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북 무장선박 격침해 부산 지킨 '대한해협해전' 승리의 주역...마지막 함장 출동서 북한 간첩선 나포하기도
아들과 손자가 모두 현역 복무한 '군인가문'으로 차남이 최재형 감사원장..."백선엽 장군은 전쟁영웅" 아쉬움 표시

[내외뉴스통신]연성주 기자= 1주일후면 6·25전쟁이 70주년을 맞는다.

벌써 두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동족상잔의 상흔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하다. 특히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등 한반도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올해의 6·25는 어느 때보다 각별하다. 

6·25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지켜온 노병들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할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70년 동안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켜온 많은 영웅 가운데 아흔두 살의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해사 3기)이 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최 감사원장은 사법연수원 시절 몸이 불편한 동료를 2년 동안 업어서 출퇴근시키고 자녀들과 함께 4000만원을 13개 구호단체에 기부한 미담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최 예비역 대령의  아파트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걸려있다.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최 예비역 대령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북한 공산당을 피해 온 가족이 월남했다.

"북한 앞날은 싹수가 노랗게 보였다. 소련군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강도와 강간을 일삼았다. 손목시계 뺏어서 한쪽 팔에 열 개 넘게 차는 놈들도 있었다" 고 그때를 회상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우리 해군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1947년 9월 해군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해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임관한지 불과 4개월 만에 6·25를 맞았다. 6·25 당시 해군 소위였던 최 예비역 대령은 첫 번째 전투인 '대한해협해전'에서 북한에 대승을 거두면서 우리 해군 전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지난 2013년 출판한 회고록 '6·25 바다의 전우들'에서 '대한해협해전'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우리 해군은 전쟁 직전까지 포 달린 군함이 한 척도 없었다. 일본이 버리고 가거나 미군이 쓰던 작은 소해정 몇 척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우리끼리라도 돈을 모으자"라며 모금을 제안했다. 6·25 1년 전인 1949년 6월 1일부터 군함을 구입하기 위해 전 해군 장병이 월급에서 5~10%씩 갹출하고 해군 가족들이 빨래, 뜨개질, 바느질삯으로 돈을 보탰다. 이렇게 모은 성금이 당시 돈으로 852만원(1만8000달러)이었다.

이 돈을 손 제독한테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끄럽기 한이 없구나"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4만5000달러를 지원해 주면서 간신히 전투함을 살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게 됐다.

해군이 구입한 백두산함(PC-701)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잠수함을 격침하기 위해 건조한 미군의 구잠함 중 하나다. 해군은 뉴욕 주에서 백두산함을 구입한 후 마이애미와 파나마운하를 거쳐 하와이에 입항한다.

그곳에서 3인치 포를 장착하고 돈이 부족해서 포탄 100발만 구입해 국내에 들어오게 된다. 원래 미국에서 붙인 이름은 '화이트 헤드 소위(Ensign White Head)'였다. 백두(白頭)와 화이트 헤드가 공교롭게도 같은 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6·25때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701) 갑판사관이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6월 26일 새벽 무장병력 600여명읕 태우고 부산으로 침투하던 북한 수송선(1000톤 급)을 격침시켰다.  6·25의 첫 해전이자 승전으로 '대한해협해전'이라고 불린다.

미국의 전사 학자 제임스 필드는 "부산을 지킴으로써 연합군의 최후 보루이자 UN군 병참 물자의 주요 수송로를 확보했다"라는 이유로 '6·25의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만약 이 때 부산항이 북한군에 기습당했다면 전쟁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이후 덕적도·영흥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대청도·소청도 탈환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등 6·25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1951년 2월 10일 한국 해군·해병대가 단독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인천을 탈환해 유엔군 재반격의 기반을 구축한 작전을 말한다.

당시 연합군은 1·4후퇴 이후 재반격에 나서 부천 소사 일대까지 진격한 상태였으나 전쟁 물자를 양륙할 수 있는 항만이 부산항 밖에 없어 군수품 보급에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 재탈환에 필요한 양육항만을 시급히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전황을 고려해 한국 해군과 해병대는 1951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인천항 교두보 확보를 위해 백두산함(PC-701), 강경정(YMS-510), 대전정(JMS-301), 통영정(JMS-302), 단양정(JMS-306), 덕천정(JMS-310) 등 6척의 함정과 각 함정에서 자원한 해군 장병 73명, 그리고 김종기 해군소령이 지휘하던 덕적도 해병대 1개 중대로 구성된 합동특공대를 조직해 상륙작전을 감행, 1·4후퇴 이후 한 달여 만에 인천을 재탈환했다. 작전결과 적 사살 82명, 생포 1명, 전차와 야포 등을 노획했다.

이 작전에 덕천정(JMS-310)의 정장인 고 모예진 예비역 대령이 함께 참전했다. 중견화가인 모지선 화백의 부친인 모 예비역 대령은 우리 해군의 창설멤버이기도 하다.

백두산함 갑판사관으로 참전했던 최 예비역 대령은 “해군·해병대 상륙부대가 적의 지휘본부가 있는 인천 시청을 탈환하고 인공기와 김일성 사진을 뜯어내고 태극기를 걸었다”며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해군 만세, 해병대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1964년 2월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 제2대 함장에 취임했다. 한국 해군에 구축함이 한 척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충무함의 임무는 막중했다. 그는 병사들을 최고의 전투프로를 만들기 위해 전술과 사격술을 고도로 숙달시켰다.

