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어이쿠, 늦겠네! 하루 세 차례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기에 도착 시각을 오후 4시로 맞췄는데 이촌역에 내려 가는 방향을 가늠하느라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용산가족공원 가는 큰길을 잡고서도 길이 맞나 안 맞나 망설이며 걸은 탓입니다. 중앙박물관 가는 지하통로를 택했더라면 움직이는 길(moving walk)에 올라 주마가편 격으로 훨씬 빨랐을 텐데.

숨이 턱에 닿게 박물관 2층 계단을 뛰어 올라가 안내석에 당도하니 해설사 이고훈(李高勳) 씨가 상냥하게 웃으며 우선 숨부터 고르라고 권합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물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까지 해설사를 찾은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10월 9일, 제89회 한글날에 개관되었습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한글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국가적 상징물로 건립할 것을 결정, 준비에 착수한 지 5년 만입니다. 한글 창제 571주년, 반포 568주년이 되는 올해에 마침내 개관의 경사를 맞은 것입니다.

‘박물관’ 하면 으레 옛 선조들의 유물, 유적을 보존, 연구, 전시, 교육하는 기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자 박물관’이라니, 도대체 그런 형이상학적인 문화유산은 어떤 식으로 보존, 전시하는 것일까. 한달음에 달려가 보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로 미루던 차였습니다.

이고훈 씨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 ‘창제 시기와 원리가 확실하게 밝혀진 유일한 문자’가 바로 한글의 자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박물관은 그런 사실을 글자와 그림, 책과 서화로 입증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셈입니다.

상설 전시실 ‘한글이 걸어온 길’에 들어서니 큼직한 원뿔형 기둥에 세종대왕(1397~1450)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이 씌어 있습니다.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할 이가 많으니라. 내 이를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먹고 살기도 힘겨웠던 시절 배워야 할 때 못 배운 탓으로 평생 고통스럽게 살았던 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황혼녘에야 비로소 한글을 깨우치고는 어린 소녀처럼 기뻐하던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문자 창작의 배경과 시원(始原)이 드러나 있으니 한글을 도둑맞을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한글 창제의 원리나 탄생 배경도 실은 캄캄한 어둠 속에 묻힐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한글의 모든 수수께끼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 나라의 명운처럼 이리저리 떠돌다 폐지처럼 소실되거나 왜인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문화재에 남다른 애정과 식견을 가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이 그 존재를 소문으로 전해 듣고 1940년 당시 기와집 20채 값을 물고 손에 넣었노라고 해설사는 신이 나서 설명했습니다.

일설에는 사회주의자로 숨어 지내느라 사정이 어려워진 이용준((李容準)이란 이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해례본을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의 중개로 어렵게 간송과 접촉,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그가 당시 돈 1천 원을 요구하자 간송은 1만 원의 거금을 지불하고 김태준에게도 사례로 1천 원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간송은 6·25동란 중에도 이 책 한 권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송문화전에서도 이미 여러 번 들었고 진실성을 따지기도 어렵지만 들을 때마다 스릴이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비로소 훈민정음의 창제 연대와 배경은 물론 그 원리와 용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례본은 한글 첫 자 ‘ㄱ’이 혀가 입천장에 붙은 마지막 형상을 본뜬 것이며, ‘감[柿]’이나 갈[蘆]의 초성과 같이 발음된다는 사실 등을 세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 빛나는 문화유산은 국보 70호,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해설 덕분에 ‘훈민정음’이 세종이 창제, 반포한 한글의 원래 이름인 동시에 창제 배경을 밝힌 해례본의 이름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종의 서문과 해례,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서문으로 구성된 국보 훈민정음(해례본)이 당대 최고의 명필인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훈민정음(해례본) 영인본과 함께 한글 창제의 원리와 활용을 디지털 화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또 정철의 송강가사, 김천택의 청구영언, 허균의 홍길동전, 윤선도의 고산유고 등 주옥같은 한글 문학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일제 탄압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한글을 지키는 데 힘썼던 학자들의 연구 업적들도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가장 각광받는 문자가 우리 한글이라고 합니다. 그 어느 문자보다 자모의 숫자가 적고 간편하면서도 발음의 표기가 명확해 디지털 기기에 가장 적합한 문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비하면 한글박물관 개관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또 기대에 비해 아직은 각 전시분야의 콘텐츠들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전시물을 좀 더 디지털화, 입체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시관을 돌아보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 전시물 하나하나의 뛰어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관람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어려운 전시형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서화 중심의 박제화된 전시에 관람객이 쉬이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글의 창의성, 과학성, 활용성을 설명하는 데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가령 인체의 발음기관을 모형으로 만들어 제자(制字)의 발상과 원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떨까. 한글 자모를 가벼운 나무나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 누구나 손쉽게 그 모양을 인식하고, 실제 제 손으로 글자를 완성해 보는 체험을 하게 해 보면 어떨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입력에 일본 가나나 중국 한자는 우리 한글보다 훨씬 많은 단계와 절차가 필요하다는데, 실제로 전시용 대형 휴대전화와 문자판을 만들어 누구나 체험해 보게 하면 어떨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만 그치지 않고 손으로,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형태의 전시와 설명으로 관심과 흥미를 배가할 수 있지 않을까. 전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1 2 3’ 등의 아라비아숫자는 실제로 아랍 문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계 문자판에는 흔히 ‘Ⅰ Ⅵ Ⅻ’ 등 로마자가 쓰이곤 합니다. 교회 외벽에는 ‘Α’와 ‘Ω’가 그려져 있는 곳이 많습니다. ‘И’이나 ‘Я’과 같은 러시아의 키릴 문자를 보고는 수레에 싣고 가던 그리스 문자가 쏟아진 것을 잘못 주워 담는 바람에 문자의 방향이 바뀐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세계 여러 나라 여러 족속들이 쓰는 문자를 비교, 전시하는 것도 재미있는 볼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개관 취지대로 앞으로 더욱 내실을 기해서 우리의 큰 자랑인 한글 자체는 물론 한글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문화를 널리 소개하고 홍보하는 터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가 사용하는 문자와 언어를 비교, 연구, 전시하는 세계 언어문화 연구의 중심으로 우뚝 섰으면 좋겠습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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