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네가 해 줄 수 없겠니?"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오후까지 결정을 내려주면 좋겠다. 부탁한다"

2010년 2월 말경의 일이었습니다. DMB 라디오프로그램 1인 제작에 아나운서의 지원을 독려했음에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당시 아나운서 팀장이 필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해외 연수의 기회를 얻어 미국의 한 대학교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던 필자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일은 방송사에서 15년이 넘게 근무를 했으니 당연히 전문가 수준의 영상 촬영과 편집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영상 제작과 관련한 프로젝트가 생기면 필자와 한 팀이 되고 싶어하고, 틈틈이 필자에게 영상 편집에 대해 물어보는 학생들에게 "나는 못해"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영상 촬영은 틈틈이 배워 놓은 것이 있어서 크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편집이었습니다. 그길로 '파이널 컷 스튜디오'라는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과 관련 서적를 사서, 말 그대로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방송사에 복귀하면서 소중한 기회를 주신 분들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필자가 직접 제작한 영상 세 편을 아침프로그램을 통해 방송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무슨 일이든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놓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DMB 라디오프로그램 1인 제작을 도와달라는 팀장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변방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같은 '한밤의 DMB'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PD이자 DJ가 되었고, 벌써 6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변방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DMB 채널을 통한 라디오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직까지도 DMB라디오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 많을 겁니다. 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는 영상이나 음성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기술 및 이를 휴대용 IT기기에서 방송하는 서비스를 말합니다. 즉, 기존의 FM이나 AM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의 송수신 기술을 이용한 방송입니다. 따라서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방식이기 때문에 청취층이 많지 않습니다. DMB방송 초기에 모 프로그램의 DJ를 했던 유리상자의 박승화 씨는 지금 진행하는 FM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요, 몇 년 전에 심야에 생방송으로 DMB 라디오 방송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선물을 잔뜩 준비해 놓고 '지금부터 청취자 전화를 받습니다. 전화 주시면 선물 드릴게요'라고 얘기했는데, 전화가 안 오는 거예요. 정말 한 시간 동안 한 통도 전화가 오지 않는데 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FM만 해도 수십 개의 채널이 있고 청취율 5%만 돼도 인기 프로그램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청취율이 1%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채널의 한계가 명확한 DMB라디오 프로그램은 정말 아무도 듣지 않을 수도 있는 방송입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은 방송을 진행하는 필자의 마음을 오히려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테니 마음에 있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듣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띄엄띄엄 청취자들의 사연이 올라오더니 3년쯤 지나서는 꽤 많은 사연이 답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종방을 앞두고는 매일같이 아쉬움을 호소하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20년이 넘게 방송사에서 아나운서 일을 해 오며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또 많은 프로그램과 이별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필자가 직접 제작과 진행을 해온 '한밤의 DMB'만큼 이별의 감정이 복잡한 프로그램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청취자와의 소통으로 필자가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로서 '한밤의 DMB' 이전에 진행했던 프로그램은 솔직한 방송이 없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뉴스를 진행하면서도 담담하게 읽어야 했으며 이맘때면 해마다 방송에 등장하는 도다리 쑥국을, 마치 올해 처음 보는 음식인 것처럼 신기해하며 방송을 했습니다. 수십 년 방송을 한 진행자로서 한 번 흘낏 보기만 해도 잘못된 방송, 재미없게 촬영된 방송을 알아차릴 수 있긴 해도 방송진행 중에 "왜 이렇게 재미없게 만들었죠?"라고 얘기하지 못한 이유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고 오히려 방송을 보면서 추임새로 재미있게 포장하려고 애를 쓰는 일이 진행자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인 제작 시스템인 '한밤의 DMB'는 눈치를 볼 사람도 없고 오로지 진행자 자신과 청취자에게만 충실하면 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즉,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고백할 수 있고,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우선 DJ로서 필자가 좋아하는 배철수 님만큼 노래를 많이 알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대학에 다닐 때, 교내 방송국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라디오 PD보다 7080 노래는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만, DJ가 본업인 분들의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당일 녹음, 당일 방송을 원칙으로 하되 휴가를 가는 날에는 음악만 편성해서 방송한다고 고지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일 녹음 원칙에 따라 신청곡이 들어오면 바로 그날 방송이 되어야 하는데 휴가를 가기 위해 몇일치를 녹음하게 되면 소통에 시차가 생기게 되고 자칫 청취자에게 '내가 보낸 사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하는 오해가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오늘 휴가를 가게 되어 음악만 편성해서 방송합니다, 보내주신 사연은 내일 방송해드리겠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길게 내다봤을 때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DJ도 쉬는 날이 있어야지'라며 이해해 주시는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낮은 자세로 방송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집단지성의 힘이었습니다. DJ가 노래를 잘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청취자들이 다른 프로그램에서 청취한 좋은 노래들을 신청곡으로 올려주셨습니다. 2014년 가을,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함께했던 작가를 내보내고 원고 없이 방송을 하게 됐을 때는 청취자들이 프로그램의 오프닝으로 쓰일 만한 글을 보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줄곧 청취자들이 보내준 원고를 오프닝으로 사용했지만, 처음 청취자들이 보낸 오프닝으로 방송을 하던 날,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한밤의 DMB'는 필자가 만들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주인은 매일같이 참여해주시는 청취자였던 것입니다.
'함께 만드는 기쁨', 2016년 SBS의 슬로건입니다. '한밤의 DMB'를 제작하면서 필자는 함께 만드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잘난 척하면서 혼자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자세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한밤의 DMB'는 아나운서 혼자, 작가도 없고 그 흔한 청취자 선물도 없이 만들어 나가는 매우 초라한 프로그램입니다만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청취자의 높은 참여율과 도움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청취자와 진행자 모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만족감 높은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24시간 음악만 제공하는 채널로 SBS DMB 라디오가 성격이 바뀌면서 프로그램이 폐지되었지만 청취자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은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맛보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었고 아나운서로서 필자가 방송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크나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한밤의 DMB' 홈페이지에는 10년 후에 필자를 만나자는 애청자의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필자가 은퇴를 하는 2026년 봄에 오프라인 만남을 예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청취자들이 계속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필자는 약속을 한 기억이 없는데 이분들은 필자와의 만남을 위해 벌써부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스타도 아닌 필자에게 이런 홍복이 올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잡아놓은 날은 빨리 온다고 했습니다. 청취자들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도록 앞으로 10년 잘 살아야겠습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美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업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모닝와이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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