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갑원 교수
강갑원 교수

[내외뉴스통신] 강갑원 대진대학교 명예교수

요즈음 모 TV  방송사에서 소아정신과 의사를 초빙하여 문제 자녀 가정을 심리 치료하는 프로가 매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에는 다양한 문제를 지닌 자녀가 등장한다. 자녀의 연령도 유아에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아이의 문제 유형도 다양하다.
등교나 학습을 거부하는 아이, 스마트폰 게임에 빠진 아이, 부모에게 욕설이나 폭언 등으로 반항하는 아이,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아이, 특정 동물에 공포를 느끼는 아이, 화장실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 등이 등장한다.   

이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문제 자녀 뒤에는 반드시 문제의 부모가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프로의 치료 대상에는 반드시 자녀의 부모나 양육자가 포함된다. 부모가 자녀 교육을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 중의 하나는 자녀를 키울수록 부모 자신의 성질이 나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자녀 교육에 문제가 있을수록 부모의 성격은 나빠지기 때문이다. 부모의 자녀 교육 과정은 수도를 하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과정에는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도 깨달아야 하고, 공부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도 알아야 하고, 자녀에게 화나는 일이 있어도 감정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게 수도하는 과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녀를 잘 교육하는 부모는 성격도 좋아진다. 

이 프로에 나온 부모들은 공통적으로 자녀에게 부모의 애정을 느끼도록 해 주지 못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애착 형성이 불안정하다. 
그런데 어느 부모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었다. 그러면 왜 부모와 자녀 간에 왜 이런 간극이 생긴 것일까? 그 이유를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상당수의 부모는 자녀에게 올바른 말을 끊임없이 해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감정에 맞게 표현해주는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아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차도 공감보다는 늘 바른 소리만 해댔다. 
아이에게는 ‘바른말’만 필요한 것보다는 따뜻한 ‘듣고 싶은 말’이 더 필요하다. 듣고 싶은 말은 자녀 마음에 공감할 때 가능하다. 바른말은 이지적이고 도덕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어서 얼핏 좋아보이지만 거기에 공감이 없다는 맹점이 있다. 

공감이란 상대와 일치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게 감정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이지적이고 분석적으로 교육하는 부모는 스스로 굉장히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교육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말을 주야장천 듣는 아이는 부모가 차가운 로봇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예를 들어 아이가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고 하자. 전자의 부모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번 시험 결과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반면 후자의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험 못 봐서 속상하겠구나, 어떡하지?”.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후자의 아이는 전자에 비하여 훨씬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마음을 수용해 주고 있고 그래서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어떤 사례의 어머니는 자녀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흥분하거나 화도 내지 않았다. 매우 차분하게 아이를 대해 주었다. 외견상 너무나 신사임당 같았다. 그런데 자녀는 어머니의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수용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자신의 경험을 개방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변명, 부모의 지시 불이행, 거짓말, 반항 등으로 나타난다. 부모는 겉으로 드러난 이러한 자녀의 행동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달려든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둘째는 자녀의 선택은 없고 끊임없이 부모의 요구만 있었다. 
인간은 연령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자율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뜻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싶어한다. 에릭슨(Erikson)이라는 발달심리학자는 걸음을 걷기 시작하는 영아에게도 이러한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스스로 걷지 못할 때에는 하는 수 없이 양육자의 처분에 따랐지만, 스스로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이들은 가고 싶은 곳으로 스스로 가려고 하고, 만지고 싶은 것을 만지려고 한다. 에릭슨은 이 시기에 이러한 영아의 행동을 허용할수록 나중에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하물며 이후의 시기의 자녀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뇌가 성숙하고 경험이 쌓일수록 자아가 생긴다. 즉 자신의 생각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어 한다. 아이의 발달이 빠를수록 이러한 징조는 빨리 나타난다. 
아이가 걸어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를 보살피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고, 미운 일곱 살, 청소년의 반항기도 이러한 발달 현상과 무관치 않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그에 맞게 자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소위 자율성의 폭을 점진적으로 넓혀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방치하라는 것은 아니다. 의사결정 과정에 아이를 참여시키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지만 어른 대하듯 진지하게 대화하고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두뇌도 더 잘 발달하고 자아존중감도 잘 발달한다. 
프로에 등장한 부모는 공통적으로 아이에게 자신의 바람만 요구하고 관철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아무리 부모의 요구가 타당하다 하더라도 자녀가 수용하지 않으면 요구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이것이 반복되면 자녀는 부모의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 요구는 물론 부모에게도 대하여 혐오감이나 적대감을 갖게 된다.      

셋째는 공통적으로 부모의 잔소리가 많았다. 
잔소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아이게 중요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아이가 납득하지 못하는 주문을 들을 이유가 없다. 들으려고 하면 오히려 그 아이가 발달장애아일 것이다. TV 프로에 나온 아이는 장애아는 없었다. 
아이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을 부모가 부단히 요구하면 부작용이 생기고, 그것은 거짓말, 속임수, 반항 행동 등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미성숙한 인간이다. 행동은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다. 반드시 일정한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부모는 성급하게 기대할 필요도 없고 아이에게 지나치게 재촉할 필요도 없다. 기대를 가지고 격려를 하면 언젠가는 바뀐다는 신념으로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나머지 하나는 동시 다발적으로 주문을 하는 사례가 있었다. 아이가 부모의 주문에 응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눈에 거슬리는 수많은 행동에 대하여 일일이 속사포 쏘듯이 주문을 하였다.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 요구를 할 때에는 사려깊고 정선된 행동만 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다음에 주문해도 되는 행동은 지나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아이가 자신이 어떤 행동에 집중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부모의 수시로 다양하게 변하는 부모의 요구는 부모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는 자녀와 부모 간에 분화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자녀의 행동에 부모가 책임을 지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과보호나 과간섭으로 나타난다. 
과보호는 부모가 자녀 대신에 무엇인가 해 주고 그 결과에 대하여 부모가 책임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족 간에는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독립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가족이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으면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머지 가족에게도 연쇄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미국의 가족심리학자 보웬(Bowen)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자녀의 가정을 분석해 본 결과 그 가정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가 가족 간에 정서적 미분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자녀가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하자. 자녀와 분화가 적절하게 된 부모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시험 못 봐서 걱정되겠다.” 그러나 자녀와 분화가 안 된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시험 못 봐서 내가 속상해 죽겠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자녀가 시험을 못 본 것은 자녀의 일이니 자녀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후자는 자녀가 시험을 못 본 것은 부모 일이기도 하니 부모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자녀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 하고, 자신의 행동 결과를 부모에게 떠넘기려 하지 않겠는가? 자녀 교육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자녀를 수용하고 자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그 결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게 하면 된다. 
인간의 행동은 실패 없이 단번에 학습되는 것은 없으며 많은 실패를 통해서 학습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녀가 설령 어떤 학습에 실패하였더라도 학습의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격려만 해 주면 된다. 자녀가 평생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만 생각해도 자녀 교육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갑원 교수]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교육심리학)
대진대학교 교육대학원장(역) 
대진대학교 국제교류협력대학장(하얼빈캠퍼스)(역)
대진대학교 교원연수원장(역)
한국영재교육학회장(역)
대진대학교 명예교수(현)
kangkab@daej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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