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내외뉴스통신] 장혜린 기자

KBS 1TV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캐러비안의 보석이라 불리는 카리브 과들루프(Guadeloupe)를 소개해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방송된 KBS 1TV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는 과들루프에 대해 집중 소개했다.

하늘과 바다, 땅을 닮은 섬 과들루프(Guadeloupe). 대서양 카리브해에 자리한 과들루프는 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다.

푸앙트 아 피트르에서 현지 사람들의 정겨운 시장 풍경을 만난 후, 어두웠던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메모리얼 악트’를 찾았다. 바나나는 과들루프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다.

과들루프 바나나의 80%가량이 생산되는 곳 바스테르를 찾아 바나나를 수확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코발트 빛 바다가 펼쳐진 과들루프의 해변까지 과들루프에서 카리브해의 낭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아픈 노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곳은 다양한 산호초가 머무는 카리브해의 바닷속 풍경 그리고 활화산의 생생한 숨결까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태초의 풍경 그대로인 자연을 선사한다.

과들루프는 서쪽의 바스테르 섬과 동쪽의 그랑드테르 섬 등 1쌍의 섬과 여러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소앤틸리스 제도에 속한다. 카리브 해 동쪽에 있으며 프랑스에서 약 6,900km 떨어져 있다.

바스테르 섬은 길이가 43km, 너비가 24km이다. 화산폭발로 생겼고, 숲이 우거진 산이 많은 섬이다. 가장 험난한 수프리에르 산(1,467m) 화산봉을 비롯해서 지형이 매우 험하다.

주요 강은 고야브 강이며 24km로 가장 길다.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만(灣)과 해변이 있어서, 들쭉날쭉한 모양을 이룬다. 그랑드테르 섬은 길이 34km, 너비 32km의 석회암으로 된 산호섬이다.

150m에 이르는 낮은 구릉이 섬의 중부와 남부를 향해 뻗어 있다. 그랑드테르 섬의 해안선은 산호초로 둘러싸여 불규칙한 형태를 이룬다. 거친 석회암 토양으로 물이 재빨리 스며들기 때문에 몇 개의 계절 하천만 있다. 길이 6km, 깊이 5m의 좁은 해협으로, 주변에 홍수림 습지가 있는 리비에르살레 해협이 바스테르 섬과 그랑드테르 섬을 가르고 있다.

기후는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열대성 기후이다. 연평균기온은 해안지역에서 약 27℃이고 연중 기온변화가 거의 없다. 연평균강수량은 해안이 약 1,300㎜이고 수프리에르 산의 정상이 8,000㎜ 이상이다.

바스테르 산맥에는 마호가니, 쇠나무 같은 열대림이 울창하며, 커피·카카오·바닐라 등 작물용 수목림도 매우 많다. 해안에는 홍수림과 야자나무가 많이 자란다. 바스테르 섬의 남부에는 바나나 농장이 많이 몰려 있으며 그랑드테르 섬의 평지에서는 사탕수수가 널리 재배된다.

주도는 바스테르이다. 함께 나비 모양을 하고 있는 바스테르와 그랑드테르 두 섬을 합쳤을 때, 남북으로 최대 길이가 42km이고, 동서로 최대 너비가 61km이다. 북서로 240km 떨어져 있는 생바르텔레미 섬과 생마르탱 섬의 북부 2/3는 과들루프의 속령이다.

대부분이 흑인과 물라토(유럽인과 흑인의 혼혈)이지만 생트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프랑스계 백인들이다. 프랑스어가 공식어이지만 크리올 방언도 널리 통한다. 인구의 8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다른 서인도제도의 섬들에 비해 낮은 인구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출생률이 그 지역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사망률 역시 비교적 낮다. 인구의 1/3 정도가 15세 미만이고, 인구의 거의 절반이 도시지역에 산다. 2016년 추계 인구는 471,052명이다.

과들루프의 경제는 프랑스 정부의 원조에 많이 의존한다. 원조금은 국민총생산(GNP)의 반 정도에 이른다. GNP는 인구와 같은 비율로 낮은 성장률을 보인다. 그러나 1인당 GNP는 서인도제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농업은 GNP의 약 1/10을 차지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역시 전체 노동인구의 약 1/10에 달한다.

식량 생산량은 대부분 국내수요에 미치지 못한다. 설탕은 바나나에 이어 주요수출품이다. 작은 농장에서는 대부분 소가 사육된다.

제조업은 낙후된 상태이고, 주로 국내 원자재 가공업이 성하다. 정제설탕·술·화학제품·직물·가구·플라스틱 제품 등을 생산하며 전력은 모두 수입된 연료로 만들어진다. 해마다 과들루프를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프랑스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유람선을 타고 북아메리카에서 오는 관광객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주요 무역대상국은 프랑스이며 수입품의 70% 이상을 프랑스에서 들여온다. 수입이 수출보다 훨씬 많다.

16세기에 스페인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 섬들을 점령하려 했지만 카리브 인디언들이 이를 물리쳤다. 카리브 인디언들은 15세기에 아라와크 원주민에 이어 이곳에 정착했다. 마침내 1626년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 해안에 정착해 부락을 세웠으나, 이미 무역소를 세운 프랑스인에 의해 쫓겨났다.

1635년에 프랑스 식민지가 세워졌고, 카리브 인디언들과 몇 해 동안 전투를 한 뒤 식민지는 번성했다(→ 식민주의). 1674년에 과들루프는 프랑스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초 장 바티스트 라바가 과들루프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실상 바스테르 식민지를 세운 인물이었고, 섬에 설탕 정제소를 처음으로 세웠으며, 영국인들에 대항해서 싸우도록 흑인 노예들을 무장시켰다. 1759년과 1794년에 섬은 영국에 의해 점령당했다.

2번째 점령기에, 빅토르 위그가 이끄는 프랑스인들이 다시 섬을 탈환했다. 위그는 노예제도를 없앴고, 그결과 수백 명의 백인 농장주들이 학살당했다. 1802년에 노예제도는 다시 시행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질서를 회복하려고 시도했으나, 1810년 영국인이 다시 섬을 정복했다. 1815년 나폴레옹 통치의 프랑스가 마지막으로 패배한 이후 섬은 다시 프랑스에 넘어가게 되었다.

1816~25년에 과들루프의 헌법이 처음 만들어졌다. 1837년에 자치기구들이 세워졌고, 1848년에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9만 3,000명의 노예가 해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과들루프는 샤를 드골 장군의 저항운동을 지지했고, 1946년에 프랑스의 주로서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1950~70년대에 높은 실업률, 개발저하, 인구과잉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자 프랑스 정부는 거주자들을 프랑스 행정중심지로 이주하도록 권장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역 좌파,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이 과들루프의 독립을 주장했고 많은 파업과 시위를 선동했다. 1980년대초 프랑스 정부는 과들루프의 경제자립을 지원하면서도 계속 프랑스의 주로 확보할 것을 거듭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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