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내외뉴스통신] 임지은 기자 = 다음은 고조선 논쟁과 <레지 사료>로 유명한 역사학자 유정희(남, 39,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틴의 고조선 연구』 등 저/해제) 선생이 직접 작성하신 기고문이자 <레지 사료> 공개문이다.

아시다시피 필자(유정희)는 2018년 7월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아이네아스 刊)>란 책에서 300년전 프랑스 레지(Regis) 신부가 쓴 고조선 관련 <레지 고조선 사료 :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 일명 레지 사료>를 해제하고 이를 100년전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등이 쓰신 『신단민사/실기』 등과 교차검증 하였다. 이미 책이 다 동난 상황에서 개정판을 찍을 생각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한국인에게는 중요한 고조선 관련 사료(史料)인 이상, 책 내용 중 일부라도 이것만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세계 어디에서든 무료로 <레지 사료>와 그 해제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기고문으로 고조선 관련 부분 <레지 사료>를 공개한다. 지면 관계상 300년전 불어와 영어 원문은 생략하였는데, 추후 필요시 원문들도 다시 공개하겠다. 다음 공개문은 필자의 책 2-6에서 2-9 부분이다.

2-6.

① 조선인(여기서는 주로 고조선인<古朝鮮人>)은 B.C. 2357년 치세를 시작한 중국 요(堯) 임금때부터 B.C. 2188년 치세를 시작한 하(夏)나라 3대 제왕(帝王)인 태강(太康)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속민(屬民)이었다. 그러나 이 때 ②하나라 천자(天子) 태강의 압정은 고조선의 저항을 가져왔다. 하지만 B.C. 1818년 치세를 시작한 하나라 마지막 천자(天子)인 걸(桀) 때 이르러서는 고조선은 중국에 다시 조공을 바쳤다. 그렇지만 걸(桀)의 폭정은 또다시 고조선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어 이때 고조선은 일부 중국 영토에 침입하기도 한다.

① 고조선의 시작과 우리민족의 기원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일치한다. 주지하다시피 『삼국유사』에 보면 일연은 고조선의 성립이 중국 요(堯) 임금 때부터라고 기술했다. 참고로 이 책 저자인 레지 신부가 일연의 『삼국유사』를 봤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레지 신부는 분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중국 측 기록을 보고 이 글을 쓴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한데 아마 일연이 말한 바와 같이 고조선이 중국 요 임금때 성립되었다는 얘기가 당시 명, 청 시대 중국에서도 꽤 통용되었던 얘기였던 것 같다. 더 나아가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데, 아마 중국 측 신실할 수 있는 고서에 고조선이 중국 요 임금때 기원한다는 기록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위서魏書』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기원을 얘기했는데 현존하는 『위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당연히 다른 『위서』일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아마 『위서』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고조선을 더불어 설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에서 보면 고구려와 북위(北魏)의 관계가 밀접했으므로 아마 여기서 말하는 『위서』의 위(魏)는 북위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북위의 역사서를 기록한 고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겠다.

② 필자 같은 동양사, 그 중에서도 선진사(先秦史) 전공자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기록이다. 곧, 하(夏)나라 3대 제왕(帝王)인 태강의 실정을 언급하였는데 이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서경(書經)』 등에 자세하다. 태강에 대해서는 『사기』 보다는 『서경』 등에 자세한데, 곧, 태강이 사냥 등의 유희를 즐기다가 유궁(有窮)의 후예(后羿) 에게 나라를 잃은 것을 말한다. 이어서 하나라 마지막 제왕인 걸(桀)의 폭정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기록도 당연히 『사기』 「하본기(夏本紀)」와 「은본기(殷本紀)」에 자세하다. 걸(桀)의 폭정은 「하본기」 보다는 「은본기」가 더욱 자세한데, 아무튼 아마 이때 하나라가 혼란하자 고조선이 반란을 넘어 중국 국경을 침입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 같다.

2-7.

하나라 걸의 제위를 찬탈하여 B.C. 1766년경부터 중국을 통치한 상(商)나라 초대 제왕인 ①성탕(成湯)은 무력으로 고조선인들을 제압하고 고조선이 다시 조공을 바치게 만든다.

① 상나라 개국자인 성탕이 상나라를 세우고 당시 중국을 다시 재정비하자 고조선이 다시금 조공하였던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기록 등에서 흥미로운 점은 하(夏)에서 상(商)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중국에 대한 조공, 이탈, 다시금 복속 등이 중국사와 연관되어 상당히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곧 중국이 혼란스러우면 이탈, 안정되면 다시금 조공하는 그런 관계이다.

