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두 주일 전 큰형부가 국민 훈장을 받았습니다. 형부는 치과의사인데 '사단법인 열린치과 봉사회'의 활동으로 훈장을 받은 것입니다. 훈장증에는 '대통령 박근혜와 국무총리 이완구'의 사인과 직인이 선명합니다.

형부의 훈장으로 인해 '이씨 가문(형부는 이씨입니다)'에는 영광뿐이지만 '신씨 집안'에는 묘한 기류가 드리웁니다.

"박근혜가 형부한테 상을 줬다..., 아이러니하면서 역사적으로 다가오더라. 사는 게 참 웃겨,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가족이 대통령 상을 ㅋㅋ."“그것도 박대통령이, 큰박, 작은 박^^.”

"병 준 아버지, 약 준 딸, 화해의 몸짓일까."

"서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늘의 뜻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런 일 오래 갖고 있어봐야 다 헛 거라고 말이야."

"이러면서 흐물흐물, 어물쩍 한세상 마치는 거지, 적도 친구도 없는 세상 이치…"

"그런 거 같아."

'형부의 훈장'에 대해 '카톡'으로 나눈 작은 언니와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박정희로 인해 곤욕을 치른 선친의 후예, '빨갱이 가족'이 아닙니까. 우리 가족을 무단히 괴롭히던 상징적 세 집단(경찰, 군인, 공무원)의 최정점에서 내민 겸연쩍은 손길, 혹은 눙치는 몸짓을 무연하고도 무추름하니, 엉거주춤 받아 쥔 느낌이랄지, 형부의 훈장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서슬 퍼런 연좌제로 아들, 딸은 물론이고 사위, 며느리까지 구박을 할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잘 했다고 표창을 받았다 하니 지인 한 분은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자연의 변화처럼 인간도 자연과 같이 그러한 거지. 그러기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고, 보다 열린 사고를 가지고 보면 다 그게 그거"라며 언니와 나눈 대화와 같은 감상을 밝힙니다.

머리 속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물론 생각만 다르게 한 게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죄'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중턱에서 꺽인 인생은 비단 아버지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바깥에 남은 가족들의 삶도 스산하기 그지없어서 우리는 너무 가난했고, 너무 치열했고, 너무 음전하면서도 기가 죽어 여기저기 골병 든 사과처럼 푸석거렸습니다. 오빠의 죽음도, 나의 파경도, 올케언니와 내 아이들과 조카들의 대물림 고통도 뿌리는 전부 거기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불행 종합 세트'를 끊임없이 끄르다 못해 종당엔 참척을 당하신 어머니의 비통함까지 한 꾸러미에 꿰어 죄다 물어내라고 떼거지를 쓰고 싶습니다.

"니들 아버지가 도둑질을 했냐, 사람을 죽였냐. 니들 아버지 징역살이는 남들과 다르다. 그러니 전혀 기죽을 거 없다."

어릴 적 세 고모들로부터 무시로 주입되던 '아버지의 그 일'이 다시금 귓가에 선연합니다. '남의 물건을 뺏고, 훔치고, 욕하고, 때리고, 거짓말하고 성추행하는 것'만 빼고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신 법륜 스님 말씀도 겹쳐 들립니다. 스님은 그러지 않기 위해서 마약을 하거나 술에 취하지 말 것을 부연하셨지만 스님 말씀 어디에도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죄가 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인간의 생애와 그 가족들의 것까지 국가의 폭력으로 성한 곳 없이 시퍼런 멍이 든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3년 전 저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선친은 1968년 8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1988년 8월, 올림픽 특사로 가석방됐습니다.

대학시절 내내 꽁무니에 형사가 따라 다니는 데다 저의 동향에 대해 학과장에게는 보고까지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데모라도 있는 날은 특별 감시에 들어가고 어떤 때는 집에까지 쫓아오니 저로선 어둡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날은 으레 어머니도 일하다 말고 불려와 담당 형사에게 문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몇 달 간격으로 정해진 날짜에 찾아오는 공안담당 형사에게 "그런 일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 연결도 없어요...,그러믄요..."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흐리시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그런 날은 덤터기를 써야 하니 더 속이 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절이 보다 살벌했을 때는 동네 사람 눈이 무서워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전학도 '밥 먹듯' 해 제 작은 언니의 경우는 초등학교를 예닐곱 번이나 옮겨 다녔습니다.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어머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습니다.

양팔을 간격있게 벌려 우뚝 선 채 버스의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버지 고문당하던 모습이 생각나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 상태로 하도 맞아서 눈알이 빠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는 어머니 말씀도 새삼 떠오르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던 취조실 석탄 난로를 엉겁결에 껴안아 얼굴에 중화상을 입었다는 서준식 씨, 남편의 사형선고에 충격을 받아 아내가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잔혹한 고문을 거친 장기수, 양심수의 가족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의 모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저는 가장 어린 회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민가협의 '잔다르크'는 아니었고 국가로부터 무단히도 미움과 트집을 잡히며 가난하고 남루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남편과 자식, 형제의 기한없는 옥살이에 기다림에는 이골이 났다면서도 그 고통의 분량만큼 희망 또한 옹골지게 키우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 무렵 유난히 지쳐 하시던 어머니께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드릴 길이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아예 체념을 해야 하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자투리일망정 조금치라도 시국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민가협에서는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당시 제1 야당 부총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셨는데 그분은 제게 여성지 같은 데에 딸의 시각으로 수기를 쓰는 것이 '윗선'을 건드리는 가장 호소력있는 방법이라고 조심스레 제안하시며 하지만 가뜩이나 연좌제가 있는데 그런 글로 인해 이담에 혼인할 때 더 지장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시작된 아버지의 옥살이가 스물여섯 결혼하던 그 해에 끝이 났으니 돌이켜보면 가족들까지 굴비 두름으로 엮여 고통받던 참말로 '징한' 세월이었습니다.

'인연 따라' 맺혔던 연의 매듭이 이제는 인연을 따라 풀어질 때가 온 것일까요? 형부의 훈장은 그런 은유와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금 '국가의 권력으로, 헌법의 이름으로' 예의 우리 가족에게 다가온 조짐, 그러나 형부의 훈장은 명예롭게 반짝일 뿐입니다.

많지 않은 가족들이 모인 축하 자리에서 느꺼운 감정을 누르며 "살다보니 이런 시절도 오네요"라고 옆에 계신 어머니를 위로하려는데 어쩔 수 없이 설움이 피어 오릅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번연히 알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훈장을 줘도 되는지 등등, 맹랑한 마음과 어수선한 분심(分心)으로 격랑이 이는 것을 지금도 어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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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www.bistromeme.com)를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 학교, 중앙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공저<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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