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사 가정에서 기르는 금빛 털을 지닌 삽살개처럼 생겼다. 여러 짐승이 이를 보면 무서워 엎드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 기가 질리는 까닭이다. 100년 이래로 사자를 진상한 자가 없었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사자를 못 본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했다. 청 건륭제의 70회 생일 선물로 들어온 러시아 보르조이 수렵견, 황금 원숭이, 표범, 공작 등 수많은 동물을 봤지만 사자만은 구경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때까지 중국을 오가던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끼리에서부터 낙타, 타조, 앵무새까지 다양한 동물을 구경한 기록을 남겼다. 어떤 동물은 외교 수단으로 한중일 삼국 간 또는 멀리 동남아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그러나 유독 사자에 대한 목격담은 전무하다.

연암 박지원의 지적처럼, 중국에서도 100년 동안 사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모두 21번 사자를 공물로 받은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청나라 강희제 17년(1678년), 포르투갈 사람이 가져온 게 마지막이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는 이 사자를 강남 순방 때 배에 싣고 다니며 자랑했다.

수호신으로 사자 또는 사자상의 문화원형은 ‘그리핀’에서 출발한다. 최초의 초원 제국 스키타이 왕조의 숭배 대상이었다. 스키타이 유물 중 사자가 말이나 다른 동물을 공격하는 모양들이 많이 남아있다.

동북아에 사자가 등장한 것은 실크로드를 개척한 한무제 이후 후한 시기부터. 서기 87년,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 옛날 북부 이란 지방에 있었던 나라)에서 온 사신이 최초로 사자를 바쳤다.(후한서 서역전) 이후 소륵국(疏勒國·한,당 때 현 카슈가르에 있었던 나라), 월지국(月氏國·현 아프가니스탄 부근에 있었던 나라) 등에서 중국에 바쳤으며, 생김새를 묘사한 구체적 기록도 남아있다. 후한 때 들어온 사자는 주로 파미르 서쪽 지역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멸망 후 중국은 근 400년간 전란의 시기를 맞았다. 무력으로 천하를 얻은 당나라는 북방 선비족 혈통을 지녔다는 단점을 감추기 위해 중원 한족 문화를 적극 선양했다. 그래서 용을 일부러 떠받들었지만, 불교와 결합해 맹수라기보다 ‘착한 사자’ 이미지가 퍼지기 시작했다.

■ 불교가 성행한 당나라 때부터 사자상이 유행

당나라 때부터 불교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많은 사자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사자는 벽사호법(辟邪護法)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다. 사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민간에서도 액운을 막는 영물로 생각했다. 사자상은 제왕이나 재상의 관저, 관청과 민가에도 속속 세워졌다. 종류도 돌로 조각하거나 동으로 주조된 사자상 등 다양해졌다.

최초의 사자상은 후한 때 나타났다. 처음에는 능을 지키는 용도였다. 중앙아시아에도 이 같은 습속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사자상은 그리핀과 큰 차이가 있다. 용의 영향을 받아 모습이 뒤섞였다.

서역에서 공물로 들여온 사자는 주로 황실 내원에만 갇혀 살았다.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는 진짜 사자 모습을 잘 몰랐다. 심지어 청나라 건륭제 때 권신 기효람(紀曉嵐) 조차 한 번도 사자를 보지 못했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진짜 사자를 보지 못한 장인들은 그저 그리핀 형상이나 사자와 닮은 티베탄 마스티프를 보고 조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자 그림 또한 화가들이 사자견 오(獒)와 실제를 사자를 구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사자상은 갈수록 더 맹수 같지 않고 ‘개’처럼 순하게 바뀐다. 명나라 때는 사자상이 더욱 유행하면서 의문의 패배를 당한 동물이 생겼다. 바로 거북의 몰락이다.

거북은 원래 용, 봉, 기린과 함께 네 가지 영물에 속했다. 집 앞에 거북을 조각하여 길상을 추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나라 영락제가 권력을 찬탈한 후에 건문제에 충성하던 신하를 ‘오귀(烏龜)’ 그 후손을 모조리 ‘귀자(龜子)’라 칭하며 영원히 천한 업에 종사하게 한다. 이렇게 거북이가 재수 없이 버려지면서, 사자상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명나라 시절 자금성 문 앞에는 호랑이와 표범, 코끼리 등을 두어 지키게 했다. 그런데, 왜 더욱 용맹한 사자를 두지 않았을까? 그것은 사자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었다. 명 영락제 때 항해에 나선 정화는 기린, 사자, 표범 그리고 아랍 말 등을 영락제에게 가져왔다.

1478년(성종 9년) 사마르칸트(현 우즈베키스탄)에서 명 성화제에게 사자를 바쳤다. 조공 제도는 ‘Give and Take’. 대개 조공을 받으면, 조공품의 3배에 달하는 답례품을 줘야 체면이 선다. 결국 조공을 바치는 쪽이 훨씬 유리한 교역인 셈. 성화제는 종전의 예에 따라 하사품을 내렸다. 사신은 길이 멀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육로로 돌아가려면 중간에 험난한 곳이 많아 해상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또 가는 길에 톈진에서 소금을 사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중간에 소란이 일어, 결국 황제는 다시 병력을 보내어 광저우까지 보낸 다음 쫓아냈다.

