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갑원 교수
강갑원 교수

[내외뉴스통신] 강갑원 대진대학교 명예교수

평등교육과 수월성 교육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 현상은 상통한다. 평등 교육은 헌법과 초·중등교육법에서 명시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소질과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것을 교육 기회의 평등이라고 보고 있다.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아 자신의 잠재 가능성을 계발하고 신장하는 교육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평등 교육은 개인의 수월성 교육이기도 하다. 학생마다 성장 속도와 양태가 다르지만 모든 교육은 개인의 수월성을 추구하고 있다. 수월성이 반드시 남보다 뛰어나는 좁은 의미로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수월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학생 각자에게 적합한 서로 다른 교육 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이 헌법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수한 학생들에게 적합한 교육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불평등 교육, 차별 교육이라고 여기면서 장애 학생에게 제공하는 특수교육은 차별교육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논리적 오류와 특정 형태의 교육에 반감이 작동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수아나 영재아도 자신에게 맞는 교육을 받지 못하면 학습에 흥미를 잃거나 자신의 영재성을 발달시키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피해를 입는 것은 장애아와 마찬가지이다. 양 극단에 있는 학생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미세한 차이가 있더라도 모든 학생은 각자에게 적합한 교육이 존재한다. 다만 집단 교육형태에서 이를 실현하기 어려울 뿐이다. 자율고, 특목고, 영재학교의 이상적 교육 형태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헌법정신이나 초중등교육법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교육은 개인의 특성, 요구, 수준에 맞게 하는 개별화 교육이다. 교육에서는 개별화 교육(individualize education)을 가장 이상적 교육 접근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개별화 교육은 학생과 교사가 1대1 개인 교육 형태일 때 실현하기 쉬운 것은 맞지만 이것이 교육이 개별화 교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최초의 교육인 가정교육은 개별화 교육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집단 형태의 교육이 생겨나기 전에는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 자녀는 대부분 개인 교육을 받았으며 결국 그것이 개별화교육이었다. 이 일을 각 분야의 지식이 많은 pedagogue가 맡았다. 노예( 또는 노복:奴僕)라는 뜻이다. 교육학자를 pdagogue라고 부르고 교육학을 pedagogy라고 불리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평등 교육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준화 교육과는 다르다. 평준화는 교육이라는 용어와 결합해서는 안 되는 용어였다. 그동안 잘못 결합하여 사용하였다. 교육 평준화를 억지로 해석하면 모든 학생이 동일한 교육목표를 동일한 수준으로 달성하는 교육이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준화 교육이 평등 교육인양 하는 정치 집단이 있다. 이들이 추구한 평등 교육의 결과는 하향 평준화였다. 학생 간의 성취도에 별 차이가 없이 전반적으로 수준만 낮아졌다는 의미이다.  

교육에 평준화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학교와 고드학교가 무시험 제도로 바뀌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1968년까지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다. 초등학생이 과도한 중학교 입시 준비에 내몰리는 것이 비교육적이라는 인식이 분출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간에 학교 서열이 있어서 우수한 학교는 미리 입학 시험을 보고(전기) 나머지 학교는 나중에(후기) 시험을 보았다. 1964년 서울, 경기 지역 전기 입학시험 때였다. 자연 과목 18번 문제 때문에 소위 ‘무즙’ 파동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문제는 ‘엿을 만드는 과정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되는 것은?’ 이었다. 정답은 1번 디아스타아제였으나  오답 2번이 무즙이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2번을 선택하여 낙방한 학생들의 학부모가 그것을 정답으로 해달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교육감이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으면 탈락자를 구제해주겠다고 하자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왔고, 법원 행정소송까지 가게 결국 무즙도 정답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고 이론 이해 낙방했던 40여 명의 학생이 추가 입학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중학교 무시험 전형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하였고, 1968년 7.15 교육개혁안이 발표되었다. 결국 1969년 서울을 필두로 중학교 입시제도가 폐지되고 추첨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에도 중학교 평준화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고등학교 입시는 여전히 치열하였다. 명문고 입시과열이 문제가 되자 1972년 12월 고교 입시제도개혁안이 마련하였다. 그 핵심은 고교평준화였다. 학군을 설정하고 선발고사에 의해 입학 자격자를 뽑은 후 학군별로 추첨하여 학생을 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부실 학교를 정리하고 학교 시설을 정비하였다. 교원의 자질 향상과 처우개선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었다. 드디어 1974년부터 서울과 부산을 필두로 이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때 사용된 고교 평준화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평준화 교육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학교 배정을 할 때 학교 간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의 평준화였다. 