2-8.

① B.C. 1562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帝王) 중정(中丁) 때 고조선은 중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고조선은 때때로 굴복하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속과 반란은 B.C. 1324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무정(武丁) 치세 이전 까지 계속되었다.

① 사마천의 『사기』 「은본기」에 보면 이 당시 중국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때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상나라 19대 제왕인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으로 옮긴 상나라의 제왕인데, 은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무정(武丁) 시기 상(商)은 과거의 세력을 꽤 회복한다.

2-9.

① 무정 때의 일시적인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자신들을 정복하여 분산시킨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에 자리했었다. 그러나 주왕조(Tcheou, 周王朝) 이전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은 알려진 게 미미하기에 ②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기자(箕子) 시대 이들의 왕정(王政)이 제대로 성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기자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한 주로 복속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2814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① 이 부분은 우리나라 전통의 양반관료,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김교헌(金敎獻), 유근(柳瑾) 등이 편찬한 20세기 초의 저작인 『신단민사』, 『신단실기』, 『단조사고』 등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부분은 『신단민사』에 보면 자세한데, 곧 “예의 군장이 은나라 소을(小乙)의 쇠약해진 틈을 타서 서주를 점령하고 양자강 연안에 토지를 넓게 개척하였다” 등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김교헌 등은 20세기 초 이러한 책들을 편찬함에 있어 기존의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모든 단군 관련 사서를 모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단조사고』 등을 보면 단군 관련 사료가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이 『신단민사』 등의 책들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위서(僞書)임이 확실한 『환단고기』 등의 책들과 혼동하여 그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해방 전후 출판된 『환단고기』 등과는 명확히 다르게 『신단민사』 등은 사료로서 다소 미흡한 면이 있지만, 20세기 초, 더 나아가 전통의 양반관료, 우리 유학자들의 고조선관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는 ‘국학역사학’ 자료들이다.

아무튼 이 『레지 사료』는 상나라 무정 시기 고조선 사람들이 강남과 산동에 진출했다고 하는데, 이는 『신단민사』 등에는 그 사건이 소을이라고 되어 있다. 무정은 소을 바로 다음의 제왕이므로 거의 동(同)시기 이므로 상호 교차검증이 된다. 또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아마 이때 정착했던 무리들이 상나라 최말기인 무을 시기에는 중토(中土)에까지 나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교차검증을 넘어 『레지사료+신단민사』 등과 '사료 상호보완'까지 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그 주체가 고조선이 아닌 '동이(東夷)'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글에 위만조선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서 동이는 우리 선조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선진(先秦)시기 동이와 우리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데, 물론 사료의 모든 동이가 우리와 연관이 있진 않겠지만 상당수는 우리와 확실히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가 황하 하류와 산동성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 레지 신부는 고조선의 강남과 산동지역 진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현대 영토국가를 기반으로 한 고정관념을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진한(秦漢) 전후 중국에는 이민족과 중원에서 발원한 중국인들의 조상들이 세운 나라들이 섞여 공존하였다. 이민족들이 세운 나라들은 대체로 작은 도시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문명의 외부로부터 이주한 이민족들이 중국 땅에 정착하면서 세워진 것들이었다. 『신단민사』에서 언급된 서(徐)나라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중국에 세워진 이민족 제후국이다. 이들은 비록 이민족이지만, 중국문명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주(周)나라 천자(天子)의 제후국이 되어 기존에 중국인들이 세운 여러 제후국들과 공존하였다. 중국이 시황제에 의해 통일되고 진한제국이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구한 이후 이런 이민족 조상을 둔 제후국들은 역사 속으로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사라지게 된다. 레지 신부가 말한 것처럼 고조선 계열의 부족들 중 일부가 고조선의 팽창과 맞물려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그대로 산동과 강남 지역 일부에 정착했을 것이다. 이들이 세운 몇몇 도시국가들은 춘추 혹은 전국시대까지도 생존하며 ‘이민족 조상을 둔 제후국’으로 명맥을 이어갔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레지 신부의 지적처럼 이들은 진한제국의 성립 이후 완전히 소멸되었을 것이다.

② 주지하다시피 레지 신부는 중국에서 중국측 사료를 보고 중화주의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 따라서 이 부분은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책봉된 기자조선부터 중국에서 정식으로 왕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사료된다. 물론 이는 다분히 중화주의적인 시각이므로 기자조선 이전 고조선이 국가(state)로서 성립하지 않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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