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디고 힘들게 가도 그간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주춧돌 돼”
- “반장 하던 친구는 세월이 흘러도 공부 잘하는 친구로 기억되고, 꼴찌 하던 친구는 지금도 꼴찌 하던 친구로 기억되는 게 싫어 마음 자세 다 잡어”
- “2016년 삼성화재보험 퇴직 후 프라임에셋 법인 233본부에서 제2의 인생 도전”

[충주=내외뉴스통신] 김의상 기자

“‘초등학생 때 반장 하던 친구는 지금의 나이에도 공부 잘하는 친구로 기억되고, 꼴찌 하던 친구는 지금도 꼴찌 하던 친구로 기억되는 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꼴찌만 하는 친구란 인식을 심어놓고 떠나는 건 아니란 생각에 다시는 내 인생에 모욕적 순간은 없다’란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보험인으로 새로운 마음 자세를 갖게 됐다”

이는 지난 27년 동안 묵묵히 손해보험 영업의 외길을 걸어오며 성실함과 부지런, 정직 신용,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고객 배려심과 탁월한 금융 지식수준까지 갖추고 있는 프라임에셋 법인 233본부 김동환 본부장이 손해보험설계사로 입사해 초창기 겪은 모욕감에 대한 보험영업의 각오다.

김 본부장은 6개월여 이상 보험영업을 권유하는 친구 A 씨의 정성에 감동, 27살인 1993년 12월 보험설계사 시험을 치르고 삼성화재해상보험 설계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보험영업이 생소했던 그는 고객 우선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보험영업 6년 차가 되면서부터 고객이 스스로 찾는 보험설계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삼성화재 충주지점 내 시상은 물론, 본사 시상까지 독차지하는 보험매출 성과를 이뤄내며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란 수식어와 함께 억대 연봉을 자랑하며 ‘보험왕’ 타이틀까지 차지하는 영예도 안았다.

김 본부장은 보험영업 15년 차에 삼성화재 본사 경력공채방식의 지점장 시험에 응시, 최종합격하는 쾌거를 거두며 대전·청주·제천·천안 지점을 거치면서 관리자의 길을 걸었다.

이어 그는 2016년 삼성화재를 퇴사한 후 프라임에셋 법인 233본부장을 맡아 27년간 축적된 보험영업 역량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

내외뉴스통신은 ‘보험 판매왕’이란 타이틀에서부터 국내 굴지의 손해보험회사 관리자를 역임하며 습득한 영업 노하우와 자산컨설팅 능력을 두루 갖춘 금융전문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혀가고 있는 김동환 프라임에셋 223본부장을 만나 보험영업을 하게 된 동기와 ‘보험왕’으로의 역경과 성공비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 보험영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

◆ 1993년 중순 보험설계사인 친구 A 씨가 “보험영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보험영업 권유로 보험영업을 처음 접하게 됐다.

나에게 보험영업을 권유한 친구 A 씨는 당시 안국화재해상보험(현 삼성화재해상보험)에서 4년 이상 보험영업을 하며 매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4~500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당구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A 씨의 보험영업 권유는 보수적이고 내성적인 내 성격상 보험영업은 나하고는 먼 나라 얘기로만 받아들여졌다.

‘남자’란 이유로 자존심마저 강했던 나는 A 씨의 보험영업 권유가 때론 귀찮고, 짜증까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웃는 얼굴로 6개월여 이상 권유하는 친구 A 씨의 정성에 감동, 27살(1993년 12월) 늦겨울 보험설계사 시험을 치르고 보험설계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보험영업의 성공 계기가 있다면.

