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우연히 미술을 공부하는 동호인 분들과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매년 가을 가장 청명한 기간을 잡아 여는 한 소장품 특별 전시장을 찾은 것이다.

계절 중에서도 가장 청명한 날짜를 잡는 것은 관람객에 대한 배려도 있겠거니와 무엇보다 전시 작품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딱 두 주일의 전시기간 또한 전시 작품들을 지치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란다. 그렇게 전시되고는 다시 몇 년은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다.

상업적 전시야 어디 그렇던가. 학생들의 방학 기간이어야 할 테고 전등불에 색이 바래건 더위에 습기가 차건 개의치 않고 흥행에 신경을 써서는 저 엿장수들이 모여드는 시장통의 인파들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녀야 하는 전시와는 격이 달랐다. 입장료가 없다는 배려는 차라리 뒷길의 미담인 셈이다.

한 동인이 이번 전시는 조선 중기회화들로 꾸며졌다고 귀띔하는데 어차피 내 전공이 아닌 바에야 늘 그러려니 할밖에. 매번 그저 느낌이요, 조용히 그 선인들의 숨결을 짐작하자는 태세일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풍아(風雅)한 보물이 내부에 조금씩 쌓여가는 듯, 스스로 겸전(兼全)해 지는 듯 뿌듯하니 좋았다.

그럴 터인데 그 내용을 옮겨볼 엄두는커녕 말 허두도 필요없는 거지만 튀미한 내 사념 속에도 유독 유감(有感)한 그림이 두엇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탄은(灘隱) 이정(李霆)이란 분의 대나무 그림들이었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이라는 전기적 사실 정도로 그 소개는 접고 알량한 묘사로 읊조려 본다.

‘바람이 앙칼지다. 바위 틈으로 메마르게 자라난 몇 그루의 대나무가 그 바람을 견디고 서 있다. 바람이 오는 쪽으로 아예 비스듬하게 기울어서 그 풍파를 견디려고 미리 대비한 몸짓이다.’

‘뒤쪽에 희미하게 그림자인 듯 그려진 두어 그루의 대는 바람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갈 듯 위태롭지만 맨 앞의 주인된 것과 그 다음 것은 긴장된 이면이 차라리 여유롭기까지 한 자세다. 불어올 테면 불어 보라는 자세, 그것이다.’

‘댓잎 끝에서는 새파란 바람 소리들이 쏟아지는 듯 떨림까지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물론 낮은 댓가지의 잎들은 상대적으로 덜 흔들린다. 그 관찰은 놀랍다. 가장 높은 자리가 가장 많이, 급하게 떨리게 되어 있다.’

‘모든 이파리들은 바람이 불어가는 쪽을 향할 수밖에 없지만 그 줄기는 맨 처음의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게 하려는 구도가 인상깊게 느껴진다. 소리는 맑디맑고 일체의 군더더기는 생략이다.’

눈치 빠른 이는 이미 짐작했음 직한 것이 이것은 그림이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정신이다. 정신이 대나무를 만나 표상된 것이다. 표상되고 남은 정신까지 육박해 들어가 보는 감상까지야 욕심을 넘어서 사치에 이르렀다고 하겠지만 그 정신의 굳세고도 청빈함은 어림해 볼만했다.

그림 속의 바람은 여전히 앙칼지다. 저 풍죽(風竹)을 다시 우리 정치권에 빗대어 해석해본다. 모진 바람으로 어수선하다는 우리 사회 안팎의 풍문에 진정 맞서는 자는 누구인가. 혹 온몸으로 진실하게 맞서보려는 자를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아주 꺾어버리려는 협잡도 서슴지 않는다.

정작 맨 먼저 새파랗게 흔들리며 견뎌내야 할 자들은 흔들리기는커녕 대나무를 떠나고 없는 것은 아닌가? 낮은 댓가지에서 조금만 흔들려도 되는 우리네 민초들만 온몸으로 모질게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하물며 이렇듯 신선한 충격을 주는 전시에 정녕 지도자임을 자임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풍죽'을 바라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는 미담은 영 들을 수 없을까? 그게 미담이기나 한 것인가?

짐짓 대한민국 사회를, 그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떠들지만 정작 사리와 영달만 좆아 사는 천박한 지고! 모진 풍파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도 없는 시정잡배(市井雜輩) 같으니라고! 풍죽화는 작금의 우리 정치권을 향해 이렇게 손가락질 하는 것 같다.

하기사, 시(詩) 한 편 읊을 감흥도 정서도 없는 자가 모두 댓가지 지도자인양 나대는 세상이니 달리 할 말이 무에 있으랴.

<박청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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