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내외뉴스통신] 장혜린 기자

가수 하춘화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1955년생으로 올해 나이 예순 여섯살인 하춘화는 천부적인 꼬마 가수였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부산 제5 육군병원에서 열린 부상 학생과 시민 위문 공연에서 만 5살 하춘화가 노래하는 광경을 본 부산일보 기자는 “재롱둥이 천재꼬마 탄생”이라는 제하의 기사로 천재 어린이 가수의 등장을 알렸다.

1961년 동화예술학원에서 정식 음악 공부를 시작한 하춘화는 기타 치는 8살 김영환,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9살 정선과 함께 ‘학원의 3대 영재’로 통했다. ‘하춘화와 삼남매’ 그룹을 결성한 이들의 첫 무대는 서울 종로4가의 천일극장이었다.

서울 장안에 “기막힌 연주는 물론 못 부르는 노래가 없는 어린이 보컬 그룹이 등장했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극장 2층부터 성북동 가는 전차 길까지 관객이 늘어서고 종로통 전체가 북적거려 관객 출입을 통제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소문이 퍼져 나가자 시내 극장 쇼단장들이 뛰어왔다. TV가 없던 당시, 소문을 들은 KBS에서 아이들을 지프차에 태우고 데려가 라디오를 통해 생방송을 했다. 이 공연 후 하춘화에게는 데뷔 음반을 취입할 기회가 찾아왔다.

하춘화 데뷔 음반은 국내 최초로 제작된 어린이 가수의 독집이다. 독집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당시 국내 대중가요계에서 자신의 노래로 모든 수록곡을 장식한 음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1961년 말, 제작을 맡은 아세아레코드에서 ‘가나다레코드’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총 8곡을 동시 녹음했다. 을지로 인쇄소에서 앨범 재킷을 인쇄해 1000장의 10인치 LP 「당년 7세 소녀가수 하춘화 가요앨범」이 1962년 초에 발표되었다.

첫 트랙 <효녀 심청 되오리다> LP 표면에 바늘을 올리면 “저는 금년에 7살 된 하춘화입니다”라는 육성이 담긴 앙증맞은 인사말이 흘러나와 청중을 포복절도하게 한다. 히트곡 <대구역 떠난 완행열차>도 특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하춘화와 삼남매 쇼'에 대한 소문을 들은 공주형무소의 간청으로 형무소 내 공연이 성사되었을 때의 일이다. 5백여 명의 죄수가 모인 강당에서 하춘화는 청승맞게 노래를 불렀다. 순간 장내는 눈물바다로 변해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린이 가수의 첫 등장은 큰 화제를 모았지만 사회적 비판 여론도 일었다. 1965년 2월 3일 MBC 라디오 「가요 1번지」 진행 MC가 방송에서 “어린이를 돈벌이에 이용한다”고 했던 비난 발언은 당시 어린이 가수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1,500회가 넘는 공연 기록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된 하춘화의 데뷔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어린이 가수 장르라는 새 이정표를 제시했다. 2000년 데뷔 40주년을 맞은 하춘화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자신의 히트곡을 2장에 담은 기념 CD를 발매했다.

1974년부터 자신만의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에 영화 '숙녀 초년생'에서 남진과 함께 주연으로 열연하여 영화계에도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11월 11일에 이리역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어 약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중에 하춘화와 이주일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한동안 가수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故 이주일은 당시 부상당한 하춘화를 구한 사실이 알려지면 무명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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