다녀와야겠습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진의

한국화가. 홍익대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색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에서 채색화와 색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화폭에 향수 사랑 희망의 빛깔로 채색된 우리 마음의 우주를 담고 있다.

[자유칼럼그룹]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52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