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연재] 영웅의 뒤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뛰어난 참모가 있다.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고 손권에게 주유가 있었듯이 조조에게는 순욱이라는 발군의 참모가 있었다. 조조가 초창기에 이룩한 큰 위업은 순욱 없이는 불가능했다.

순욱(荀彧), 자는 문약(文若). 일찍부터 왕좌지재(王佐之才)로 불릴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청년시절에는 조정에서 공직을 맡고 있었는데, 동탁이 도성에 들어오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리고 기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때 기주의 주인이 된 원소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원소의 인물됨과 협량(狹量)을 바로 헤아리고 조조에게로 찾아왔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였다. 조조는 순욱을 얻은 기쁨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나는 자방을 얻었다"

자방(子房)이란 한을 창업한 유방을 도와 숙적 항우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지략을 펼친 명참모 장량(張良)을 일컫는 말이다. 조조에게는 순욱 외에도 곽가나 정욱 순유 허유 만총 등 참모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국을 보는 안목과 통찰력, 전략수립의 정확성 등에서 순욱이 단연 돋보였다.

순욱이 조조를 통하여 남긴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탁이 죽은 후 황제가 이각과 곽사의 무리에 쫓기며 낙양을 배회하고 있을 때, 황제를 먼저 받드는 것이 대권을 잡는 지름길임을 조조에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주군께서 앞장서서 창의(倡義)의 군사를 일으켜 천자를 받드신다면 반드시 대업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머뭇거리면 다른 군웅에게 선수(先手)를 빼앗기고 맙니다"

조조는 그의 말대로 재빨리 황제를 호위하여 낙양으로 입성했다. 그로 인해 이제 막 군벌로 자리잡아가던 조조가 단숨에 황제를 등에 업고 군웅들을 호령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둘째, 조조가 전쟁터로 나갈 때마다 도성에 머무르면서 후방을 경영하고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해왔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승패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조달에 달려있는 법인데, 순욱은 유방을 도와 후방에서 군수품과 병력을 보충하는 역할을 해냈던 명재상 소하의 역할까지도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셋째, 조조가 강북의 패권을 놓고 원소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관도전투에서 조조가 승리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조언을 했다는 점이다. 70만 원소군의 십분의 일인 7만 군사로 출전한 조조는 패전을 거듭하였다.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고 군량과 마초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에 조조는 후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의 전황과 군세를 기록하여 허도에 있는 순욱에게 보내며 조언을 구했다. 순욱이 답신을 보내왔다.

"지금 후퇴하면 원소에게 천하를 뺏기고 맙니다. 원소는 군사만 많을 뿐 사람을 쓸 줄 모르는 위인입니다. 지금은 목줄기처럼 중요한 곳만 지키고 있으면서 원소의 허점이 노출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곧 그런 기회가 올 것입니다"

순욱의 답신을 읽은 조조는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군사를 재정비했다. 이윽고 오소에 있는 원소군의 군량창고에 허점을 발견한 조조,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원소군의 군량을 모두 불태우면서 전세를 반전시킨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원소군을 격퇴하여 강북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조조의 관도전투 승리는 순욱의 조언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뜻을 같이 하면서 함께 달려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조조가 개인적인 야심을 추구했다면 순욱은 조조를 통하여 한실의 부흥을 꾀하였다.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만다.

조조가 눈부시게 성공해가자, 아첨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고 구석(九錫)을 받도록 하자는 공론이 일어난 것이다. 구석은 황제가 공적이 지대한 제후에게 주는 아홉 가지 특전으로, 그것을 받는 것은 왕위나 제위에 성큼 다가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조가 흐뭇하게 공론을 지켜보고 있을 때 순욱이 일어섰다.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기울어가는 한실(漢室)을 붙드셨습니다. 한의 신하로서 처음의 충성스럽고 곧은 뜻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구석 같은 특전으로 위세를 뽐내려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순욱은 평소의 소신대로 입바른 소리를 했다. 조조는 심히 불쾌한 낯빛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결국 중신들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조조는 위공에다 구석의 특전을 받게 되었다.

'아, 내 일찍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구나!'

순욱은 그간 조조를 도와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침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조조는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순욱을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얼마 후, 강남 평정의 대군을 일으킨 조조는 순욱에게 함께 갈 것을 명했다. 가다가 적당한 기회에 제거할 심산이었다. 조조와 함께 일해 온 지 20년이 넘은 순욱이 그런 낌새를 모를 리 있겠는가. 순욱은 중간에서 병을 핑계로 드러누워 버렸다.

얼마 안 있어 조조의 사자가 조그만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열어보니 빈 약사발이 하나 들어있었다. 무슨 뜻이겠는가. '그대가 병들었다 해도 이제 내가 줄 것은 빈 약사발뿐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조조의 심중을 헤아린 순욱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한 독약을 입에 넣었다. 그의 나이 쉰 살이었다.

막상 순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조조도 마음이 아팠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조조가 몸을 일으킬 때부터 강북을 평정할 때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조조는 그를 후하게 장사지내고 경후(敬候)라는 시호를 내렸다. 자책감과 함께 후회의 눈물이 솟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조조의 장자방으로 불렸던 순욱.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기울어 가는 한실에 충의를 다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에서 한실의 부흥이 과연 민심과 부합하는 최선의 비전이었을까? 좀 더 유연하게 처신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조조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진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다음주에 계속>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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