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1992년 2월로 기억됩니다. 매년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유엔 인권위원회(지금은 인권이사회로 이름이 바뀜)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인권위는 유엔 내에서 세계 각국의 인권상황과 이슈 별 인권 문제를 다루는 최고의 기관입니다. 당시 필자는 우리 외교부에서 유엔 경제사회문제 담당과를 맡고 있었습니다. 마침 국내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었는데 한일 간의 문제가 그렇듯 언론에서는 연일 정부에 대해 일본 측에 진상 규명과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정부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측이 강점기의 문제로 인한 양국 간 보상이나 배상 문제는 1965년의 협정으로 다 타결되었다는 입장이었으니 우리가 다시 무엇을 일본에 대해 요구한다는 것은 난처하기도 하고 한일 관계의 다른 부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국제 인권문제를 담당하던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가 양국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 문제이므로 이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기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하고 일본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에 이를 알렸더니 이 부서에서는 역시 양국 관계를 들어 이를 국제적으로는 제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단 제네바 회의에 참가하였지만 저로서는 이대로 가면 일본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지 않을 테니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대규모 전시 인권침해 사실을 공개하고 비판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이를 우리 수석대표인 현지 대사에게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습니다. 현지 대사는 저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우리의 기조연설을 통해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진상 규명과 사과, 책임자 처벌 및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일본 측에서는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고 보고 위안부 문제는 기존 한일 간의 협정에서 완전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발언을 강력히 반박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처음으로 이슈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일본 측의 발언이 끝나자 회의 참가 시민단체 중 누가 나서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고 위안부 문제는 보편적인 인권문제이므로 드러난 구체적인 인권침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과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일본의 양심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저는 정말 백만의 원군을 얻는 것 같았고 더욱이 이 발언을 한 사람이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의 인권변호사였기 때문에 일본 여론의 지지를 얻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안도감과 함께 적지 않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토츠카 에쓰로(戶塚悅郞)라는 그 일본인 변호사가 너무나 고맙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를 저녁 식사에도 초대하였는데 그는 자기가 비록 일본 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주장을 하지만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해야만 양심적인 사회로 존립할 수 있으며 그래야 이웃과도 진정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사회당 정부의 인권고문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토츠카 변호사가 동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 들러 저를 만나자고 하여 같이 점심을 한 후 그를 경복궁 뒤편 명성황후 시해가 있었던 터에 데려가서 당시의 사건을 설명한 일인데, 그 자리에서 제가 일본 정부가 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일본 요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우선 여기에 와서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더니 그는 시해 사건 자체를 처음 들어서 매우 놀랍다고 하면서 위로의 말과 함께 저의 제안에 대해 수긍을 표시하였습니다.

20년 이상 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가 입안의 가시처럼 돼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 측이 과거의 진실을 부인하거나 정부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얼버무리는 것을 참지 못하며, 일본은 사과는 물론 금전적 조치까지도 마련했는데 도대체 얼마를 더 사과해야 하는가, 하고 우리에게 도리어 짜증을 부리고 있습니다. 미국,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전반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다른 국가에 대한 불법행위는 진상 규명, 사과, 책임자 처벌 및 배상이 그 해결의 공식입니다. 저는 우리 측이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애초에 사과를 너무 쉽게 받아주었다고 봅니다. 국가가 그 중대한 불법행위에 대해 사과하려면 국가의 입법으로 하는 게 또한 공식인데 총리의 사과 담화로만 받고 말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자꾸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인상입니다.

입법이 아니라면 적어도 국회의 결의 형식이라도 취해야 확고한 국가의 입장이 표명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처음에 이렇게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과를 받고도 진정한 사과를 받지 아니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지금 아베 총리가 설령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사과를 한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가면 이 문제가 언젠가 또다시 불거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국가 차원의 사과를 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천황제 하에 있는 일본이란 나라는 국가의 오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나라이기에 제대로 된 국가 차원의 사과를 받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제사회를 통한 압력이 계속된다면 일본 사회 내 양심세력들의 주장도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애초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시작된 국제사회의 논의가 전시성노예 문제로 발전된 것도 국제사회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제주 소재 유엔국제훈련센터(UNITAR)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외국인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외국인거주환경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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