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은 티베트의 독특한 장례문화다. 독수리에게 시신을 내어준다.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은 독수리를 통해 죽은 육신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승천(Sky Burial) 의미를 지닌다. 새와 인간의 영혼 간 관계는 북방 문화권에서 보이는 최대공약수다. 아무르강 유역 중국 동북방과 시베리아에 걸쳐 사는 소수 민족인 에벤키족(evenki, 고대 국가 옥저의 후예), 나나이족(nanai, 흑수 말갈의 후예)은 영혼이 몸에서 나가면 쇠박새로 변한다고 믿는다. 다우르족(Daur, 거란족의 후예)은 참새로 변한다고 생각한다. 에벤키족은 기러기나 오리의 솟대를 마을 옆에 세워 놓기도 한다.

우리 고대 국가의 건국 설화에도 새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제4대 왕 석탈해,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등은 모두 새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삼족오’ 전승처럼 새와 태양을 연결한 토템은 동이족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까마귀는 인간과 수만 년의 세월에 걸쳐 어울려 살아오면서 신 또는 신의 대행자 같은 영적 존재로 숭배됐다. 유전적으로는 동북아에서 베링 육교를 건너 북미 대륙으로 유입됐다. 전 세계 까마귀와 까치의 원조가 동북아라는 이야기다. 북유럽 신화에서 까마귀는 최고신 ‘오딘’을 상징한다. 노아의 방주에서 비둘기와 함께 맨 처음 날려 보낸 새가 까마귀다. 오늘날 영국 런던 탑에서도 까마귀를 사육 중이다. 시베리아 캄차달족 신화에서는 큰 까마귀 신 쿠트크가 캄차카반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시베리아 추쿠지족과 코략족, 북미 서부 인디언들 사이에서 까마귀는 창세신이 변한 모습이라 하여 창세신화 주역으로 전승된다. 부탄 국왕은 까마귀머리가 장식된 왕관을 쓴다. 부탄의 국조인 까마귀는 고구려 삼족오처럼 태양신을 상징한다. 부탄에는 나라 전체에 교회가 하나도 없다.

■ 청 태조 누르하치를 살린 까마귀

고구려 건국 초기 붉은 까마귀는 ‘승리의 메신저’였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 3년(서기 20년), 부여왕 대소가 붉은 까마귀를 보냈다. 머리는 하나, 몸은 둘이었다. 부여에서는 고구려를 차지해 병합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반대로 풀이했다. 대무신왕은 오히려 고구려가 부여를 장악할 것으로 봤다. 검은색은 북방(부여)의 색깔인데, 변해서 남방(고구려)의 붉은색이 됐다는 것.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새인데, 부여가 이를 얻고도 고구려에 보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겠다고 해석했다.

결국 고구려에 겁을 주고자 한 일이 오히려 부여의 사기를 꺾어 버린 셈이 됐다. 곧 부여는 붉은 까마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1년 뒤, 대무신왕의 고구려 군은 부여를 공격했다. 대소왕은 고구려 장수 괴유에게 목숨을 잃었다. 고구려 벽화 속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니라 봉황처럼 볏이 달렸다. 우리나라와 고대 일본을 하나로 잇는 열쇠이기도 하다. 예부터 일본 역시 까마귀를 숭배했다. 일본 신화에서 삼족오는 태양신의 사신이다. 지금까지 까마귀를 좋아하는 인식이 남아 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북아 많은 민족이 고대에 까마귀를 숭배했다. 특히 만주족의 까마귀 숭배 역사는 돋보인다. 최초의 까마귀 숭배는 수렵시대에 나타났다. 새들 중에서 까마귀와 까치는 영역 구분과 경계심이 가장 강하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만주족의 선조들은 까마귀와 까치에게는 정보를 알려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까마귀는 위험이 닥치면 울게 되는데, 이것이 알람 신호가 된다.

까마귀가 동물 시체를 발견하면 회색 늑대를 부르는 것이 발견된 적이 있다. 늑대가 질긴 동물 가죽을 찢어 먹고 나서도 몸집이 작은 까마귀들이 먹을 정도의 찌꺼기는 충분히 남게 된다. 사냥꾼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들짐승의 시체를 찾을 수 있고, 먹거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까마귀에게는 신령이 있다고 믿게 됐다. 동북아 및 바다를 사이에 둔 북미 서북부의 연해에 사는 원시 수렵과 어획 부족 대부분은 까마귀를 신성하게 여기고 숭배했다.

농경사회가 진행될수록 상대적으로 까마귀의 신성한 이미지는 반대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민족이 수렵에서 농경으로 바뀌면서, 까마귀 도움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썩은 음식을 잘 먹는 까마귀의 습성 또한 오히려 죽음을 알리는 사자로 고착화된다. 심양 청나라 초기 왕궁과 북경 자금성에는 한 개의 큰 나무 장대가 있다. ‘소룬(索倫)’ 혹은 ‘소룬간(索倫杆)’이라고 하며, 1640년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세웠다. 꼭대기 부분 밥그릇 모양에 음식물을 놓아서 까마귀들이 먹게 했다.