이후 평준화가 교육에서 이상적 개념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것이 평등교육과 혼용되면서 평등교육의 본질이 평준화 교육인 것처럼 오용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교육의 평준화가 교육 기회의 평준화가 아니라 교육의 결과의 평준화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교육 왜곡이 나타났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 기반한 교육 평준화를 마치 평등 교육인 것처럼 특정 정치 집단이 수용하면서 교육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 평등과 교육적 평등을 동일시함으로써 학생들의 학력 하향 평준화를 초래하였다. 헌법에 명시된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을 평등교육의 권리의 실현은 좌절되었고 그 몫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특정 정치 진영에서 주장하는 형평성에 기초한 평등 교육은 헌법과 초·중등교육법에서 말하는 평등 교육이 아니다. 이들은 교육 기회의 평등보다 교육 결과의 평등에 무게를 더 두고 있는 듯하다. 교육의 기회평등도 실현하기도 쉽지 않다. 교육 결과의 평등은 성취도가 낮은 학생을 끌어올리기보다는 높은 학생을 끌어내리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하향 평준화로 귀결된다. 

평등 교육은 학생 각자에게 적합한 교육이며 이것은 결국 수월성 교육과 맥락이 같다는 점에서 수월성 교육을 차별교육이라고 보는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교육의 결과는 절대로 평등할 수 없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교육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절대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차이를 줄이려는 노력만 할 뿐이다. 산천초목도 성장세가 다 같지 안다. 그 속에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서 오는 상대적 열등감이나 박탈감을 있다면 해소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것은 아마도 승화일 것이다. 서로의 교육 결과의 차이를 우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 보고, 교육결과의 차이로 인해 각자에게 주어지는 일은 역할로 보려는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의 차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을 줄이려고 집단의 성장은 지체되고 개인 간 갈등만 깊어진다. 모든 고등학생이 원한다고 명문대학교에 입학시켜줄 수 없고 원한다고 모두에게 취직을 시켜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새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형평성이니 평준화니 하는 실현 불가능한 이념으로써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할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을 어떻게 하면 받게 할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교육정책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교육은 정치로부터 중립되어하는 것이 헌법 정신이다. 지금처럼 형식적으로 만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구태를 던져버려야 한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입김도 작용해서는 안 된다. 교육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특정 정치 집단을 업고 교육감에 출마하고 이들의 입김에 따라 교육 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학생들은 정치인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이 아니고 실험실의 모르모토가 아니다. 학생 개개인의 자아성장과 자아실현을 추구하면서 21세기 국가 간 지식과 기술 경쟁 사회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학생 개인에게 적합한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교육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 우수한 학생을 위한 교육도 존재하고 뒤쳐진 학생을 위한 교육도 필요하다. 정규 학교 교육이 아니 비 정규교육 형태도 필요하다. 사교육은 무조건 나쁘다는 프레임도 걷어치워야 한다. 사교육 없이도 제도권에서 좋은 교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수능 문제의 변별력을 놓이기 위해 죽었다 깨도 못 푸는 문제를 출제해야만 하는 현실에서 사교육만 받지 말라고 하면 되겠는가? 그러한 고난도 문제를 풀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학원이 강남에 있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교육의 동맥 경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원점부터 다시 검토하여 백년대계를 수립하자. 

 [강갑원 교수]
중앙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교육심리학)
대진대학교 교육대학원장(역) 
대진대학교 국제교류협력대학장(하얼빈캠퍼스)(역)
대진대학교 교원연수원장(역)
한국영재교육학회장(역)
대진대학교 명예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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