"잘 먹이자, 잘 재우자, 훈련은 지독하게 하자"가 그의 모토였다.

그는 군인들을 잘 먹이기 위해서는 관급 부식보다는 직접 현지에서 구매하면 싸고 많은 부식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식을 현찰로 받아서 보급관이 함안, 창녕, 진영 등 시골장터에 가서 직접 구매하도록 했다. 보급관이 부식재료를 사 오면 장교 부인들이 배에 와서 반찬을 만들었다.

1965년 3월 1일 함장으로서의 마지막 출동 일화는 유명하다. 사령관에게 "간첩선을 잡아오겠다"라고 선언하더니 정말 동해상에서 북한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 8명을 생포하고 돌아왔다.  

최 예비역 대령은 금성충무무공훈장 등 무공훈장 4개를 받고 1968년 전역한 뒤 안보 강연을 다니면서 전사자 유족 찾기 운동을 벌였다.

회고록에서 그는 "피를 쏟으며 나라를 지켜낸 전우들의 흔적과 이름 석 자를 후대에 남겨 놓은 것이 나의 마지막 책무"라고 적었다.

6·25 당시 장사동 상륙작전에 참전했다가 숨진 문산호 민간인 선장· 선원 11명의 명단을 찾고 이들의 공을 재조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이 작전에 참가했던 민간인은 잊힌 존재였다.

결국 정부가 나섰고 문산호 전사자들은 69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최 예비역 대령은 "민간인이지만 나라를 지키려 참전했던 사람들을 기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또 6·25에서 전사한 부하 동상을 각 모교에 세우기도 했다.

그는 "출신 학교에 동상을 세우면 그 학교 후배뿐만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다 본다"며 "'우리 선배들이 6·25 때 바다를 지켰구나. 그래서 오늘 대한민국이 있구나'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현역 시절 최 예비역 대령은 해사 부교장을 맡아 정예장교 양성에 힘썼던 경험으로 1994년부터 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청소년 단원과 학교장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또 장병 대상으로 안보교육도 하고 있다.

또 2017년에는 해군 최초 명예 정훈병 과장으로 위촉됐다. 그는 지금까지 300회 이상을 강연했다고 한다.

그의 강연 주제는 세 가지다. 첫째는 국가 안보, 둘째는 해양, 셋째는 해군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바다 때문에 먹고살고 있기 때문에 바다가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나라입니다. 한해 수출액이 5000억 달러가 넘는데 바닷길을 통해 원료 수입해서 완제품 만들어서 다시 바닷길을 통해 수출합니다. 대한민국은 하루 40만 톤의 기름이 들어와야 돌아 갑니다. 1만 톤짜리 유조선이 매일 40척씩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다가 생명 길입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제주 해군기지입니다"

2018년 해군 전사 순직자 자녀를 위해 3000만원을 쾌척하는 등 기부활동도 열성적으로 하고 있다.

최 예비역 대령 집안은 '군인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동생이 두 명 있는데 각각 해병대 대령, 해군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아들 넷은 모두 장교로 복무했다. 큰아들은 해군 대위, 둘째는 육군 중위, 셋째는 공군 대위, 막내는 육군 소위로 군 생활을 했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둘째 아들이다.

손자 1명은 해병대 중위로 DMZ(비무장지대) 소대장을 했으며 2명은 육군에서 복무했다. 1명이 현재 해군 갑판병으로 근무하고 있다. 직업군인은 아니지만 모두 장교 아니면 최전방에서 근 복무를 시킨 것이다.

그는 "내가 자랑할게 있다"라며 "내가 이래 봬도 육·해·공군, 해병대 대원을 지휘하는 통합 사령관"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가끔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내가 백선엽 장군을 가끔 만나는데 올해 봤을 때는 말도 못 하더라. 6·26 전쟁 영웅의 그런 모습을 보니, 내마음이 아프고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 아쉬워했다.

현재 여권 일각에서 '친일 파묘론'을 제기하면서 백선엽 장군의 사후 현충원 안장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최 예비역 대령은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는데, 저쪽(정부 여당)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통일이 될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죽으면 내 무덤도 파자고 할 사람들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70년의 소회를 묻자 최 예비역 대령은 "온 국민의 힘으로 지켜온 나라를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6·25 당시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온 국민이 합심했기 때문"이라며 "소년병과 여성, 50대 지게부대까지 전 국민이 합심했다"고 강조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최근 코로나19 사태에 대해서도 "지금은 온 나라가 전염병 때문에 어려운 시기"라며 "(6·25 때 그랬듯)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 예비역 대령은 최근 우리에게 닥친 안보 위기에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지금이 6·25이래 대한민국 최대 안보위기다. 김정은은 조만간 핵으로 대한민국을 겁박하고 굴종하라고 할 것"이라며 "한번 무너진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며 국민들은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직도 일부 진보진영에서 제기하고 있는 6·25 북침설과 천안함 조작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최 예비역 대령은 "6·25가 남침이라는 사실을 규명하는데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며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러시아를 방문해서 남침계획이 담긴 극비문서를 받아오면서 한국전쟁의 진상이 규명됐지만 여전히 일부 진영에서는 북침설을 제기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국제조사단이 천안함 폭침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결론을 이미 내렸지만 일부 좌파들은 아직도 재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국민 행복의 울타리는 국가"라며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 국민도 그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예비역 대령은 "인도의 타고르 시인은 '힘없음은 곤경을 유발한다'라고 했다"며 "이런 것을 우리 국민이 아는 것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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