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석 매형 땅 팔아 독립자금 마련….“북만주 독립군에게 독립자금 전달”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내외뉴스통신] 김형만 선임기자

그분의 삶은 국가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셨고, 국가발전을 위해 지혜를 나누셨고, 국가인재 발굴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셨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남편의 흔적은 없다. 

세상은 내 남편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분은 여전히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거주하는 유봉옥(여, 87세) 할머님이 남편 故 김태록(金泰祿) 씨 생전 모습이 남아있는 낡은 사진첩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유 할머니를 붙들고 있는 故 김태록 (1905.2.9.~1972.8.28.) 씨의 삶의 흔적들을 유봉옥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따라가 봤다. 

남편과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즈음 결혼을 했다. 그 당시 남편의 나이 52세이고 내 나이 22살이었다. 결혼 전 남편이 해왔던 일들은 남편을 통해 듣거나 지인들을 통해 들었다. 이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야기이다. (아랫글은 유봉옥 어머니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모습이 남아있는 낡은 사진첩을 바라보며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모습이 남아있는 낡은 사진첩을 바라보며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Q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어떤 일을 하셨는가?

A 남편은 철저하게 가려진 인물이었다. 남편은 3.1운동 항쟁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서 태어나셨고 한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셨다.

성장해서는 20대 후반 1930년경 마지막 한강철교 건설 때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공사 감독으로 참여했다. 그 당시 일본인 관리소장이 더 많은 보수를 제시하며 일본으로 가서 일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나라 잃은 설움도 큰데 당신네 나라에까지 가서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고 거부했다. 

나라 잃은 서러움이 극도에 달했을 때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중국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기로 작정하고 자금 마련을 위해 삼천석 부농인 매형을 찾아갔다.

그 당시 둘째 누나의 남편(우성현, 당시 47세)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에서 삼천석 부농이었다. 벼 삼천석 거둬들일 땅은 실로 엄청난 규모다.

내 남편은 매형을 찾아가 가지고 계시는 땅 중 50석은 누님 명의로 남겨 주고 나머지는 매형 마음대로 사용하시되, 일천석을 저에게 주시면 “나라를 찾는 데 쓰겠다”라고 설득했다. 고심할 줄 알았던 매형이 쾌히 승낙해 일천 석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독립자금 마련한 후 임시정부(김구 선생)로부터 직접전달 지시를 받아 북만주 독립군에게 독립자금 전달하기 위해 목숨 걸고 북만주로 향했다.

그 먼 길 여정에 다리에 혹이나 걷지 못할 정도로 악화했다.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 없다는 진단에 독립자금 운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고 생전에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두 분 누님에게 마지막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의술이 뛰어난 선생님을 만나 다리를 고치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독립자금을 무사히 전달했다.

독립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본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었고 몸을 숨기기 위해 조계사를 찾아 ‘근하’라는 법명을 받고 삭발한 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도피해 1945년 해방 때까지 은거 생활을 했다.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Q 해방 후 어떤 활동을 하셨나?

A 너무나 바쁘신 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신익희 선생과 친분이 꽤 깊었다. 정치 입문은 하지 않으셨지만, 신익희 선생님, 박순천 선생님, 장면 선생님 등과 머리를 맞대고 국가재건을 위해 지혜를 보태셨다. 신혼 초임에도 의사당에 계시는 날이 많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에 들어오셨을 때나 얼굴을 뵐 정도였다.

신익희 선생 별세 후 정치권과는 교류를 끊으시고 1950년 즈음 결성한 홍륜회 회원들과 후학 양성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셨다.

Q 홍륜회는 어떤 조직이고 무슨 목적으로 결성되었나?

A 남편은 해방 후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산해 해인사, 통도사 등 유명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셨다. 그러다 일제의 탄압으로 무너져있던 교육의 지표를 다시 세워 교육을 장려하고, 나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뜻있는 학자들 몇몇이 모여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홍륜회의 시작이다.

1972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홍륜회는 남편 김태록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 72명의 학자가 뜻을 모아 대전시 동구 용운동에 2만2천 평의 땅을 샀다. 남편은 1972년 8월 28일 회의차 대전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6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홍륜회가 산 땅에 대전대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대전대학교 설립이 홍륜회와 관계있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남편 돌아가신 후 홍륜회 활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모습이 남아있는 낡은 사진첩을 보이며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 남편인 故 김태록 씨 생전 모습이 남아있는 낡은 사진첩을 보이며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있는 유봉옥 할머니 (사진 김형만 기자)

Q 어머님이 기억하는 아버님은 어떤 분?

A 현인군자 이셨다. 그분 얼굴만 봐도 좋았다. 결혼 전 나는 형제 7남매 중 막내였다. 작은 오빠가 포목점을 열어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움막생활을 했다. 청렴한 분이셨다. 아버님을 만나면서 나는 새장에 갇혔던 새가 자유를 찾은 느낌이라 할까? (웃음)

나는 지금도 그 어른과 살고 있다. 내 마음에는 여전히 살아계신다, 그리고 내겐 하늘 밑에 제일 위대하신 분이셨고, 나는 남편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스승님으로 섬겼다. 한자 무지인 내가 한자로 된 불경을 매일 읽을 수 있도록 해준 분이다.

▲사진 좌측,  다리 부종으로 병이 악화되었을 때 모습과 건강했을 때의 청년 모습 (사진 김형만 기자)
▲사진 좌측, 다리 부종으로 병이 악화되었을 때 모습과 건강했을 때의 청년 모습 (사진 김형만 기자)

Q 독립유공자 추서는 왜 하지 않았나? 

A 남편 살아계실 때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독립유공자 추서가 있었다. 그 당시 수원시 산업계 장이었던 간홍균 씨가 남편을 찾아와 제의했지만 “나를 소인배 만들지 말라! 내 나라, 내 땅 찾기 위해 나는 봉사했을 뿐이다. 이런 것으로 공치사하기 싫다”라고 단호히 거절하셨다.

김태록 씨의 4남 김강륜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님의 뜻이 그랬기에 독립유공자 등록, 그리고 혜택 생각지도 않았다. 독립운동가이셨던 아버님의 명예를 찾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경찰에 조사받은 근거나 아버님 활동에 대한 주변 증언이 필요한데 그 당시 분들이 다 돌아가셔 입증할 수가 없어 독립유공자 추서는 어렵게 되었다.

Q 4남인 김강륜 씨에게 아버님의 유지가 있었다는데 무엇인가? 

A 아버님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8살이던 해에 돌아가셨다. 아버님 살아생전 어린 나에게 “너는 성장해서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말을 수없이 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그 뜻을 깨닫게 되어 아버지 유지를 받들 수 있는 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지금 사업을 찾았다.

현재 신재생에너지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버려지는 폐기물을 이용하여 친환경 방식으로 재생 오일과 전기, 수소를 생산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만의 기술로 지구환경을 지키고, 해외에 진출한 지방정부나 기업으로부터 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 환경을 지키고, 외화도 벌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아버님이 말씀하시던 애국이 아닐까 싶다.

▲ 아버님의 유지 받들어 운영하고 있는 창조이앤이 전경 사진 (사진 김형만 기자)
▲ 아버님의 유지 받들어 운영하고 있는 창조이앤이 전경 사진 (사진 김형만 기자)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A 내 남편이자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다. 남편이 포기했던 독립유공자 등록을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추서할 수 없게 되어 아쉽지만, 나라를 위해 그의 삶을 바쳤던 희생을 이 글을 읽고 누군가 공감해 주고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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