◆ 1994년 1월 보험설계사 코드가 나오고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험사들은 지점 내 한쪽 벽면에 이름표 위에 달아주는 실적 판을 두었다. 보험영업을 시작한 지 2개월여가 지나도 지점 내 실적 판의 내 이름 위에는 단 한 건의 보험 실적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며 10개월쯤 됐을까 아침 조회 시간에 소장이 앞으로 부르더니 무실적인 나를 모든 설계사가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몇 개월 동안 뭘하고 다니는데 실적이 없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 순간 ‘이제는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 ‘지금 그만두면 점포 내 설계사 여러분들의 기억 속에 늘 꼴찌만 하던 나에 대한 인상이 모든 설계사들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저 가슴 한쪽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반장 하던 친구는 지금의 나이에도 공부 잘하는 친구로 기억되고, 꼴찌 하던 친구는 지금도 꼴찌 하던 친구로 기억되는 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꼴찌만 하는 친구란 인식을 심어놓고 떠나는 건 아니란 생각에 다시는 내 인생에 모욕적 순간은 없다’란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보험인으로서의 새로운 마음 자세를 갖게 됐다.

-보험영업의 어려웠던 점과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 친구 중에 직업도 안정적이고 권유하면 거절하지 않을 친구를 점찍고 처음으로 제안을 하기 위해 B 친구가 근무하는 곳을 방문해 어렵게 보험에 대한 말문을 열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찾아간 친구인데, 10개월 만에 처음 도전하는 보험설명인데 보험에 대해 한마디 들으려 하지도 않은 채 거절하는 B 친구가 너무 야속하고 서운했다

서운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리고 돌아서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감정들이 솟구쳐 오르며 너무 슬픈 하루가 됐다.

그때 본 저녁 하늘의 모습은 만 26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보험영업 후 두 번째로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는 하루가 됐다.

이날 이후 습관처럼 돼왔던 가까운 지인은 우선 보험영업 대상에서 배제하기로 하고, 훗날 그 친구가 스스로 찾아와 보험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보험영업에 대한 오기를 가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세월이 흘러 11년쯤 뒤엔가 B 친구가 찾아와 상담을 요청한 걸로 기억한다.

이미 그때는 보험영업사원으로서 최고의 자리인 전국 상위 3% 내에 이름을 올렸을 때다.

지금도 B 친구가 찾아온 그 날은 나에게 특별한 하루로 기억되고 있다.

나 자신에게 축하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홀로 유명 레스토랑을 찾아 풀코스요리를 주문하고, 지나온 옛 추억을 떠올리며 자축연을 가졌다. 늘 그날의 아픔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감사한 마음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보험영업 방식이 있다면.

◆ 길가에 떨어져 있던 토스트 굽는 기계 홍보 전단지가 나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보험영업을 시작 한지 2년여가 되었을까 어느 날 길가에 떨어져 있는 토스트기계 홍보전단지를 보고 보험홍보 영업의 영감을 얻었다. 전단지 내 토스트기계 홍보 문구가 너무나도 간단명료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착안을 얻어 ‘매년 재가입하는 자동차종합보험은 보험료 얼마입니다’라고 안내하지 왜? 보험을 가입해야 하고 어떤 대가를 얻는지에 대한 쉽고 인식할 수 있도록 각색을 해보면서 나만의 전달 화법을 찾았다. 우선 자동차 종합보험부터 새로운 화법으로 고객들에게 다가갔다. 고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너무 폭발적이었다. 자동차보험에 이어 운전자보험과 장기보험까지 가입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매출은 급상승했다. 이후 불과 2~3년이 지나지 않아 점포 내 소득 1위란 명예와 함께 억대 연봉 보험인 타이틀도 거머쥐며 모 방송국 토크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자연스럽게 나를 홍보했다.

-보험영업에 대한 생각은.

◆ 흔히 영업사원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영업은 대단히 가치 있는 분야다. 아무리 훌륭한 제품도 결국은 영업을 통해 결과를 얻는다. 영업은 고객의 심리부터 구매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예측하고, 거절을 긍정으로 바꿀 수 있는 과학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흔히 삼겹살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어떤 가게는 불판을 교체하거나 고추, 마늘, 파절이 등 주문을 해야 가져다주는 일을 흔히 겪는다. 이런 가게에서는

식사를 하고 나올 때 심부름만 시키다 제대로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는 인식으로 다시 그 가게를 찾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영업적 사업장이라고 하면 부정적 생각보다는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고 식사했다는 인식으로 재방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가게뿐만 아니라 보험 등 모든 영업업종은 영업적 마인드가 확실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려운 영업환경을 개선·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본인의 영업활동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먼저 파악해 시정하는 것이 결국 성공을 이끄는 도화선이 되리라 생각한다.