1484년(성종 15년)에는 위구르스탄을 지배하던 칸 ‘Ahmad Alaq’이 명에 사자 2마리를 보냈다. 한 마리당 표범 보다 5필을 더해 고급 비단 8필을 줬다. 한필은 지금 단위로 환산했을 때 길이는 16.35미터, 너비는 32.7cm 정도. 사자의 가격이 아주 비싼 편이다. 대가는 컸지만, 아무런 실용 가치는 없었다. 다음 홍치제 때 이르러서는 더 이상 사자를 진공하지 말라고 한다.

■ 혜초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사자

사자와 코끼리는 불교에서 투톱, 쌍벽을 이룬다. 어떤 때는 부처님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부처님 말씀이 악귀를 물리칠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자후’, 설법할 때 앉는 자리를 ‘사자좌’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천상천하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라는 이유에서다. 대승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닌다. 이 또한 사자를 상서롭고 영명한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교 미술품에 사자가 표현되기 시작한다. 야차나 건달바, 아수라 등 팔부신중의 모습에서 부처를 호위하거나 사자 석탑, 쌍사자 석등과 같은 조각품에서 독특한 사자상을 볼 수 있다. 점차 사자상은 괘릉 등 왕릉을 지키거나 왕성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확대됐다. 신성함과 절대적 힘, 그리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사자상은 발해의 유적에도 많이 보인다. 고려 시대 귀족은 사자의 문양을 청자 등 일상용품에서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자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일까? 신라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이자 배낭여행자 혜초 스님이 유력하다. 8세기 후반 천축이라 불린 인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과정에서 사자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도 국가 휘장의 사자는 기원전 3세기경 불교 발생국인 아소카왕 석주 꼭대기에 있는 사자상에서 나왔다. 불교로 개종한 아소카 왕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4마리 사자상을 세웠다. 이 사실은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도 기록되어있다. “며칠 걸려 바라나시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부처의 다섯 제자 모습이 새겨진 탑이 있다. 또 사자가 올라타고 있는 돌기둥이 있다. 대단히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고, 무늬가 섬세하다”라고 적었다.

9세기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에는 “(사자가) 사막을 건너 수만리를 걸어오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구나. 굳센 그 기상 어찌 온갖 짐승 재주와 같을 쏘냐!”라는 구절이 있다. 최치원이 ‘북청 사자놀이’처럼 서역에서 들어온 사자춤을 보고 지은 시라고 한다. 최치원은 당나라 체류 시절 실물 사자를 보거나 적어도 사자 연희를 이미 봤을 것 같다.

■ 우리나라에서 사자를 처음 본 사람은

사자춤은 당·송대 궁정에서 다채롭게 공연됐다. 중앙아시아 출신 조련사가 사자를 훈련시켜 묘기를 부리거나, 혹은 사자로 분장해 춤을 췄다. 황제의 생일잔치나 설날 같은 명절 때 단골 축하 프로그램이었다. 공연 시에는 140여 명의 합창단과 ‘태평악’이 한껏 흥을 돋우었다.

명대 이후 사자춤은 궁정보다 주로 민간에서 활발해졌다. 명·청대는 ‘백희(百戱)’라 하여 서커스의 잡기와 연극성이 비교적 강한 연희에 사자춤이 등장했다.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큰 대중 민속적인 춤이다. 조선시대에도 중국 사신의 영접 때 평양이나 서울 광화문에 산대(山臺)를 가설하고 ‘산대잡희’를 공연했다.

사자춤은 중국이나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등 여러 곳에서 전한다. 대만 사자춤은 사자와 용을 이용해 역동적인 몸짓을 보여주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일본 일부 지역에서도 ‘시시마이’(獅子舞)가 전승된다. 한 예로 시가현 이시베초 이시베주오(石部中央) 마을에서는 해마다 사자춤을 춘다. 새해 첫날의 액막이로 재난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이다. 오키나와(과거 유구국) 사자춤은 ‘북청 사자놀이’와 판박이다.

북청 사자놀이는 탈춤과 우스꽝스러운 재담으로 악귀를 몰아내고, 양반들의 탐욕과 악덕을 비판한다. 북청 사자놀이는 원래 ‘사자견 놀이’에서 비롯됐다는 목소리도 있다. 혀를 빼어 문 희화적인 큰 탈, 긴 털로 덮인 사자 모양, 공연 내용 등이 주된 논거다.

사자견은 티베트와 중앙아시아 고산지대가 원산지다. 얼굴은 사자 형상이지만, 털이 길고 귀가 늘어졌으며 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다. 더운 지방의 짐승은 대개 털이 짧다. 진짜 사자는 수사자의 갈기를 제외하고 털이 길지 않다. 사자 꼬리는 소꼬리와 비슷하게 내려가 있다. 귀는 고양이처럼 쫑긋하다.

당나귀는 ‘당+나귀’가 맞지만, 당사자는 당나라 사자가 아니다. 수사자가 수나라 사자가 아닌 것과 같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지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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