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선생님 가신 날, 그리고 가시는 선생님을 뵈러 성공회대학교를 찾아간 날은 그렇게도 포근하더니 그 이튿날부터 천지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온화하고 다감하셨던 선생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일까요. 선생님 안 계신 이 땅에 냉기만 한 가득입니다. 방 안에서도 손이 곱아 한 번씩 비벼가며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선생님, 저 신아연입니다. 고 신광현 씨의 막내 딸, 잘 아시지요? 28년 전 저 결혼할 때 옥중에서 글도 써 주시고 그림도 손수 그려 선물해 주셨잖아요. 그 무엇보다 소중한 혼수로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대학교에 마련된 선생님의 추모 공간에서 제게 주신 것과 유사한 선생님의 그림과 글씨를 만나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선생님, 제가 황당한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사람들이 저를 선생님의 딸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 바깥 세상에 나오셔서 바로 혼인을 하셨기에 망정이지 숨겨 둔 딸 있다고 소문나서 자칫 혼삿길 막힐뻔 했잖아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제 선친보다 세상에 더 알려져 있는 분이셨고, 같은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신 데다, 두 분 다 아주 흔한 성씨는 아니니 언뜻 들으면 선생님과 저를 부녀간으로 연결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과 저의 나이 차가 '겨우' 22살이지만 남들은 그런 것까지 짚어가며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저는 고 신영복 선생님의 딸이 아니며, 다만 제 선친께서 신영복 선생님과 옥고를 함께 치르셨다고.
그런데 선생님, 9년 전 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저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는데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이번에는 이렇게 선생님 가시는 길을 제가 배웅하게 되었네요. 저로선 뒤늦게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꽃 한 송이를 올렸으니 아닌 게 아니라 딸이 된 느낌입니다.
어쩌면 두 분은 전생에 부부의 연을 맺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년 20일 중 많은 시간을 한 방에서 기거하셨으니 부부보다 더 깊은 연이 아닌가요? 선생님이야 그때 20대 총각이셨지만 제 아버지는 40대 가장이셨잖아요. 아버지가 무기징역을 살기 시작하셨을 때 저는 대 여섯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20년 20일간을요. 어쩌면 선생님께 보여드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막내가 보낸 편지라고 하면서. 선생님께는 가족에게 써 보낸 서한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있듯이, 제게는 '감옥으로의 사색'이 있는 거지요. 비록 출간되지는 못했지만요.
"여섯 살에 시작하여 스물여섯에서야 그만둘 수 있었던 '편지질'은 어린 나이에 당한 형벌이자 고통이며, 기껏 좋게 말해봤댔자 극기 훈련 같은 자신과의 싸움거리였습니다. 특히 시험기간이나 몸이 아플 때,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도 '편지를 써야 한다'는 중압감은 항상 저를 짓눌렀습니다. "편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절규가 맘속에 늘 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은 남한테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글 나부랭이라도 쓸 수 있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20년 간 아버지께 보낸 편지 속의 수많은 활자 중 어느 것 한 자도 가석방 이후, 빛 바랜 봉함엽서를 빠져 나와 부녀 간의 정으로 살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그 덕에 전 글쟁이가 되어 지금은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있습니다.
9년 전 아버지가 치매 끝에 돌아가셨을 때는 또 이런 글도 썼습니다.
"받지 못한 사랑이 원망으로 엮였던 그 팽팽한 끈이, 언젠가는 한 번 따져보리라 벼르던 그 긴장이 당신의 치매로 허망하게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마치 치열하게 겨루던 줄다리기 중에 한 쪽이 맥없이 줄을 놓아버린 것처럼 일방적으로 상황이 종료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반칙이었습니다. 기어코 자식까지 하나 앞세운 채 그렇게 가셨습니다."
딸린 가족이 없는 선생님과, 제 아버지의 경우는 같은 징역살이라도 아주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원래 4남매였는데 오빠가 45살에 암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앞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또 저대로 호주에서 25년간 꾸려오던 가정을 잃고 3년 전에 혼자 한국으로 되돌아왔구요. 두 언니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당당히 양지에 섰는데 오빠는 그 그늘에 시들어 생명을 잃었고 저는 아직도 음지에 오도카니 서 있네요…
선생님 가시는 길에 꽃 한 송이 놓고 돌아서며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흘금흘금 쳐다보는데도 아랑곳없이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서러웠습니다. 막연히 서러웠습니다. 저는 이제 그나마 선생님의 '가짜 딸' 노릇도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선생님, 저 시집 가서 잘 살라고 옥중에서 그림도 그려주시고 글도 써 주셨는데 중턱에 가정을 허물게 되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제가 지난주에 책을 새로 하나 냈거든요. 그 책을 가져다 우리 아버지 좀 보여주시겠어요? 마침 서점에 선생님의 책 '더불어 숲'과 제 책 '내 안에 개있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으니 가져 가시기도 편하실 거예요. 우리 아버지한테 제 책 좀 보여주시고 저 좀 도와달라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제가 아버지 감옥에 계실 때 20년 넘게 편지를 써 드렸으니 아버지도 저한테 뭘 좀 해 주셔야 하지 않냐고, 그러니까 당신 딸이 글로 일어설 수 있도록 간절히 소원하더라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비록 혼자가 되었지만 당신의 막내가 글쟁이로 의연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내 안에 아버지있다.'더라고도 꼭 좀 말씀드려 주세요.
선생님, 우리 아버지 만나셨나요? 거기서도 두 분이 한 방 쓰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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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www.bistromeme.com)를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 학교, 중앙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공저<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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