이 소룬은 위험에 처한 청 태조를 까마귀가 구해줬다고 해서 유래했다. 명나라 군사들에게 추격당하던 젊은 시절 누르하치의 몸을 한 무리의 까마귀가 덮는다. 군사들이 멀리서 보니 까마귀 떼만 보였다. 그래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달려갔다. 이렇게 까마귀는 누르하치의 생명을 구한다. 나중에 황제가 된 누르하치는 까마귀를 청나라의 국조(國鳥)로 삼아 사람들이 까마귀를 해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성경(盛京) 동북쪽에 땅을 정해서 까마귀를 먹였다. 지금도 만주 지방에 가면 장대에 나무로 만든 까마귀를 올려세운 솟대를 흔히 볼 수 있다. 까마귀는 천지간을 오가며 백성의 뜻을 상달하고, 하늘의 뜻을 하달하는 신성한 새로 여겼기 때문이다.

■ 까마귀는 언제부터 흉조가 되었을까?

까치와 까마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같은 까마귓과 새로 생태적으로는 사촌이다. 하지만 이 둘의 신분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우리 조상들은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며 길조로 여겼다. 반면 까마귀는 검은 색깔과 음침한 울음소리 탓에 나쁜 일을 몰고 오는 흉조로 터부시됐다. ‘까마귀밥이 됐다’는 말은 곧 죽음으로 여겼다.

원래는 둘 다 길조였다. 까마귀와 까치가 흉조와 길조로 분화된 것은 후대의 인식 변화 탓이다. 서기 488년 음력 1월 15일, 신라 소지왕이 경주 남산에 행차했다. 갑자기 까마귀가 날아와 왕이 암살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덕분에 왕은 역모를 꾀하려던 신하를 활로 쏘아 죽여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부터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까마귀를 위해 찰밥을 지어 제사 지냈다. 정월 대보름과 약식은 여기서 비롯됐다. <삼국유사>는 1281년(고려 충렬왕 7년)에 쓴 책. 고려 때만 해도 까마귀는 신성한 새로 인식됐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까마귀를 나쁜 새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세간에 가장 널리 퍼진 이유로는 중국 한족이 까마귀를 무척 싫어했다는 것. 음양오행에서 검은색은 북방을 나타낸다. 까마귀는 북방의 새다. 그래서 북방 민족들에게 무수한 침략을 당한 중국 한족은 까마귀를 싫어하게 됐다. 특히 송나라 시절, 희종과 흠종이 금나라로 끌려가는 치욕을 당한 이후 더욱 혐오스럽게 취급했다. 중국을 상국으로 삼고 소중화 주의를 표방하던 조선시대부터 우리도 까마귀를 흉조로 여겼다.

옛사람들은 까마귀를 볼 때 눈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조(鳥)에서 눈을 상징하는 획 하나가 빠진 글자가 까마귀 오(烏)가 됐다. 조감도(鳥瞰圖), 일명 ‘버드 뷰’는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새의 시점에서 그린 지도. 여기서 획 하나를 빼 시인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오감도’란 제목은 일제 강점기 시절, 불안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표현이다.

■ 까마귀의 이미지가 변한 이유는 백색 선호 사상

무엇보다 까마귀의 이미지가 변한 이유는 백색 선호 의식에서 비롯됐다. 백색 숭배는 부계사회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흰색은 양이고, 양은 남성을 상징한다. 게다가 흰색 털을 가진 동물을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면서, 상대적으로 검은 까마귀의 신비감은 점점 희석됐다. 세종 때는 흰 까마귀(白烏)의 출현을 하례하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냈다. 예종 때는 흰 까마귀가 궁궐 후원에 날아오자, “내가 덕이 적은데 어찌 이러한 상서로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다만 나의 부족함을 도와서 길이 성세(盛世)를 맞도록 하라”고 하례를 사양했다. 인조 때도 흰 까마귀가 순천에 나타난 것을 실록에 기록했다.

백색 선호 의식은 애완용 개나 진돗개, 풍산개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리지널 블랙탄과 흑구를 제치고, 백구가 선호 견종이 됐다. 반면 검은색은 갈수록 검은 색깔 이외에 부정적인 뜻을 더하는 의미 지향을 가지게 됐다. 나쁜 마음이라는 뜻의 ‘흑심’이 그렇고, 암시장(black market)이란 말 등이 그런 예다.

까마귀 집단에는 기러기류처럼 리더(지도자)가 없다. 시끄럽게 울어대다가 금세 흩어진다. 이런 연유로 형편없는 군대를 가리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란 사자성어가 생겼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등의 속담도 까마귀에 대한 부정적 습속을 잘 대변한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 먹었나?”라고 비유한다. 까마귀의 몸 색깔에서 비롯된 말이다. 온몸이 새까만 까마귀는 먹통을 연상케 한다. 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까먹는다’라고 표현하기 때문. 여러 연구 결과 까마귀의 지능은 새 중에서 우등생으로 밝혀졌다.

흉조의 상징이던 까마귀는 요즘 다시 ‘반가운 손님’ 대접을 받고 있다. 경기도 오산시는 까마귀 ‘오’자가 들어간다. 얼마 전 오산시 캐릭터가 비둘기에서 까마귀로 바뀌었다. 까마귀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울산에서는 5만 마리 까마귀 떼가 매년 11월 몽골·시베리아 등지에서 날아와 이듬해 3월까지 머문다. 울산시 생태자원으로 활용되면서 먹이주기 사업을 펼친다. 매년 까마귀 축제를 열 정도다. 의문의 흉조가 된 까마귀의 슬픈 연가는 이제 그만. 까마귀여, 이 세상 모든 싱글들의 오작교, 남북한의 오작교를 다시 만들어다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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