보험설계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글귀지만, 다시 한번 마음속에 되새겨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는다. “보험은 곧 신뢰를 파는 일이다. 신뢰를 저버리는 순간 고객은 떠난다”란 글귀를.

-어떻게 보험설계사에서 관리자가 됐나.

◆ 보험설계사로 15년쯤 영업을 하던 차에 삼성화재보험 본사 관리과장으로부터 지점장 응시를 해보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회사에서 경력공채방식으로 지점장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필요자격에도 조건이 된다고 설득을 해와 한 번쯤은 관리자가 되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관리자 시험에 응시했다. 관리자 응시는 시험과 함께 1차부터 3차 면접까지 진행되었으며, 나를 비롯해 전국에서 3명이 최종합격하는 영예를 안았다. 관리자 합격 후 대전·청주·제천·천안 지점을 거치면서 관리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관리자 생활을 오래한 선배 부장이 질문을 던졌다. “지점장의 목표가 무언지 아냐”고 내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절주절 이야기하는데 그 선배가 손을 흔들면서 “그런게 아냐, 지점장의 목표는 실적목표를 완성하는 게 목표야”라며 첫 번째 교육 겸 조언을 했다. 이론보다는 실전으로 살아온 시간이 경험이 전부였던 나는 업무에는 익숙지 않았지만, 그 선배의 어려운 현실 조언을 가슴에 새기며 설계사분들과 영업 현장을 발로 뛰면서 최고의 지점을 만들고자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관리자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리자를 지내며 어느 지점은 효과를 크게 본 점포도 있었고, 더디고 힘든 곳도 있었지만, 그간의 경험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프라임에셋 법인 233본부에서 제2의 인생을 도전하게 된 계기와 계획은.

◆ 이제 50대 중반을 맞다 보니 향후 인생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직면한 현실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다.

오랜 기간 쌓아온 경험을 통해 앞으로도 10년 20년 계속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램으로 고민하던 중 2016년 2월 삼성화재보험을 퇴직했다. 같은 해 프라임 62본부 소속으로 1만 2000명 이상이 활동하는 전국 단일 최대법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라임에셋 소속의 팀이나 지사 하나 없는 충주에서 233본부를 탄생시키며 제2의 인생을 도전하게 됐다.

원소사에서만 경험을 가지다 보니 프라임에셋 법인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고, 전략도 낯선 부분이 많았다.

여기에 외부지역을 확장하다 보니 천안·부천·제천·음성 등타 지역권에 조직과 사업장을 만들다 보니 늘 바쁘고 힘든 점도 많았다.

현재는 충주에서 집중하며, 더 비전 있고 만족할 수 있는 영업적 방법을 개선하고 만들어나가고 있다.

앞으로 보험영업을 희망하는 분들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노하우를 제공해 풍부한 삶을 살도록 멘토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고객 여러분께서 보험설계사들로부터 보험에 대한 컨설팅과 보장분석을 받고 보험에 가입한다고는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고객분들은 납입하고 계신 보험료 대비 가성비가 너무 열악하게 가입한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고객들에게 보험료 및 현실적 보장만 잘 챙겨드려도 경제적 효과가 크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보험영업 역량을 다해보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각오는.

◆ 앞으로 프라임 에셋 법인 233본부에서 활동하는 모든 설계사들이 마음과 몸이 지칠 때는 다시 열정의 에너지를 채워 주는 주유소 같고, 상처받고 힘들 때는 치유해주는 병원 같고, 쉬었다 가고 싶을 때는 쉼터의 휴게소 같은 233본부 환경을 만들어 나가겠다.

설계사분들이 영업활동을 하다 보면 누구나 힘든 과정을 겪는다. 그럴 때 말없이 나에 수다만 들어줘도 힘이 될 때가 있고, 힐링하고 싶을 때 가까운 곳이라도 같이 가고 싶은 좋은 동료가 있다면 그곳이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프라임에셋 법인 233본부는 이러한 환경 추구에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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